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후원자로 유명한 이는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죠.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본>을 쓸 때 재정 지원을 한 이가 또 있습니다. 어머니쪽 친척 리온 필립스입니다. 필립스는 네덜란드에 담배 공장과 커피 유통 회사를 세웠죠. 손자도 회사를 만듭니다. 세계 최대 전구 회사인 ‘필립스’입니다.
네 번째 ‘책건문’ <자연의 악>(알렉산드르 옛킨트 지음·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그 커피와 담배의 작은 일부는 <자본>이라는 텍스트로 전환되었던 것”이라고 썼습니다.
존 드울프라는 미국인 함장은 19세기 초 니콜라이 레자노프라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탐험대 사령관이자 차르의 대리인에게 담배와 럼주를 실은, 대포 8문이 장착된 선박을 팝니다. 레자노프는 회사 약속어음과 해달 가죽 572개로 대금을 치렀습니다. ‘유명인’ 한 명이 또 나옵니다. 드울프의 조카가 <모비 딕>을 쓴 허먼 멜빌입니다. 드울프는 조카에게서 고래, 여행, 결단력에 관해 배웠다고 하네요.
‘모피를 거래했다’에 담긴 잔혹한 역사
그저 유명인 관련 일화로 여길 일은 아닙니다. 역사책이나 경제학책에서 흔히 보는 ‘모피를 거래했다’는 짧은 서술엔 잔혹한 역사가 담겼습니다.
해달 7만3000마리, 비버 3만 마리, 흑담비 3만 마리에다 100만 마리가 넘는 여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물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19세기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잡아 죽인 동물 숫자입니다.
동물들은 화폐였죠. 해달 가죽으로 배를 사고판 데서 어느 정도 가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아메리카는 아메리카산 제품은 알래스카 모피와, 모피는 중국산 차와 교환했습니다. 차는 러시아제국과 아메리카에서 팔렸죠.
저자는 러시아-아메리카가 “국가와 민간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하는 또 하나의 자원 지향적 팽창 기관”이라고 말합니다. ‘자원 지향 팽창’의 대가는 생명입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탐험선 소속 의사 게오르크 랑스도르프는 “러시아인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살해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잠재적 부의 원천을 영구히 파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썼습니다.
17~19세기 사람을 포함한 ‘움직이는 것’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19세기 중엽 선교사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는 1766년 이반 솔로비예프와 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킨 알류트족의 절반 이상인 약 3000명을 살해했다고 폭로하기도 했죠.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모피를 의복과 주거용 단열재로만 사용했습니다.
주크치·캄차달·코랴크족 등 많은 부족이 ‘모피 무역’에 저항합니다. 러시아인들은 공개적 태형에서부터 대량학살에 이르기까지 잔혹한 방법으로 보복합니다. 지역 주민들에게서 가죽을 빼앗는 일반적 방법은 인질극 ‘아마나트(amanat)’입니다. 정복자들은 남성들이 야삭(공물)을 낼 때까지 여성과 어린이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인질극과 학살로 획득한 원자재들
1788년 코사크인들은 알류트족 어린이 500명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계몽주의자’인 예카테리나 2세 등 러시아 통치자들은 이 방법을 승인합니다. 시베리아 역사가 니콜라이 야드린체프는 1882년 현존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시베리아 민족 수를 헤아렸다. 캄차달족은 인구의 90%, 보굴족은 인구의 50%를 잃었습니다.
20세기 초에도 시베리아의 모피 무역이 이뤄졌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의 유명인이 등장하죠. 젊은 레온 트로츠키입니다. 시베리아 망명기인 1900~1902년까지 퉁구스족과 보드카·면직물을 모피와 교환하던 상인 야코프 체르니흐(Yakov Chemykli) 밑에서 일했죠. 수천 명의 노동자를 거느렸는데, 트로츠키는 “그는 절대 독재자였다”고 썼습니다.
볼셰비키도 모피 무역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예이턴곤 가문의 구성원들은 소련의 대미 모피 수출을 쥐락펴락했는데, 그 일원 레오니드는 소련 비밀경찰 NKVD에 소속된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트로츠키 암살을 조직한 인물이죠.
