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진정한 승부

“누가 뭐래도 숙부님은 오직 백성을 위하는 분입니다. 불가피하게 그 앞길을 막는 자들을 처단하려 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 불가피함을 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느니라. 그건 힘으로 의를 짓밟는 자들의 변명이다. 만일 네가 큰일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작고 힘없는 자라면 어떻겠느냐.”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변호하자 정몽주가 답하는 장면이다. 불가피한 일을 감행하지 않고는 현실의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 이방원은 결국 ‘큰일’을 위해 스승 정몽주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훗날 정도전마저 제거해 버리고 왕위에 오른다.

부친을 거역하고 스승과 친지들을 가차 없이 죽인 승부사 이방원. 드라마의 서두는 그가 스스로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정변, 숙청을 감행하는 괴물이 된 것이 결국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음을 인상적으로 예고했다. 하지만 최근 발간된 평전 <태종처럼 승부하라>는 그에게 창업의 공뿐 아니라 수성의 공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폭력을 서슴지 않던 권력의 화신이 유가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론정치가로 변신해 가는 여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정치권력의 전장에서 선한 의도만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작은 옳음을 불가피하게 묵살하면서 큰일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때로 무의미하다. 더 중요한 것은 승부의 과정을 거친 뒤의 행보이다.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 다시 목적이 돼버리는 고리를 끊어내고, 정적의 장점까지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 노련함을 갖추어야 진정한 승부사라 할 수 있다.

정책과 비전은 찾기 어렵고 철퇴로 내리치는 것보다 더 잔인한 폭력의 언어들이 난무하는 정치판을 바라보며 많은 이들이 기대를 접고 있다. 태종은 개국에 반대한 고려 유신의 절의를 기리고 정몽주에게 벼슬을 추증했으며, 정도전이 입안한 정책을 전폭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이것으로 모든 과정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가로서 그는 분명 성공했다. 오늘 우리의 정치 역시, 승부가 갈린 뒤에 시작될 진정한 승부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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