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날 기다렸구나’…장욱진의 ‘가족’, 60년 만에 다시 빛을 본 사연

2023.09.26 08:30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다락방 벽장서 발견돼 반환·전시되기까지…

1955년 작 ‘가족’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가족’(1955)의 발견 당시 사진 | 배원정 제공

‘가족’(1955)의 발견 당시 사진 | 배원정 제공

[주간경향] 수풀이 무성해 낫으로 길을 만들며 들어간 오래된 아틀리에. 전기가 끊어진 어두컴컴한 2층 다락방에 먼지가 수북했다. 일본 미술품 운송회사 운반사들이 작품을 찾는 동안, 내 마음도 분주해졌다. ‘분명 100호짜리 큰 그림 뒤에 장욱진의 작은 그림이 포개져 있을 거야’, ‘다락방 모서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놓여 있을 거야’ 등의 상상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중 다락방 한쪽에 있는 낡은 벽장에 눈길이 갔다. 문도 제대로 열리지 않는 낡은 벽장이었다. 벽장문을 겨우 반만 열고, 몸을 비집고 들어가 휴대전화 조명등을 켰다.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물건들 사이로 저 안쪽 깊숙이 비스듬히 꽂혀 있는 작은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설마 하며 손에 잡힌 그 액자를 벽장 밖으로 꺼냈다.

‘아, 작품이 나를 기다렸구나’

어둠 속에서 끄집어낸 그 작은 액자는 그토록 찾던 장욱진의 ‘가족’이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림 한가운데에 1955년이란 작품의 제작연도와 함께 장욱진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60년 동안 이야기로만 전해져온 그림이 세상과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림이 손에 잡히자마자 든 생각은 ‘아, 작품이 나를 기다렸구나’였다. 작품마다 운명이란 게 있다. 몇 년 전 신안 해저 유물이 발견돼 수출(水出)되던 과정 역시 우연의 산물 아니었던가. 장욱진 최초의 가족도(家族圖)가 나와 인연이 되면 발견되는 것이고, 아니면 아무리 찾으려 노력해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설사 찾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말자며 마음을 다독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시오자와 사다오(?澤定雄·1911~2003)의 아틀리에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에 이끌리듯 작품을 찾았다. 마치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10분 만의 발견이었으니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했다.

60년 만에 낡은 아틀리에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욱진의 1955년 작 ‘가족’  | 배원정 제공

60년 만에 낡은 아틀리에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욱진의 1955년 작 ‘가족’ | 배원정 제공

떨리는 손으로 작품의 상태를 확인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장욱진의 1972년 ‘가족도’가 이 작품이 그리워 다시 제작한 작품이란 설명이 납득될 정도로 크기와 구성이 매우 유사했다. 1950년대 장욱진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특징인 어두운 채도가 1970년대에 이르러 좀더 밝은 색감으로 변화된 정도였다. 장녀 장경수의 증언대로 나무 표현에 두터운 마티에르가 인상적이었는데, 오랜 기간 벽장 속에 있었던 탓인지 유화 물감층이 조금 박락되고 액자 틀에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하지만 이 액자 틀을 월북 조각가 박승구가 조각했다는 증언을 생각하니, 틀 위에 새겨진 십장생 등의 표현이 달리 보였다. 그림뿐 아니라 액자의 가치 또한 상당히 높아 왜 그토록 장욱진이 이 작품에 애착을 느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현장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장가였던 시오자와 슌이치(?澤俊一) 선생은 정원에서 무성한 나무와 풀을 베다 갑자기 부친의 아틀리에 쪽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리자 징그러운 벌레가 나와서 지른 소리라 생각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시오자와 선생의 부인은 처음엔 침착하게 작품을 살피던 내가 미술품 운송회사 직원에게 작품을 건네며 표정의 변화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자 내 손을 잡고 “당신이 이 작품을 찾았다”는 말과 함께 “축하한다”는 말을 연거푸 건넸다. 동행해주었던 하성환 일본대사관 한국문화원 전시팀장은 이를 지켜보며 “원정이가 원정을 와서 한 건 했네!”라며 놀려댔다.

다카키 세이우 선생과 배원정 학예연구사(오른쪽) | 배원정 제공

다카키 세이우 선생과 배원정 학예연구사(오른쪽) | 배원정 제공

소장가에게 작품의 대여 절차와 수복의 필요성을 설명한 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상황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후 그간 도움을 준 다카키 세이우(古木聖雨)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러 도쿄로 향했다. 도쿄행 신칸센을 타기 위해 열차표를 구매하는데 그제야 크게 내색하지 않았던 억눌렀던 감정이 복받쳐 올라 ‘엉엉’ 울고 말았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떠올라 그야말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화가가 무척이나 아껴 항상 머리맡에 걸어 두었다는 1955년 작 장욱진의 ‘가족’. 이 작품은 사연이 참 많다. 공주사대 교수를 역임한 제자 이남규가 명륜동 집에 걸려 있던 이 작품에 반해 양복 안에 몰래 감추었다가 “아직 정도 안 떨어졌는데 가져가다니”란 장욱진의 소리를 듣고 다시 돌려주었다는 일화도 전한다(이남규, ‘새처럼 살다가 새처럼 떠나신 선생님’, <장욱진 이야기>(서울: 김영사, 1991), p.104.).

