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으로 녹인 한반도 이 정부가 급랭시켜”

2010.08.17 21:42 입력 2010.08.18 10:29 수정
유인경 선임기자

DJ 서거 1주기 그의 통일철학 전하는 ‘마지막 동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햇볕정책 설계·전도사6·15 공동선언의 주역

‘나는 그와 점심을 같이하며 아태평화재단 일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두시간이 넘게 남북문제, 북한 핵문제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예상대로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내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삼고초려’였다.

나는 그를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임 총장은 정치인 옆에는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요조숙녀 같은 사람을 소도둑놈이 훔쳐온 격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중에서)

군인·교수·외교관·정치인 등 다양한 삶을 살았지만 일관되게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해온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평화와 화합’이라는 면에서 완벽한 공감대를 이뤘다고 회고한다.|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군인·교수·외교관·정치인 등 다양한 삶을 살았지만 일관되게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해온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평화와 화합’이라는 면에서 완벽한 공감대를 이뤘다고 회고한다.|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최근 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는 숱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그의 경험과 재능이 탐났다’ ‘삼고초려’ ‘천군만마를 얻었다’ 등 유독 애정어린 표현으로 묘사된 인물이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77)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3단계 통일론’을 임 전 장관과의 합작품이라고 할 만큼 그를 신뢰했고, 그의 전문적 식견을 존중했다. 두 사람은 ‘지적인 동지’ 사이였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군인같지 않으나 군인다운 사람’이라고 평한 임 전 장관은 김 전 대통령 서거 1년이 된 요즘 고인의 통일철학을 전하느라 바쁘다.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이때, 그를 만났다. 지난 13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다.

-18일이 김 전 대통령 1주기입니다. 고인에 대한 가장 인상깊은 추억은 무엇입니까.

“15년을 그분과 함께 했습니다. 그분을 추억할 때면 특정 사건보다는 토론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특히 아태평화재단에서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둘이 마주 앉아 여러 날 서로 양보없이 치열한 토론을 한 것이 깊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전 이북이 고향이고 군인 출신이라 호남 출신 정치인인 그분과는 지연·학연이 없었어요. 게다가 당시엔 군사정권시절이라 그에 대한 험담만 들어서 지인을 통해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계속 거절했죠. 직접 만나 대화하고서야 그분에 대한 오해를 풀었습니다. 탁월한 식견과 학구적 자세, 명철한 통찰력과 치밀성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어요. 토론을 좋아하고 자기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고 수긍이 되면 곧 받아들이는 분이었어요.”

-김 전 대통령이 가장 아끼는 분이었다고 주변에서 평합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제가 곁눈질하지 않고 맡겨진 일에 전념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신 것 아닐까요. 대통령이 되기 전에 그분이 제게 전국구 의원을 제안했어요. 제가 ‘정치엔 능력도 취미도 없다’고 단번에 거절하니까 놀라 ‘진심이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리곤 ‘다들 국회의원 하려고 얼마나 난리인데… 존경합니다’라며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엔 제게 차관급인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맡겼습니다. 당시 제가 65세였고 6년 전 이미 차관을 지낸 터라 상당히 미안해하셨죠.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일에만 욕심이 있으니 괘념치 않는다’고 말씀드렸더니 고마워하셨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게 제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인데, 그 일을 맡겨준 대통령의 신뢰에 감사할 뿐입니다.

-올해 6·15선언 10주년을 맞았습니다만, 남북관계에선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한 강연에서 ‘이 정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회를 위기로 만든다’고 했는데요.

