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별량면 송산초, 별량초·중
학교 존폐 위기 속에서 의기투합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수업 시도
학년 합친 ‘무학년제 프로젝트’
교실 밖으로 확장한 자율 학습시간
주민에게 배우는 특별활동 통해
아이들은 사회성과 독립성 키우고
학교·마을은 공생 관계로 거듭 나
붉은 벽돌로 지은 버스정류장에는 흔한 전자안내판도 달려 있지 않았다. 학교를 가리키는 푯말과 노랑 신호등만 서 있는 길은 고요했다. 닭이 우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렸다. 지난달 8일 오전 8시, 전남 순천 시내에서 20㎞가량 떨어진 별량면 구기마을 송산초등학교로 스쿨버스가 간격을 두고 들어오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스쿨버스가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오는 동안 길게는 1시간을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리니 매일 아침 등굣길 마중을 나오는 교장·교감 선생님이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이마에 상처 다 지워졌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은 물론 흉터까지 알아본다.
송산초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곳이다. 송산초가 있는 순천시 별량면의 인구는 5500여명. 10년 사이에 2000명이 줄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신생아는 9명에 불과하다. 인구감소의 직격탄을 맞은 송산초는 개교 60년을 맞았던 2000년 별량초등학교 송산분교로 편입됐다. 2000년 49명이었던 학생은 2007년 11명으로 줄었다.
위기는 기회가 됐다. 학생이 줄어들자 학교는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의 수업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학생 수 감소는 학생들이 익명성을 넘어 공동체를 복원하고 마을과 만날 수 있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별량면의 세 학교(송산초, 별량초, 별량중)는 함께 노력했다. 학년을 합치고, 마을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접촉을 늘려갔다. 도시의 큰 학교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이 하나둘 작은 학교로 모여들었다. 송산초는 분교가 된 지 11년 만인 2011년 3월 다시 ‘초등학교’ 명패를 달았다.
수업의 방식·학년의 경계·교사의 자격을 허물었다···아이들이 강해졌다
별량면의 세 학교가 걸어온 길은 조만간 전국의 학교들이 경험할 미래다. 2022년 기준 한국 초등학교의 학급당 학생 수는 22.7명인데, 교육부는 5년 뒤인 2027년에는 15.9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한다. 그나마 일부 신도시 지역 과밀학급을 포함한 평균이고, 초등학생 학령인구가 2027년 이후 계속 줄어 2033년 최저점에 도달할 것을 고려하면 일반적인 학교의 크기는 더욱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저출생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는 우리 교육이 맞은 위기이기도 하면서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고 수업을 혁신할 기회이다. 학생 수 감소를 기회로 바꿔 생기를 지켜낸 세 학교의 실험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5학년은 요즘 PPT 때문에 힘들어요. 척추측만증 걸리기 직전이에요. 어젯밤에 PPT 악몽을 꾸느라 잘 못 자서 누워서 좀 잘래요.” 등교하자마자 운동장 구석 나무 그늘 밑 해먹에 드러누운 송산초 5학년 최한율군(11)은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한율이와 5학년 친구 20명은 열흘 뒤 휴대전화 없이 직접 만든 PPT 계획서만 들고 서울 여행을 떠난다. 작은 학교 아이들의 현장체험학습은 수백 명이 놀이공원이나 명승지에 한꺼번에 집합했다가 흩어지는 큰 학교의 체험학습과 다르다. 송산초 학생들은 매년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지리산 종주’ 등 ‘도전활동’ 미션을 받는다. 매년 반이 바뀌는 큰 학교와 달리 작은 학교 아이들은 몇 년을 치댄 친구들과 부딪혀가며 성장한다. 아이들은 불을 피우거나 텐트를 치는 법, 대중교통으로만 여행하는 법 등 어렵지만 친구들과 협동하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을 받는다.
이날 오후 수업 시간, 아이들은 교실에 네다섯 명씩 모여 앉아 각자 노트북을 꺼내 놓고 서울 여행을 준비했다. 담임선생님은 여행 준비 일정을 설명한 뒤 아이들이 자유롭게 모둠 활동을 진행하는 동안 돌아다니면서 예산, 교통 등 계획 짜는 일을 도왔다. 서울 지하철 혜화역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유명한 중국음식점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인터넷 지도의 길 안내 사진을 일일이 찍는 친구도, 여행경비를 계산하는 친구도 있었다. 한율이는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우리가 돈이 제일 적게 들어”라면서 신이 났다.
바로 옆 6학년 교실에서는 도전 활동으로 지리산 등반을 떠나는 6학년 친구들이 발표하고 있었다. 끈을 쉽게 묶을 수 있는 등산화의 종류, 땀이 났다가 식으면 감기에 걸리니 바람막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환경보호구역이라 비누나 세제는 물론 치약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이 발표에 들어갔다. 지리산에는 학부모들도 함께 간다. 소금으로 양치를 해야 한다는 게 생소한 엄마, 등산용 신발을 고민하는 아빠 등 학부모 7명도 이날 수업에 함께했다.
이날 5~6학년이 도전 활동을 준비한 프로젝트 수업 시간은 80분, 쉬는 시간은 30분이었다. 일반적인 초등학교 수업시간(40분)보다 길다. 저학년은 40분 수업시간-10분 쉬는시간 체제를 따르는데 5~6학년은 교과 수업을 포함한 대부분의 수업을 프로젝트형으로 통합해 진행한다. 김태요 송산초 교사는 “긴 시간 동안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작은 학교는 일반적인 시스템을 벗어나 혁신적이고 새로운 수업을 시도해보기 유리하다. 송산초와 이웃한 별량중학교에서는 매주 화요일 6~7교시가 되면 아이들이 자기 선택으로 수업시간을 채운다. 운동장이나 도서실, 학교 밖으로 흩어져 일본어를 공부하거나 기타를 치거나 텃밭을 가꾼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둘러보며 필요한 부분을 도와주고 상태를 점검할 뿐이다. 박래훈 별량중 교사는 “학교가 짜놓은 교육과정 틀 안에서의 자기 주도성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선생님들이 군데군데 숨어 계시거든요. 큰 학교라면 관리하기 힘들다면서 실현이 쉽지 않다고 했을 것 같아요.”
