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여행은 몸으로 읽는 텍스트”

2019.04.19 20:34 입력 2019.04.19 20:42 수정

‘알쓸신잡’으로 유명해진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 216쪽 | 1만3500원

신작 에세이 <여행의 이유>를 펴낸 소설가 김영하를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작가는 여행 준비를 좀 슬슬 하는 게 좋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책은 그의 가장 큰 실패담으로 시작한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신작 에세이 <여행의 이유>를 펴낸 소설가 김영하를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작가는 여행 준비를 좀 슬슬 하는 게 좋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책은 그의 가장 큰 실패담으로 시작한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첫 해외여행 때 추방 경험부터
‘이상했던 여행’ 알쓸신잡까지
특별한 존재 ‘섬바디’가 아닌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가 된다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 스위트룸 객실 문을 열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 있는 남성의 실루엣이 보인다. 소설가 김영하(51)다. 그가 여행에 대한 에세이 <여행의 이유> 출간 인터뷰 장소로 호텔을 택한 것은 꽤 적절해 보인다. 그에게 호텔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통해 ‘삶의 안정감’을 확인하는 장소다.

김영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작가이자 tvN 프로그램 <알쓸신잡> 출연으로 ‘국민작가’로 도약한, ‘특별한 존재(Somebody)’다. 그런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스물세 살 자신의 세계관을 바꾼 계기가 됐던 첫 해외여행부터 얼마 전 산문집 원고를 탈고한 후 떠났던 하와이까지 그는 쉼 없이 여행을 떠나고 또 돌아왔다. 지난 17일 김영하를 그곳에서 만났다.

“여행은 인생을 뒤흔들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여행 다녀와서 인생이 바뀐 사람도 많거든요. 여행의 어떤 것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게 되는가에 대해서 언어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전부터 있었어요. 또 <알쓸신잡>에 출연하면서 여행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됐어요. 여행이라는 게 도대체 뭐고, 왜 가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아우르는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행의 이유>는 여행담이나 기행문이 아니라, ‘여행론’에 가까운 책이다. “나는 우선 작가였고, 그 다음으로는 여행자였다”는 김영하는 ‘여행자’의 정체성에 입각해 인간과 삶, 글쓰기에 대한 사유를 풀어놓는다. 철학과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 이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시키는 통찰,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입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가 겪은 것과 타인의 간접 경험
층층이 쌓은 크레이프 케이크 같아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를 보고
여행을 통한 공감능력 다시 확인

여행에 관한 책은 난데없이 추방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2005년 김영하는 중국에 머물며 소설을 쓰기 위해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했지만 비자가 없어 공안에 이끌려 출국당한다. 그가 여행에서 경험한 가장 거대한 실패담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 순조롭길 바라죠. 하지만 정말 순조롭고 매끄러웠던 여행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아요. 시련과 고통이 있었던 여행은 잘 잊히질 않는데 그게 이야기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타인과 고통과 시련으로 이뤄져 있죠. 책의 서두에 내가 겪은 가장 황당한 시련을 넣어보자 생각했어요.”

[책과 삶]“여행은 몸으로 읽는 텍스트”

공항에서 편도 비행기를 비싼 값을 치르고 사야 했고 선불로 지불한 숙박비도 돌려받지 못했지만, 푸둥에서의 추방 경험은 ‘남는 장사’였다. 훌륭한 글감이 되었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인 스물세 살의 중국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타는 비행기에서 멀미가 날까봐 귀 밑에 멀미약 ‘키미테’를 붙이고 떠난 여행, 그곳에서 ‘사회주의 가능성’을 보고자 했으나 실제 목격한 것은 독점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중국이었다. 베이징대학교 기숙사에 걸린 커다란 미국 지도를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여행 이후 대학원에 가고, 대학원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로 평생 업을 삼았다. 그는 “멀미약 패치를 귀 뒤에 붙이고 나타난 나의 무의식은 아마도 중국에서 내가 겪게 될 현실, 일종의 정신적 멀미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2년 동안 촬영했던 <알쓸신잡>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김영하는 <알쓸신잡>을 가장 ‘이상했던 여행’으로 꼽는다. 자신의 여행을 3인칭 시점으로 보고, 자신이 한 여행과 타인이 한 간접적 여행이 하나로 뒤섞여 ‘여행’이 완성되는 경험을 했다. 김영하는 “내 여행을 3인칭 시점으로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누구도 최종적으로 완성될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헤매고 있다는 게 카프카적 상황으로 느껴졌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성>에선 성을 찾는 건축기사에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가리킬 뿐, 자신이 성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는 “예전엔 직접 떠난 여행 경험만이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쓸신잡>을 통해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비여행, 탈여행들이 모두 합쳐져서 여행이라는 경험을 이룬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행이란 내가 직접 겪은 일과 타인의 간접 경험을 층층이 쌓아올려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를 맛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전에도 유명 작가였지만, <알쓸신잡> 출연 이후 그야말로 ‘유명인’이 됐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섬바디’인데, 여행에선 누구나 기존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노바디’가 될 수밖에 없다. 김영하는 그 낙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기꺼이 ‘노바디’의 상태가 되는 것이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라고 말한다.

“여행에서 ‘노바디’가 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이 초기화된다는 것이에요. 여기선 내가 누군지 너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만 여행을 가면 다 흔들려요. 뭉뚱그려 한국 사람, 동양 남자가 되죠. 내가 누구인지 자동으로 결정되는 곳에선 자신이 뭘 좋아하고 어떤 걸 못 견디는 사람인지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했던 ‘나’가 여행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죠.”

가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글
이 글을 오감으로 느끼는 게 여행
다른 방식으로 압축하면 그게 소설

김영하는 그동안 소설에서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 그는 신뢰와 환대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이 달라진 걸까.

“많이 변했죠. 소설을 20년 넘게 써왔어요. 소설은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경험이에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신뢰, 환대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예전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했고, 세상이 제 얘기를 들어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해요. 힘없는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김영하는 예전엔 미술관이나 인공적인 곳을 많이 찾았다면, 최근 여행에선 식물원이나 정원을 자주 찾는 것도 달라진 점 중 하나라고 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알쓸신잡> 이후 밖을 돌아다니는 게 힘들어져 집에 자주 머물면서 정원을 가꾼다”고 말했다.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니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하는 “노트르담 성당이 불탈 때 전 세계인이 안타까워하고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서 여행을 통해 공감능력이 확장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공감능력을 폭발적으로 늘려왔는데, 또 한편으로 여행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환대받은 경험을 통해 서로를 가깝게 느끼게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영하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텍스트”라는 답이 돌아왔다.

“여행을 떠남으로써 가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텍스트를 읽게 된다고 생각해요. 이 텍스트는 몸으로 읽어야 합니다. 오감을 활짝 열고 듣고 감각하고 맛봐야 하는 것이죠. 우리의 긴 인생, 일상을 압축해 강렬한 경험으로 만드는 게 여행이고, 이걸 다른 방식으로 압축하면 소설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텍스트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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