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2012.12.04 22:23
김태주 | 극작가

▲ 아주 오래된 농담 | 박완서·실천문학사

[오늘의 사색]아주 오래된 농담

“작은 일에 감동하고 싶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벌써 땅거미가 지는군. 영빈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소리를 이렇게 돌려 말하곤 했다. 그러면 현금은 아니야. 지금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맞받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도 나는 그 말이 좋아.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만날 만날 낯설어. 너무 사나워서 겁도 나구, 나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긴장해봤댔자지, 내가 뭐 할 수 있겠어.

기껏해야 잘난 척하는 게 고작이지. 그렇게 위협적인 세상도 도처에 잿빛 어둠이 고이기 시작하면 슬며시 만만하고 친숙해지는 거 있지. 얼마든지 화해하고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이 나는 좋아.”

사랑에 속고, 시대에 속고, 이상에 속고, 일생을 거짓말에 속아 분한 인생일 수도 있고,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농담 같은 인생일 수도 있겠다. 어느 한 편에 서야 한다면, 산다는 것이 어찌 보면 아주 오래된 ‘농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기대고 싶다. 애써 맞서야 하는 매섭도록 거센 찬바람이 온몸을 내맡겨도 좋을 따뜻한 산들바람이 될 수도 있다. 느물거리지만 밉지 않은, 툭 하고 던져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내공 가득한 여유로움. 한 해를 내주고 얻고 싶은 그것이다. 어느새 한 해가 간다. 분명 농담 같은 한 해가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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