책엔 자연과 사람에 대한 착취와 수탈, 폭력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저자는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발트해 연안 지역이 유럽의 ‘내부 아메리카’라고 지적한 점을 인용합니다. 지주들은 농민으로 하여금 여름에는 밭에서 일하고 겨울에는 나무를 베도록 강요했습니다. 노동을 강제하려 잔혹한 무력을 동원했습니다. 외국 선박들이 목재를 운송했습니다. 무역 수익의 대부분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인들 호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야망, 변덕, 실수, 탐욕에 얽힌 원자재
책 주인공은 “인간이 지표면이나 땅속 깊은 곳에서 추출하는 모든 것”인 금속, 농산물, 육류, 에너지, 곡물 같은 원자재(raw materials)입니다. “우연한 발견, 장거리 여행, 성공적 모험, 또는 그렇지 않으면 재난과 관련된 물질”입니다.
저자는 각 국가와 원자재들이 맺은 ‘특별한 관계’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원자재는 “통치자의 야망, 자연의 변덕, 과학자의 실수, 관리자의 탐욕”과 “광산·유전·시추공과 밀월 관계를 맺는 군주들”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저자는 각국의 “지배적인 주요 산물이 어떻게 문화적 상상력을 좌지우지하고 그것의 상징과 물신화 대상에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 왕국의 제2의 몸을 형성하는지 증명”하려 한다.
문화? 흑담비 가죽으로 테를 두른 모노마흐 모자가 러시아 차르의 최고 권력 상징물이었다는 게 작은 사례입니다. ‘커피하우스’도 문화적 사례입니다.
저자 문제의식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원자재는 ‘설탕’입니다. 설탕과 소금의 차이로 풀어갑니다.
중독성 상품은 설탕과 설탕으로 생산하는 알코올뿐 아니라 향신료·담배·커피·초콜릿·아편 등입니다. 저자는 설탕에서 아편에 이르는 소모품을 ‘소프트 드러그(soft drugs)’로 규정한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의 견해도 따릅니다.
‘중독성 상품’이자 ‘소프트 드러그’인 설탕의 잔혹사
18~19세기 중독성 물질이 국제 무역에서 가장 큰 상품 집단을 구성합니다. 저자는 “세상의 부는 설탕 같은 중독성 상품에 의존했다”고 말합니다. “설탕·담배·차·코코아·커피 수익은 노예무역, 식민지 합병, 전쟁 참여를 자극했다”고도 했습니다.
잉글랜드로 돌아간 서인도제도 농장주들은 런던 타운하우스나 시골 영지를 사들입니다. 이들의 자녀는 해로나 이튼 같은 학교로 갔죠. 커서는 귀족 집안과 혼인했습니다. 의원·장관·시장이 됩니다.
중독성 상품들은 농촌 가계도 바꿉니다. 저자는 역사가 에릭 홉스봄을 인용하며 설탕이나 담배, 커피, 차 같은 중독성 상품들이 농촌 가계를 전(前)산업 자본주의라는 고속도로로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유사 중독적 의존성을 유발하는 이 상품들은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 이상을 벌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 상품들의 가격이 저렴해질수록 그것들이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커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중독성 상품은 전체 영국 수입품 가운데 4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이 무역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 지출금을 시장, 은행 및 주식의 금융적 확장에 쏟아부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세계의 가난하고 먼 지역에서 이루어진 수탈과 고통은 북대서양의 부유한 나라들에 ‘소비’를, 즉 쾌락과 질병을 안겨주었다.”
“이게 당신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는 데 따른 대가”
이 문제의식을 부각하려 여러 문학과 문헌도 인용합니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 한 사례입니다.
이 대목에서 볼테르가 인종차별 발언을 했고, 카리브해 설탕 농장에 간접적 투자를 한 점도 아울러 봐야 할듯합니다.
저자는 프랑스혁명에 참여한 혁명가들은 커피하우스에서 흑인 노예 노동으로 생산한, 설탕 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인권을 이야기한 사례도 적었습니다.
책은 역사책이면서 경제학책입니다. 저자는 경제 이론들을 접목해 원자재 특성을 살핍니다.
예를 들어 은은 “지구의 특정 지점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을 투입해 부를 창출하는 국지형 자원”이고, 곡물은 “상당한 토지와 막대한 노동 투자를 요구하는 확산형 자원”입니다. 공간·노동 집약도 차이는 크지만, 화폐 단위로 계산하면 총액은 같을 수 있죠. 그러나!
철과 나무, 경제를 엮어냅니다. 광산 옆 제련 용광로에 쓸 숯을 마련하려고 5〜8㎞ 사이 숲을 몽땅 벌목하죠. 나무가 떨어지면 채굴할 광석이 남았더라도 광산은 문을 닫아야 했죠. “아이러니하게도 철기시대의 경제 지형을 좌우한 것은 광석이 아니라 목재였다.”
