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가족’은 이미 해체 중···‘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모두에게”

2022.10.04 18:56 입력 2022.10.05 01:36 수정 이영경 기자

이성애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제도에서 벗어난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주장하는 책 <가족을 구성할 권리> 펴낸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강윤중 기자

비혼·성소수자·장애인 외면한 ‘낡은’ 제도
정부 정책도 결혼·출생에만 집중
1인 가구·소수자 차별로 이어져

안전망 넓히는 4차 건강가정계획
정권 바뀌며 폐기, 국가가 현실 역행


지난해 여성가족부는 비혼 동거 커플 등 혼인이나 혈연 관계로 묶이지 않은 관계도 법률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을 발표했다. 가족을 ‘혈연·혼인·입양으로 이뤄진 단위’로 협소하게 정의하는 법 조항을 삭제하고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취지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가부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지난달 여가부는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폐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가의 보호·지원 대상을 법에서 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였다. ‘국가가 보호·지원해야 하는 대상’은 기존 혈연·혼인 중심의 ‘이성애규범적 정상가족’임을 확인한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비장애인·결혼·이성애 가족 관계를 상상하는데, 시민들은 이미 규범적 생애모델을 떠나고 있습니다. 비정상적 가족을 정의하는 것보다 무엇이 ‘정상가족’인지 정의하는 게 더 어려워진 시대에 살고 있는데 국가는 현실을 역행하고 있습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국가는 이탈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을 ‘문제적 집단’의 출현으로 보고 있다.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아 출생률이 떨어지고, 원가족을 떠나는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문제아가 되고, 여성들이 탈가부장을 모색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으면 이기적 선택으로 본다”고 말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오월의봄)는 정부의 이런 시각에 저항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쓰였다. 지난달 30일 김 대표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이성애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제도에서 벗어난 다양한 가족 구성권을 주장하는 책 <가족을 구성할 권리> 펴낸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강윤중 기자

지난해 통계청 인구총조사에선 결혼을 하지 않은 연인이나 친구끼리 거주하는 비친족 가구가 1년 전보다 11.6% 증가한 47만여가구에 달했다. 비친족 가족원은 101만5100명으로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았다. 2020년 여가부 조사 결과 응답자 70%는 ‘혼인·혈연 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고 답했다.

김 대표는 “기존 가족모델의 ‘정상성’ 자체가 균열·해체되고 있다. 가족을 만들 수 없었던 장애인·성소수자들도 ‘가족’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국가와 제도는 이들을 부정한다. 결과는 고립과 불평등이다. 김 대표는 “더 이상 이전의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너무 부족하다. 새로운 관계와 삶에 맞는 안전망이 취약할 때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작아지고 낡은 옷에 몸을 욱여넣는 것보다 새로운 옷을 만드는 게 낫다. 김 대표는 “가족을 저항의 언어로 사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가족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가족주의의 핵심”이라며 “불평등을 가족 ‘안’의 이슈로 만들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해온 권력에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가족제도는 차별을 만들어낸다. 한부모 가족, 성소수자 가족, 비혼 가족이 차별받는다. 한부모 가족의 소득은 전체 가구 월소득의 절반 수준이며, 모자(母子) 가구는 한부모 가족 월소득의 절반 수준이다. 성소수자들은 원가족과의 불화로 지원 없이 일찍 ‘독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립과 빈곤으로 이어진다. 반면 기혼 청년의 빈곤율은 낮다. 정부 지원책은 신혼부부, 예비부부, 저출생에 집중돼 있다. “결혼만이 가족자원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국한부모연합, 정치하는 엄마들 관계자들이 가족기본법 개정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고립’ 또한 심각한 문제다. 곤란한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지지체계가 없는 국내 고립인구의 비율은 2019년 기준 21.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1인 가구 비율이 56.6%로 가장 높은 스웨덴은 고립지수가 6.6%다. 아이슬란드의 고립지수는 1.8%인데, 아이슬란드의 혼외출생 신생아 비율은 69.9%에 이른다. 김 대표는 “고립의 원인은 비혼이나 1인 가구 증가가 아니다. 어떤 사회가 시민들 사이의 유대를 가능하게 만드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원인은 민법 779조다. 혈연·혼인 관계 중심으로 가족을 협소하게 정의하는 민법 779조는 240개 법 조항의 ‘가족’에 영향을 미친다. 주거·의료·돌봄·연금·상속·재난 등 삶의 전 영역의 보호가 혈연·혼인 관계 중심으로 이뤄진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맹점을 다시 한번 드러냈는데, 가족돌봄휴가의 돌봄 대상은 조부모, 부모, 배우자, 자녀 등으로 제한됐으며 확진자 가족일 경우 무료로 받을 수 있는 PCR 검사에 적용되는 기준 또한 민법상 가족에 근거한다. 실질적 돌봄을 주고받는 다양한 동거 관계는 코로나19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김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친밀성의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사회에서 가장 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장애인, 성소수자들은 친밀한 관계를 발명하고 만들어왔다”며 “차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시민적 유대 가능성을 보여준 소수자, 가족을 만들 수 없는 존재들이 가족을 만드는 것은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시설로부터 벗어난 장애여성 1인 가구, 친구 사이로 오랫동안 동거해온 사람들, 성소수자 동거인 등 다양한 대안적 가족을 형성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 대표는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등의 도입과 함께 사회의 지원과 돌봄 체계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이런 관계를 맺으면 이걸 줄게’ 방식이 아니라 보편적인 주거 정책을 펴고, 일자리 정책을 펴면 좋겠어요. 일자리와 주거, 돌봄을 국가가 지원하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미래 세대와의 유대(출생)를 계획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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