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은 옥스퍼드대 언어학 교수 "아이를 바이링구얼로 키우고 싶다고요? '사고의 언어' 형성이 먼저"

2019.05.05 17:08 입력 2019.05.05 17:50 수정

아이를 바이링구얼(이중언어 사용자)로 키우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꿈일 것이다. ‘언어의 문’이 닫히기 전에 영어를 모국어처럼 습득할 수만 있다면, 아이만큼은 자신이 평생 겪어 온 영어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이런 희망은 아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조기 영어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조급증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다 보니 영어유치원도 모자라, 유아에게 영어로 중국어를 가르치는 베이비시터까지 등장한다.

옥스퍼드대 언어학과 교수이자 두 아이를 바이링구얼로 키운 조지은 교수가 <언어의 아이들>(사이언스북스)이란 책을 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들 뇌에 있는 ‘언어의 방’은 풍선처럼 늘어나기 때문에 기회를 잘 살리기만 하면 멀티링구얼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기존 연구와 실험을 통해 옳지 않다고 증명된 정보들까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고집스럽게 통용되고 있어 오해를 바로잡고 (정확한 사실을) 공유하고자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언어의 아이들> 책 쓴 조지은 교수 /김정근 선임기자

<언어의 아이들> 책 쓴 조지은 교수 /김정근 선임기자

- 아이가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데는 ‘신데렐라의 문’ 같은 시간이 존재해서, 그 시기를 놓치면 외국어로 ‘학습’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문이 닫히기 전, 일찍 가르칠수록 좋은 것인가.

“가장 많이 오해하시는 것 중 하나인데, ‘언제’ 가르치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가르치느냐이다. 아이의 언어습득 능력은 2.5~3세 사이에 최고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나 ‘사고의 언어’가 형성되기 전 여러 언어에 일관성없이 노출되면 아이가 오히려 ‘모국어’를 잃어버리는 역효과까지 생길 수 있다. 오래전 인터뷰했던 학생 한 명은 어릴 적 부모의 사업차 남미에 살았는데 스페인어를 하는 보모에게 맡겨졌다가 영어유치원에 갔다고 한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스페인어와 영어 구사력이 미숙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한국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수 있는 시간도 지나 있었다. 모국어가 부재한 채로 자신감 없이 살아가다보니 언어뿐 아니라 사회성 발달, 교우관계까지 영향을 미쳤다. 내가 ‘나’임을 나타내는 ‘사고의 언어’가 없으면, 여러 언어를 배워도 ‘짜깁기’처럼 돼서 표현력이 어린 시절에 멈추게 된다.”

- 해외 체류가 아닌 한국 내에서도 이런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까. 조기 영어교육을 위해 어릴 때부터 외국어로만 말하는 보모를 채용하거나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고의 언어’는 부모와 아이가 언어를 통해 유대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그런데 아이를 한국어로 말하면 벌 주는 영어유치원에 하루 종일 보내고, 집에서도 부모가 어설픈 영어 대화를 시도하면 아이에게 혼란이 온다. 심지어 강남에는 영어 먼저 마스터시킨 다음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아이들을 위한 한국말 학원도 있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영어로만 말해!’라고 강요하는 영어몰입교육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심어줄 수 있다. 소수의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대다수 어린이들이 겪는 심리적인 문제다. 자칫 트라우마로 평생 남을 수도 있다. 심할 경우 실어증을 겪는 아이도 있는데 이런 부정적인 측면은 잘 조명되지 않는다. 한국 대학에서 강의할 때 보니, 학생들이 영어로 질문 하는 걸 두려워하더라.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언어를 두려워한다는 건 큰 문제다.”

- 그럼 영어를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

“언어의 문은 절정의 시기인 2.5~3세가 지나더라도 습득의 효율성이 감소하는 것일 뿐 완전히 닫히는 것이 아니다. 시기가 조금 늦더라도 ‘사고의 언어’가 안착된 후 아이가 스스로 흥미를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에게 부모가 어설픈 영어로 말을 걸거나 영어 DVD 같은 것을 아무런 상호작용 없이 일방적으로 몇시간씩 틀어주는 건 효과가 없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영어 배우는 것을 ‘놀이’나 ‘재미’로 느끼면서 영어 책에 호기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가 스스로 영어책을 읽는 과정에서 ‘단어폭발’이 일어나면 그 다음부터 아이가 보여주는 창의성의 힘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경우도 학창 시절 부모님이 ‘펜팔’을 알려주신 덕분에 외국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영어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나는 대학 때까지 한국에서 나고 살아서 ‘사고의 언어’는 한국어이지만, ‘삶의 언어’는 영어가 더 편한 바이링구얼이다. 어릴 때 펜팔 경험으로 받은 자극이 큰 도움이 됐다.”

조지은 옥스퍼드대 언어학 교수 "아이를 바이링구얼로 키우고 싶다고요? '사고의 언어' 형성이 먼저"

- 한국에서는 영어가 너무 ‘도구화’ 되다보니 이중언어를 가르치는 것의 의미가 오히려 오염된 측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 지적하셨듯 사실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이중언어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한국도 이주 여성과 결혼한 다문화 가정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중언어 교육이 가장 많이 필요한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여기에서 소외되고 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 같은 엄마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빨리 한국말 먼저 배우라고 종용한다. 엄마가 미국 사람이라면 과연 그랬을까. 마치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 1세대들이 자녀들에게 빨리 영어를 배우라며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아이의 뇌에 있는 ‘언어의 방’은 풍선처럼 늘어나기 때문에, 베트남어를 못 하게 한다고 그만큼 한국어의 방이 커지는게 아니다. 저는 영국인 남성과 결혼을 해서 낳은 두 아이들을 바이링구얼로 키웠다. 엄마와는 한국어로, 아빠와는 영어로 일관성 있게 대화하며 (독자적인) 유대관계의 언어를 형성했기 때문에 두 개의 언어 기둥이 나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면 표현력도 두배가 되고, 인지 능력과 사회성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유대관계가 가장 깊은 엄마와 소통을 할 수 없게 되면 ‘사고의 언어’ 형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는 한국말 습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다문화가정 아이들 23%가 약간의 언어발달 지체 현상을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숫자가 적지도 않은데, 이 아이들의 이중언어 습득에 사회적인 관심을 필요하다.”

- 아이들이 ‘우체부’란 단어는 몰라도 ‘택배’는 안다는 어휘조사 프로젝트도 흥미로웠다.

“경기도 수원의 3~6세 어린이집 아이들 47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아이들이 쓰는 어휘가 정말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장’은 몰라도 ‘마트’는 알고, 멀티미디어에 많이 노출돼서 IT 관련 영어단어도 많이 안다. 이 아이들이 어른 세대가 되면 한국의 언어 사전이 크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음운 구조도 바뀌지 않을까. 요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커피’라고 말할 때 어른들이 ‘ㅍ’ 발음을 하면 그건 틀렸다면서 ‘f’ 발음으로 교정을 해준다. ‘f’ 사운드가 한국어 음운에 새로 추가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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