목재의 경제학과 투자·소비·파괴·부활·증식 되풀이하는 자본주의
유럽 강대국들은 원자재 생산지에 공장이나 조선소를 만듭니다. 피식민지 국가 사람들을 위한 건 당연히 아니었죠.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 역사를 ‘상품들의 도움으로 상품들이 생산되는 선형적 과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계 경제 조직이 다른 많은 상품을 희생시키면서 단 하나의 상품에 집중하고 그런 다음 뜻하지 않은 또 다른 주도적 상품의 선택이 뒤따르고 또 하나의 혁명적 전환이 이어진, 세계를 뒤흔드는 일련의 선택들”로 보죠.
마르크스는 필립스 이야기에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저자는 “투자하고 소비하고 파괴하고 부활하고 다시 증식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공식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다고 말하며 인용합니다. “자본가는 …… 살아 있는 노동을 …… 죽은 물질과 결합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가치(물질화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으로, 즉 ‘가치를 품은 큰 가치(value big with value)’로, 마치 몸에 사랑을 품고 있는 것처럼 ‘일’하기 시작하는 살아 있는 괴물로 전환시킨다.”
마르크스가 식민지 약탈을 통한 유럽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설명하면서 한 “국가 경제의 부드러운 연대기에서 목가적 지배는 태곳적부터 존재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국 부의 원천은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숨겨져 있다. 그 원천은 노예나 원주민이 채취해 유럽에서 독점 가격에 판매되는 은과 모피, 설탕, 아편 따위의 원자재다.”
저자는 과거 원자재 수탈과 공유지의 비극, 자본주의 폐해 문제를 지금 여기로 이어냅니다. 스마트폰만 해도 100개가 넘는 서로 다른 합금과 플라스틱을 포함합니다. 스마트폰도 인간·동물의 육체적 노력, 석탄이나 천연가스 연소를 거쳐 얻는 에너지가 필요하죠. 저자는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소도 고가의 희귀 금속을 비롯한 여러 재료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우주선에 올라탄 카우보이와 기생 국가
저자는 기후위기의 세계에서 기후재앙을 경고합니다. ‘카우보이 경제’와 ‘우주선 경제’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자는 ‘기생 국가(parasitic state)’ 개념도 듭니다. “오늘날 의학에서 사용되어 낯익은 단어 ‘기생충(parasite)’의 원래 그리스어 의미는 ‘(무슨 이득을 노리고 유명인이나 주요 행사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자(hanger-on)’였다. 이제 이 유용한 단어를 사회과학에 되돌려줄 때다., 기생 국가는 국가의 속성은 유지하되 그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는 정치 공동체다.”
경제학 아니라 생태학, 정치적 선택보다 도덕적 판단을!
저자는 폭력, 경제적 불평등, 자유의 억압뿐만 아니라 생태적 피해도 ‘정치적 악’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생태를 대하는 방식의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생태학이 경제학을 대체하고 도덕적 판단이 정치적 선택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체적 대안도 내놓습니다. 육식을 줄이는 것이죠. 저자는 “인류가 육류와 우유를 포기하면 현재 농업이 차지하는 토지의 4분의 3이 해방될 수 있다. 물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축은 전 세계적으로 물의 3분의 1을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수질 오염의 절반 이상은 가축 탓”이라며 “늘어나는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림과 동시에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로벌 노스의 가축 사육을 과감하게(최대 40%까지) 줄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후위기 판도를 뒤집으려면 육식 포기가 휘발유 포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거듭 강조하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석유가 동나기 전에 공기부터 바닥내고 말 것이다.”
“경제적 가치가 없는 공기가 부족해지면 경제적 가치의 구현체인 석유는 팔리지도 연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경제성장을 제한하는 요소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다.”
“산업 확장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자원을 고갈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대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석탄과 석유는 절대 바닥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한참 전에 우리의 공기가 먼저 결딴날 테니까.”
저자는 책에서 약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을 여러 차례 이야기합니다. “(가이아 가설은) 지구는 바다·대기·지각뿐 아니라 인간 및 기타 생명체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이아를 위태롭게 만들 경우, 가이아는 지구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그 인간을 희생시킬 것이다.”
저자 알렉산드르 옛킨트는 중부유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일합니다. 그는 ‘감사의 글’에 “수년 동안 집필 중인 원고에 대해 십 대 아들들과 계속 논의해왔다. 그 내용이 그들 세대가 직면한 온갖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책엔 ‘책건문’에 담지 못한 흥미롭고도 유익한, 또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