고 김 전 대통령 집무실에서 통일한국을 상징하는 한반도기를 바라보고 있는 임동원 전 장관.  |김세구 선임기자

고 김 전 대통령 집무실에서 통일한국을 상징하는 한반도기를 바라보고 있는 임동원 전 장관. |김세구 선임기자

“현 정부가 집권한 지 2년반이 지났는데 남북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또 남은 기간 동안 진전될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지 않아 걱정입니다. 근본적인 통일철학과 남북관계의 비전이 문제죠. 남북관계의 핵심은 ‘북한을 보는 시각’입니다. 그 시각은 첫째 북한이 곧 망할 것으로 보는 ‘붕괴임박론’이고 둘째는 중국·베트남처럼 점진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보는 ‘점진적 변화론’이죠. 이 정부는 북한의 붕괴임박론을 믿고 북한의 정치경제적 불안정과 급변사태를 기다리면서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강경책을 밀고 나가고 있어요. 그러나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처사가 아닙니다. 북한의 불안정과 위기는 곧 한반도의 불안정과 위기를 초래합니다. 평화와 통일은 멀어지고 긴장이 고조됩니다. 더더욱 우려되는 건 북한이 미국과 우리 정부의 경제적 도움을 못받아 중국의 경제권에 의지하다 결국 중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지난 4월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가 ‘MB의 강경정책이 북한을 잃게 하고 있다’는 기사를 썼겠습니까. 남북이 상대방을 적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불신과 대결이 아니라 화해·협력해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남북의 지혜를 모은 남북기본합의서와 6·15 공동선언, 실천강령인 10·4선언을 이행하면 되는데 이전 정부의 정책을 모두 부정하는 일만 하니 답답할 뿐입니다.”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불립니다. 공감하는 이들도 많지만, 북한에 대한 ‘퍼붓기’ 식 원조는 더 이상 해결책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퍼붓기란 말에는 왜곡과 과장이 많습니다. 정확한 팩트(fact·사실)를 알아야 해요. 지난 10년간 남북협력기금 중 남북협력사업 집행액이 3조6000억원입니다. 철도·도로연결사업에 7000억원, 개성공단 건설관련 사업에 6000억원이 배정되었고, 식량·비료·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이 2조3000억원이에요. 국민 1명당 연간 4000원 정도를 북한 사람들에게 준 셈이죠. 쉽게 표현하면 1년에 자장면 한 그릇 사준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 돈은 경제적으로 측량하기 어려운 성과를 낳았습니다. 식량과 비료 지원으로 남북관계가 부드러워졌고 무엇보다 이산가족 상봉으로 2만명이 만났고 44만명이나 남북간에 왕래와 교류를 했습니다. 금강산과 개성지구가 개방되고 상대방을 보다 잘 알게 되어 정치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 만들기에 기여했다고 확신합니다. 최근 대북 지원이 끊기면서 70만t의 쌀이 남아돌아 연간 창고이용료만 3000억원이 든다고 해요. 이 쌀을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대신 동물사료로 쓴다고, 북한이 금방 망하고 우리나라가 잘살게 됩니까. 무엇보다 쌀값이 떨어져 당장 농민들에게 그 타격이 돌아가지 않나요. 인도적 차원에서 이념을 떠나 남북교류의 물꼬를 터줘야 해요. 남북협력기금은 전쟁과 북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보험료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북한은 군사적 도발도 하고 개성공단 폐쇄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북한의 고의적 도발에는 적정한 수준의 대응조치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강경한 항의도 필요하고요. 그러나 우리 정부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인한 도발이라면 작용과 반작용의 문제가 있으므로 원인 해소가 중요하죠. 핵폐기 우선 등 남측의 전제조건을 주장하는 ‘입구전략’보다 우선 조건없이 만나 회담 후에 해결방안을 찾는 ‘출구전략’이 필요합니다.”

-국내 인사 가운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가장 많이 만난 것으로 압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도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보고 평가해달라’는 특명을 받고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우리에게 알려진 김정일 위원장은 권력을 상속받은 무능력자, 백성을 먹여살리지 못하면서 공포정치로 탄압하는 비정상적 독재자의 모습입니다. 또 성격이 음울하고 괴팍하며 잔인하고 위험한 인물, ‘기쁨조’에 둘러싸여 밤마다 술판을 즐기는 방탕한 미치광이의 이미지가 형성돼 있죠. 그러나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본 많은 인사들이 받은 인상은 비슷하더군요. 30년간 당에서 요직을 맡아 지도자 수련을 받은 사람답게 정보에 밝고 박식하며 머리회전이 빠른 인물이라는 평입니다.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대화와 협상이 가능한 지도자라는 평가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국민들이 굶주리는데도 북한이 붕괴되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정신적, 육체적 특성으로 나눠서 봐야 합니다. 정신적으로는 ‘주체사상과 수령에 대한 맹종’이 특징입니다. 주체사상은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와 충성심을 강요하며 지속적인 인간개조사업을 통해 수령에 맹종하는 공산주의 인간을 만들죠. 그러니 다른 생각을 못합니다. 육체적으로는 ‘집단주의와 주민통제’에 길들여져서입니다. 전 주민을 집단주의사회 생활의 틀속에 묶어 철저한 주민통제를 실현합니다. ‘감시감독과 공포정치’도 북한체제를 유지하는 큰 틀입니다.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여서 의식주 문제를 배급제로 운영하니까 감시와 감독, 주민통제가 가능하죠. 그런 반면 공산당 고위간부에게는 풍요한 생활을 약속해줘 충성도가 엄청납니다. 조직화된 반체제 집단의 출현과 쿠데타 가능성이 희박한 이유입니다.”

-1950년 12월 고향인 평안북도를 떠나 홀로 남쪽으로 왔습니다. 통일은 개인적인 소망이자 전문가로서의 평생과업이기도 할 텐데요. 임 전 장관이 꿈꾸는 통일은 어떤 모습인지요.

“우리가 이뤄야 할 통일은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 시장경제로 번영발전하는 정의로운 복지국가, 그리고 적정한 자위력을 갖춘 평화애호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루는가죠.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뤄야 합니다. 점진적, 단계적으로 이뤄나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선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공존하며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 즉 남과 북이 서로 오가고 돕고 하는 ‘사실상의 통일’부터 실현해야 합니다. 이념과 이해관계를 떠나 진정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그런 통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임동원은 누구

1934년 평안북도 위원 출생. 한국전쟁이 나자 17세 때 단신으로 월남했다.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육사 교수요원으로 선발돼 서울대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육사에 창설된 비교사회과학과에서 공산주의 비판이론과 대공전략론을 강의했다. 67년 낸 첫번째 저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에서 이듬해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 청와대 기습미수사건을 예고해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가 10년 주기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60년대에는 반공이념·반게릴라전 이론을 연구·교육했고, 70년대에는 합동참모본부와 육군본부에서 군사전략통으로 자주국방(율곡계획)을 추진했다. 80년대 외교관을 거쳐 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했다. 김일성 주석의 급서 직전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 예행연습을 하기도 했다. 94년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아태평화재단에서 대북포용정책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다. 햇볕정책의 설계·전도사로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성사시켜 남북 화해협력의 물꼬를 텄다. 냉전기에 평화를 유지하는 ‘피스 키퍼’로 활약하다 전환기에 ‘피스 메이커’가 되었다. 2008년 회고록 <피스메이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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