이 그림은 1964년 반도화랑에서 개최된 장욱진의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됐다. 그가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 작품이기도 하다. 그림을 사 간 사람은 일본인. 당시 한·일경제협력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시오자와 사다오라는 그림 애호가였다. 장욱진은 무척 아끼던 작품이라 팔 생각이 없었지만, 반도호텔에 머물며 그림을 사고 싶다고 두 번, 세 번 찾아오는 사다오의 정성에 감동해 전시 마지막 날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당시는 그림을 사고파는 게 흔치 않던 시절이라 이순경 여사는 시오자와 사다오 씨의 명함을 받아 두었다. 장욱진은 전시회가 끝날 무렵 찾아온 조각가 최종태와 함께 그림값의 얼마를 헐어 술을 사 마시고, 나머지는 남겨 막내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가족’, 1955, 캔버스에 유화 물감, 6.8×18㎝(액자크기: 4.5×17.8×29㎝) |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1955, 캔버스에 유화 물감, 6.8×18㎝(액자크기: 4.5×17.8×29㎝) | 국립현대미술관

‘가족도’(1972, 캔버스에 유화 물감, 7.5×14.8㎝)  |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가족도’(1972, 캔버스에 유화 물감, 7.5×14.8㎝) |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마을’(1957, 캔버스에 유화 물감, 44.3×26.4㎝) | 리움미술관

‘마을’(1957, 캔버스에 유화 물감, 44.3×26.4㎝) | 리움미술관

장욱진의 대표작으로 꼽다

시간이 흘러 장욱진은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그의 작고 1주기를 맞아 전시회를 기획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가족’이 함께 전시되기를 바랐다. 이순경 여사는 “조그마한 가족도(家族圖)였는데 두고두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이순경, ‘장욱진 그림마을’ 2009년 겨울호. 이 글에서는 장정순 외 엮음의 <진진묘>(파주: 태학사, 2019) p.37 참조).

화가의 큰딸 장경수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그린 가족도 그림 속 나무의 질감이 우둘투둘해 아버지에게 만져봐도 되는지 여쭙고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본 기억이 난다”라며, 일본에 건너간 ‘가족’을 장욱진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정영목, <장욱진 카탈로그 레조네>(서울: 학고재, 2001), p.142.).

생전 장욱진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며 장욱진 평전을 집필하기도 한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가나문화재단 이사장)는 1991년 여름, 이 그림의 행방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장욱진 유족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사 간 사다오 씨가 당시 82세로 병석에 누워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당시 고베 대학병원 의대 교수였던 아들 슌이치 선생과 전화 연결이 됐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했다는 사실만 확인해줄 뿐 그 외는 어떠한 것도 밝히지 않았다. 김형국 교수는 당시 그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데도 확인해 주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일본에서는 개인의 그림 수장을 잘 밝히지 않는 풍조가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연전에 부산의 골동품 수집상이 일본 수장가의 한국 골동품을 훔쳐 가지고 돌아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김형국, <그 사람 장욱진>(서울: 김영사, 1993), pp.236-237.).

구전(口傳)으로만 전해 오던 그림

다시 3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림을 구입한 소장가도, 장욱진의 아내 이순경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1964년 당시 반도화랑의 브로슈어에는 제목과 연대만 표기되고, 크기는 ‘소품’으로만 기재돼 있다. 따라서 그림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었기에 ‘가족’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관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비슷한 형태와 구도, 크기를 가진 1972년 ‘가족도’(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가 당시 일본인에게 판매된 그 그림이 못내 아쉬워 장욱진이 다시 그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자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장욱진의 ‘가족’은 이처럼 지난 60년 동안, 누구도 본 적 없고, 오직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 몇몇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다.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구전(口傳)으로만 전해 오던 그림이었던 셈이다.

‘마을’(장욱진 작, 윤상수집화전에서) | 경향신문, 1956. 7. 28 4면

‘마을’(장욱진 작, 윤상수집화전에서) | 경향신문, 1956. 7. 28 4면

어쩌면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장욱진 회고전이 마지막 기회일지 몰랐다. 다시 한 번 ‘가족’을 찾아보기로 한 배경이다.

