영화 ‘시’로 16년만에 스크린 나들이 윤정희씨

2010.04.19 17:43 입력 2010.04.19 23:13 수정
백승찬·사진 박민규 기자

“사치하면 피곤…심플하게 사는 걸 좋아해 자동차도 없어요”

한번 여배우는 영원한 여배우다. 마지막 작품 ‘만무방’을 찍은 지도 16년이 됐건만, 윤정희씨(65)는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2년여 전, 윤정희·피아니스트 백건우씨(63)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이창동 감독은 윤정희씨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고백했다. 윤정희씨는 오랜 시간 기다리던 ‘좋은 감독, 좋은 작품’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이 설렜다.

이 감독의 신작 ‘시’에서 윤씨는 경기도의 어느 소도시에서 중학생 손자와 살고 있는 60대 중반 여성 역을 연기한다. 이 여성은 꽃장식 모자, 레이스 달린 옷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다. 그는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수강한 뒤 생애 처음으로 시를 쓴다. 시작(詩作)을 통해 세상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는 그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접하면서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이 여성의 이름은 윤씨의 본명과 같은 미자다. 이 소녀 같은 할머니 미자는 윤씨의 인상과 고스란히 겹친다. 윤씨는 “이창동 감독이 나를 망원경으로 살펴보고 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1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윤씨는 테이블에 무심코 놓인 꽃을 보면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시’는 다음달 열리는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고, 한국에서도 5월13일 개봉한다.

[경향과의 만남]영화 ‘시’로 16년만에 스크린 나들이 윤정희씨

- 문학소녀의 원형질 같은 심성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로맨틱해요. 우리 시대 친구들은 다들 그럴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합창단, 발레, 고전무용을 하면서 그런 감성이 길러진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도 책을 읽으면 주인공에게 금방 빠져들었어요. 그래도 배우는 꿈도 안꿨는데, 어느날 친구들이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청춘극장’이 영화화된다며 오디션에 간다더군요. 저도 그 소설을 읽은 터라 오디션에 갔는데, 주인공 오유경에 동화됐기 때문인지 합격했어요.”

- 칸영화제 초청을 축하드립니다. 공교롭게도 이창동 감독의 전작 ‘밀양’으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씨도 ‘하녀’로 초청받았습니다.

“제가 청룡영화제 심사할 때, 전도연씨가 나온 ‘내 마음의 풍금’이 출품됐어요. 그때 전도연씨의 신인여우상에 한 표를 던졌어요. 정말 연기를 잘하더군요.”

- 수상을 기대하십니까.

“‘만무방’으로 몬트리올 영화제에 갔는데, 후에 알고보니 1표 차로 여우주연상을 놓쳤어요. 하지만 이번에 저는 기대 안해요. 오히려 전 ‘시’가 ‘팔메도르’(황금종려상)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출연한 영화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제가 심사위원이라면 ‘시’를 추천했을 거예요. ‘시’가 팔메도르를 받는다면 거기 출연한 여배우는 같은 영광을 나누는 것이니까요.”

윤정희씨가 한국영화계에서 자리를 비운 16년간은 공교롭게도 한국영화의 도약기와 고스란히 겹친다. 1960년대부터 300편 이상의 영화에서 활약한 배우이지만, 최근 한국영화의 스타일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 이창동 감독의 사실적인 연기 지도에 적응하기가 쉬웠습니까.

“지난해 8월에 첫 촬영을 시작했어요. 의외로 여러번 찍지 않더라고요. 순간 ‘아, 내가 합격했구나’ 생각했어요.(웃음) 오랜만의 현장이었지만, 마치 오랜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젊은 스태프들도 자기 일에 긍지를 갖고 있었어요. 한 장면, 한 장면 정성을 다했으니, 지금도 그 모습들이 선해요. 하기 싫은 연기였다면 너무나 불편했겠죠. 그러나 전 오픈된 사람이에요. 연기자는 변해야죠. 변하지 않겠다는 건 자존심도 아니고 고집일 뿐이죠. 이 감독은 지금 제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기를 요구했어요. ‘연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죠. 차라리 멜로드라마처럼 감정을 높이면 더 쉽죠. 전 또다른 윤정희의 모습이 나오는 걸 상상하며 즐겁게 찍었어요.”

윤씨는 본격적인 동시녹음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 감독은 “자기 것을 버린다는 데 저항이 없으셨다. 그게 말이 쉽지(어렵다)”라고 말했다.

