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위에 다시 싹틔운 웃음꽃
봄바람이 살랑 불면서 북한의 포격 이후 연평도를 떠났던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인천 옹진군 연평리 마을에서 만난 최남식 할아버지(81)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누렁이’를 연방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버려두고 급히 섬을 떠났다가 석 달 만에 돌아와 보니, 어디로 가버리지도, 굶어 죽지도 않고 할아버지를 반겼다고 한다. 게다가 그간 앙증맞은 강아지 세 마리를 낳아 할아버지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있었다. 피란생활 동안 김포 양곡의 아파트에서 임시 거주했던 할아버지는 “아파트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어. 내 집이 제일 좋더라고. 돌아온 첫 날은 불안해 잠을 못 잤지. 이틀, 사흘째부터는 나아지더라고.”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연평도로 돌아온 지 일주일된 할아버지는 포격 이전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박병환군은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임시주택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흔적이 없어진 집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무섭지만 어떡하겠어요. 돌아왔으니 공부 열심히 해야죠.” 가족과 함께 김포에 머물다 지난 18일 섬으로 돌아온 박군은 또래보다 어른스러웠다. “임시주택이 좁고 불편하지만, 고향 연평도가 김포보다 나아요. 집이 빨리 복구됐으면 좋겠어요.”
쓸쓸하고 적막했던 섬은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피란생활의 고단함과 걱정이 어려 있던 얼굴은 객지에서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은 뒤, 하루하루 지나면서 점차 여유를 찾는 듯보였다. 집안의 묵었던 때를 벗겨내고 어질러져 있던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외벽과 담장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는 등 하루해가 짧다. 썰렁했던 학교운동장과 인적이 드물었던 골목에 끼리끼리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웃음이 흘러들었다. 바닷물이 빠지자 할머니들은 유모차를 밀고 갯가로 나가 굴을 땄다. 지난 겨울동안 손을 타지 않은 터라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 소쿠리를 묵직하게 채웠다. 항구에는 어민들이 배를 점검하고 통발과 부표 등을 손보며 봄 꽃게잡이 준비에 분주하다.
보수공사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인부들이 동원돼 무너진 담을 다시 쌓고 깨지고 뒤틀린 창을 새로 갈아 끼우고, 겨우내 얼었던 보일러와 수도관 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마을을 채우던 망치소리가 잦아들자, 연통에 연기를 피워 올린 집마다 저녁을 준비하는 칼질 소리가 완연한 봄 공기에 떠다녔다. 식당, 민박집 등이 하나둘 다시 문을 열고 본격적인 손님맞이를 준비 중이다. 집과 골목에 오랜만에 켜진 등이 연평도의 밤을 환하게 밝혔다.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빠르게 일상을 회복하고 있지만, 불타고 찢겨 폐허로 남은 포격 현장과 그 흔적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주민들이 겪었던 공포와 아픔 또한 일상 속에서 때때로 출몰할 것이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을 건너온 연평도. 포격의 상처를 안은 채 주민들은 다시 예년의 풍성하고 희망찬 봄을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