먼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시오자와 사다오 씨의 정보와 아들 시오자와 슌이치의 근무처를 파악했다. 김형국 교수의 회고를 참고해 바로 서신(書信)을 보내기보다는 일본 내 권위 있는 예술원 회원인 다카키 세이우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세이우 선생은 슌이치 선생에게 직접 붓글씨로 쓴 편지를 보내 한·일 민간문화교류 차원에서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장욱진 회고전에 ‘가족’을 출품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의 편지. 그래도 답은 없었다. 4개월간 계속 서신을 보내며 간청하자, 결국 마음의 문을 연 슌이치 선생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절망스럽게도 대답은 3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가족’을 찾아봤지만 집에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틀리에에도 그런 그림이 없다는 내용의 답변이었다. 정말 없는 걸까? 혹시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줘 버린 건 아닐까?

그간 들인 노력이 아깝긴 했지만, 이쯤 되자 ‘가족’ 찾기를 포기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가족’에 대한 장욱진과 그의 제자, 가족들의 애정 그리고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를 생각하니 그만둘 수 없었다. 설사 작품을 찾을 수 없더라도 이순경 여사가 받아 든 명함 속 인물의 후손과 연락이 됐으니 그를 찾아가 그림의 흔적을 좇고, 그래도 찾을 수 없다면 없는 대로 그 역시 장욱진 연구에 중요한 성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훗날 작품이 발견됐을 때 어느 일본의 미술품 경매 사이트에서 “몇 년 전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찾던 바로 그 작품”이라고 쓴 문구를 보고 싶지 않았다. 슌이치 선생에게 작품의 현존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설득하고, 직접 부친의 아틀리에에서 장욱진의 ‘가족’을 찾아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자 그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의 신분을 일본 외무성(外務省·한국의 외교부)이 보장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흉흉한 사건이 많은 시절이니 이해가 갔지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가족 시리즈 여러 점 연작한 장욱진

박종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직무대리는 즉시 주일본 대한민국대사관 한국문화원(원장 공형식)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뒤에 날아간 일본에서 드디어 시오자와 사다오의 아들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인자한 인상으로 반갑게 맞는 슌이치 부부와 인사하며 혹시라도 장욱진의 그림이 거실 응접실에 걸려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들은 정말 작품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설사 작품을 찾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다음 날 아침 타카츠키시(高槻市)로 향했다. 슌이치 부부는 일본 미술품 운송회사 직원들과 함께 방문한 우리 일행을 아버지의 아틀리에로 안내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던 빈집의 아틀리에 낡은 벽장 안에서 장욱진 최초의 가족도를 결국 찾아낸 것이다.

장욱진은 평생에 걸쳐 가족 시리즈를 여러 점 연작했다. 지금까지 ‘가족’이라 명명되던 1954년 작 ‘가족’은 1960년대에는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불렸던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따라서 1955년 작인 이 작품이 사실상 장욱진 최초의 ‘가족’이다. 화면 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집 안에 4명의 가족이 앞을 바라보고 있다. 집 좌우로 나무가, 주변으로 2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대상을 군더더기 없이 짜임새 있게 배치한 ‘가족’은 장욱진의 조형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무엇보다 그의 가족도 가운데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도상이 아닌, 아버지와 아이들만 함께 그려진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전쟁 직후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평생 가족의 이미지를 그린 장욱진 가족도의 전범(典範)이 되는 그림이자, 최초의 정식 가족도라는 측면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 장욱진 화백의 가족사진(1964, 개인 소장)

고 장욱진 화백의 가족사진(1964, 개인 소장)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날 밤, 무언가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침 일찍 도쿄에서 다시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향했다. 두 번째 찾아간 슌이치 부부에게 이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두 시간 반 동안 슌이치 선생의 마음은 5~6번 바뀌었고, 긴 설명과 설득 끝에 결국 소장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가족’의 발견 소식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국립현대미술관의 각 부서 담당자들은 작품의 대여와 수복, 수집 절차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연재 소장품자료관리과 학예연구사는 소장가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작품의 수집 절차를 꼼꼼히, 그러나 신속하게 진행했고, 박수경 작품보존미술은행관리과 학예연구사와 이길재 호송관 현대미술1과 주무관은 이 작품이 한국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작품의 컨디션 체크와 운송을 꼼꼼히 챙겼다. 들고 간 구매 계약서에 시오자와 슌이치 선생의 서명도 받아왔다. 약 6개월의 노력 끝에 여러 사람의 정성으로 이 작품은 마침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장욱진의 1955년 작 ‘가족’이 범대건 학예연구사와 조인애 연구원의 응급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드라마틱한 여정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장욱진의 ‘가족’을 직접 감상하고 그 감동을 함께 느껴보길 권한다.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전시 도록에 실린 내용을 필자가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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