학년의 벽 허물고 함께 어울리는 작은 학교 아이들
10명 정도 되는 학년 2~3개가 모이면 큰 학교의 한 학급이 된다. 여러 학년이 나이와 상관없이 한데 어울려 지내며 작은 학교의 단점으로 꼽히는 사회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송산초는 3~6학년의 각종 프로젝트 수업과 자치활동 등을 ‘무학년제’로 운영한다. 지난해는 3학년과 4학년이 ‘순천탐험대’를 결성해 사회 수업 8시간 동안 직접 용돈을 들고 길을 찾으며 도시를 탐방했다. 5학년과 6학년은 ‘여순 10.19 사건’에 대한 연극을 함께 만들어 올리고, 그림책을 제작했다. 무학년제 활동을 하면 교사의 부담도 줄어든다. 직전 해에 먼저 프로젝트를 경험해 본 상급생이 다음 해에 동생들을 이끌어줄 수도 있다.
학년의 경계를 허물면서 아이들은 의지할 곳이 더 많이 생겼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송산초에 전학 온 정이안양(10)은 이 학교에 온 뒤로 엄마에게 속상한 일을 덜 늘어놓는다. 전에 다닌 학교에서는 친구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운동회도 안 갈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보듬어주는 언니, 동생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이안이 엄마의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과 동생들, 언니·오빠, 형·누나들과 긴 시간 동안 헤어지지 않고 함께 지낸다는 것은 장점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아이들은 편안하고 안정된다. 지난달 9일 별량초 2학년 교실의 2교시, 아이들은 각자 장래 희망을 소개했다. 본인의 꿈이 회사원이라고 하는 민우에게 친구들이 “저번에는 어부가 꿈이었는데 바뀌었네”라고 말했다. 한 반에 10명뿐인 별량초 아이들은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 다 안다.
교사가 아이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이루리 별량초 교사는 “(작은 학교는)개별화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했다. “개개인의 수준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개별화된 지도를 할 수가 있어요. 물론 20명 넘는 학급에서도 개별화 지도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알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지나가야 할 때도 있거든요. 여기는 그럴 수가 없어요. 너무 뻔히 눈에 보이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아이들은 장애 유무와도 상관없이 편하게 어울린다. 6학년 학생 중에는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친구가 있다. 낯선 곳에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지만, 각기둥에 대해 배운 이날 수학시간에는 빈칸을 채워보라는 교사의 질문에 “밑면” “사각형”이라고 힘있게 대답했다. 이루리 교사는 “1학년 때부터 학급 친구들과 쭉 같은 반에서 지냈기 때문에 라포(유대감)가 형성돼 친구들과 있으면 편하게 말을 한다”고 말했다.
“애들 소리 들리니 살맛이 나” 마을과 함께 자라나요
점심시간, 급식실에서 밥을 받아다가 운동장 나무 그늘에서 왁자지껄 식사한 송산초 5학년 친구들이 “강아지 보러 가자”며 마을 산책을 하러 나갔다. 아이들이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춰서서 마당의 개들을 들여다보자 집주인이 익숙한 듯 문을 열어줬다. 송산초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목공부 마을선생님 정순조씨(51) 이른바 ‘목공쌤’이다. 운동장 한편의 나무집은 목공쌤과 아이들이 직접 지었다. 송산초에는 부서별로 ‘마을 선생님’이 있다. 마을 주민들이 농사짓기, 요리, 동물 기르기 등 교과 외 활동을 가르친다. 별량초와 별량중에도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 최성환 별량초 교장은 “지역에 정착하는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지역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이 교육주체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세 학교는 매년 6월 별량면에 필요한 것을 고민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별량정책마당’을 연다. 별량정책마당은 세 학교 학생들과 주민들이 교류하는 장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과 중학생들이 마을 주민회장 등과 만나 마을에 필요한 것을 고민하는 과정이 곧 배움이 된다. 재작년에는 약국이 하나뿐인 별량면에 약을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제안했다. 작년에는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그린 달력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학교와 마을의 매개가 된다. 학교에는 아이들을 가르칠 마을 선생님이 필요하고, 마을의 성장에는 아이들의 아이디어를 발전 시켜 줄 학교가 필요하다. 작은 학교와 작은 마을이 공생하는 방식이다. 마을 선생님은 새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작은 학교의 업무부담을 덜어준다. 또 학교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주기도 한다.
아이들이 유입되면서 마을 공동체가 살아났다. 학생들이 재잘대는 소리는 늙어가는 시골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주민들은 아이들의 소리에서 지역을 지킬 힘을 얻는다. 아이들은 주변 슈퍼와 버스 노선 같은 편의시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별량중 근처 슈퍼 주인 A씨는 “아이들이 신고 달리는 신발에서 먼지바람이 날리던 20년 전이 그립지만 삭막함을 학교로 달랜다”고 말했다. 송산초 앞 마을회관에서 만난 신연남씨(84)는 “애들 소리 들리면 너무 좋고 살맛이 난다”고 했다. “한 번씩 운동회 같은 거 해서 모이기도 하고 동네 산에 견학도 가고. 우리는 진짜 고마워. 아이들이 보배야 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