- 한국영화의 성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 사이 발전한 한국영화에 출연하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영화상 심사를 하면서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같은 ‘누벨 바그’(새로운 물결) 감독들의 데뷔작을 봤어요. 전 제가 참 러키하다고 생각해요. 발전하는 누벨 바그 감독들의 모습을 태어날 때부터 봤으니까요. 이상하게도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도 제가 꼭 출연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누가 날 생각해줄지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작품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어요. 전 저를 아꼈어요. 영화, 드라마, 연극 제의가 오지 않은 건 아닌데, 저와 맞지 않아 거절하고 기다렸습니다. 초조하지도 않았고요. 배우라면 자존심을 지켜야죠.”

- 나이든 여배우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화라는 게 뭐예요. 삶을 재현하는 것. 그 삶에 젊음만 있나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현하는 게 배우의 몫이죠. 그걸 단순히 모방하는 게 아니라 예술적으로 표현해야 하고요.”

- 윤정희·백건우씨 부부의 파리 자택은 1970년대에 입주한 낡은 아파트입니다. 자동차도 없으시다고요.

“사치를 하면 피곤해요. 차가 없는 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집 앞에 지하철이 있고, 공항갈 때 차를 부르면 5분 만에 오고, 연주여행을 가도 주최 측에서 차량을 제공하는데 왜 필요해요. 저희 부부는 심플하게 사는 걸 좋아해요. 마음은 다른 데 빼앗겨야죠. 산책을 한다든가, 음악을 듣는다든가. 제가 대단한 ‘뮤직 러버’인데, 남편은 프로페셔널한 사람보다는 저같이 음악 좋아하는 청중을 위해 연주하잖아요. 그래서 제 의견을 많이 물어봐요. 남편이 음악 프로그램을 계속 연주하면 저도 조금씩 연주가 변하는 걸 느껴요. 게다가 남편이 연주하는 콘체르토 레퍼토리만 80개예요. 파리엔 언제든 전화해 밥먹을 수 있는 30년된 친구도 있고요. 이 정도면 참 부자 아닌가요.”

- 백건우씨와는 해로하고 계십니다. 음악인의 아내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입니까.

“연습이나 프로그램 선택 과정은 참 행복해요. 그런데 연주회 할 때는 긴장해서 차마 눈을 뜰 수조차 없어요. 항상 감고 듣죠. 남편은 ‘이제 나 좀 믿고 들을래?’라고 말하곤 하죠.(웃음) 대신 다른 음악인들의 연주를 들으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전부터 아마 음악인의 와이프가 될 자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들르는 일이 있으면 바흐, 슈베르트 같은 좋은 카세트를 사오곤 했는데 전 그걸 듣고 또 들었어요. 여러번 듣는 게 몸에 배어 있어요. 전 음악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요. 그런데 남편은 영화 없이는 하루도 못살아요.(웃음) 항상 연주를 마치고 오면 DVD로 영화를 봐요.”

- 한창 활동하시던 196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시면 무엇이 같고 다릅니까.

“변하지 않은 건 영화인들의 욕심, 열정이죠. 전 예전 영화인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김승호, 황정순, 복혜숙, 조미령, 김신재, 신성일, 신영균, 최무룡씨 등 정말 훌륭한 배우였고, 또 신상옥, 김수용, 김기덕, 유현목 감독은 얼마나 좋은 분이셨습니까. 젊은 세대들이 그때 우리의 모습을 못봐서 그렇지, 저희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이제 경제와 나라의 위상이 발전해 한국영화도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에 나가고 부산국제영화제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죠. 하지만 대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 왜 ‘시’를 봐야 하나요.

“우리 세대분들이 예전에 영화 참 많이 봤거든요. 이번에 무조건 와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얼마나 험악해요.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나고…. 2시간 동안 모든 걸 잊고 영화 속에 빠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함께 꿈을 꾸자고요.”

■ 윤정희는

손미자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1966년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청춘극장’ 오디션에 합격해 배우로 데뷔했다. ‘안개’ ‘독짓는 늙은이’ ‘분례기’ 등에 출연하며 60년대 문희, 남정임씨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다. 윤정희씨는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경력은 그분들이 훨씬 선배”라고 말했다. 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만무방’(1994) 이후 ‘16년 만의 복귀’라는 시선에 대해 “복귀가 아니다. 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하면서 영화를 떠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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