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우리할머니

우리는 할머니를 ‘호랑이 할머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목소리가 컸고 야단을 잘 쳤다. 명절에 할머니 집을 가는 게 썩 기대되지 않을 만큼 할머니가 무서웠다. 동화 속 할머니를 보면 할머니들은 모두 인자하던데 우리 할머니는 왜 그렇지 않을까 이상했다. 친구들은 방학마다 시골 할머니 집에 간다는데 할머니는 서울에 사시는 것까지 특이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할머니를 ‘서울 할머니’라고도 불렀다.

그러던 할머니가 첫 증손주인 내 아이를 안고는 무척이나 예뻐하셨다. 할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기뻐 말씀하셨다. “남들이 손주 예쁘다 할 때 사실 나는 잘 모르겠던데 증손주를 보니 이제야 알겠다.” 무섭던 할머니가 사랑 많은 증조할머니가 되신 게 반갑고 고마웠다. 세월이 더 흐른 이제는 할머니가 좀 더 이해된다. 오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삶과 맞부딪칠 때마다 할머니의 마음은 단단해져야 했을 거다. 함경북도 끝자락에서 타고나신 성정 또한 그랬겠지만.

사람마다 삶의 이력과 타고난 성정이 다른데 세상 모든 할머니가 인자하다고 말하는 게 사실 이상한 일이다. 동화 속 고정관념과 편견은 인자하지 않은 할머니를 더 특이하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할머니 잘못이 아니라 동화 잘못이었다.

지금처럼 윤여정 배우나 박막례 할머니처럼 다양한 할머니가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시대였다면 우리 할머니도 의지가 굳고, 에너지 넘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진짜 ‘호랑이’로 말이다.

노인 문화제 행사에 참석하신 어르신들이 공연을 보며 즐거워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노인 문화제 행사에 참석하신 어르신들이 공연을 보며 즐거워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플랫]자애롭지 않아도, 가족이 없어도 ‘행복한 할머니’는 있다

📌[플랫]성 작가 6명이 각자의 색깔로 쓴 여섯 빛깔 ‘나의 할머니에게’

할머니의 현재

다행히 요즈음 그림책과 동화의 할머니는 확연히 달라졌다. 먼저 <엄마의 초상화>(유지연, 이야기꽃, 2014)는 모성이라는 환상에 가두던 할머니를 해방시켜 오직 유일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림책은 왼쪽 면에 ‘엄마’를, 오른쪽 면에 ‘미영씨’라는 사람을 그린다. 책장을 넘기며 조금씩 완성되는 ‘엄마’와 ‘미영씨’의 모습은 차이가 난다. ‘엄마’는 파마머리를 질끈 묶고는 생선 머리만 먹지만 ‘미영씨’는 멋쟁이인 데다 여행과 탐험을 꿈꾼다. ‘엄마’의 초상화는 흑백으로 엄마의 옆모습을 그린 데 반해 ‘미영씨’의 초상화는 화사한 컬러에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이 프레임 밖으로까지 몸을 내밀게 했다.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비교되던 두 인물은 그러나 한 사람이었다.

그림책은 마지막에서야 “둘은 서로 다르게 생겼어요. 하지만 하나뿐인 우리 엄마, 미영씨입니다”라고 비밀을 밝힌다. 우리가 몰라봤던 ‘엄마’의 얼굴인 ‘미영씨’를 보게 한다.

물개할망 삽화. 오미경 글, 이명애 그림, 모래알(키다리)

물개할망 삽화. 오미경 글, 이명애 그림, 모래알(키다리)

모성이란 일률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며 여러 할머니의 얼굴이 속속 그림책과 동화에 등장했다.

그림책 <물개할망>(오미경 글, 이명애 그림, 모래알, 2020)은 제주 해녀인 할머니를 그린다. 푸른 바다 속에서 천하장사가 되어 생계 노동을 하는 할머니 해녀를 보고 있으면 할머니에 대한 관심과 상상력이 그간 빈약했던 게 부끄럽다.

그림책 <잘 가, 안녕>(김동수, 보림, 2016)은 가난한 독거노인의 전형으로 그려졌던 폐지 줍는 할머니를 새롭게 그린다. 할머니는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수호자다. 할머니의 삶은 고단하고 불쌍한 폐지 줍는 노인의 삶이 아닌 모든 생명과 함께 걷는 길 위의 삶이 된다.

김다노 글·이윤희 그림 | 사계절 | 2020년

비밀 소원

김다노 글·이윤희 그림 | 사계절 | 2020년

동화에서는 좀 더 디테일한 할머니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비밀 소원>(김다노, 사계절, 2020)의 할머니는 작은 사건에 휘말린 손녀 이랑을 구하기 위해 헌법 책을 들고 달려온다. 헌법을 짚어가며 하나씩 따지던 모습에 대해 이랑이 묻자 할머니는 대답한다.

“나 혼자서 네 이모랑 너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겠냐. 아는 게 많아야 해. 문화센터에서 수업도 들었고, 그때 알게 된 할머니들이랑 따로 공부 모임도 하고 있다.”(<비밀 소원> 67면)

정말이지 할머니야말로 평생교육의 실천자였는데 무학자로만 그렸으니 제대로 현실 반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게으른 편견에 빠져 있었구나 싶다.

SF 동화 <우주로 가는 계단>(전수경, 창비, 2019)에는 물리학자 할머니도 나온다. 한시에 가족을 잃은 지수는 평행 우주에서 건너온 할머니 과학자와 만나며 슬픔을 치유하고 다시 미래를 꿈꾼다. 과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지수에게 할머니 과학자는 인생 멘토이자 슬픔의 연대자가 된다.

할머니의 역사

뭐가 달라지겠어
할머니가 돼도
나는 장미꽃을 보면
눈을 감고 향기를 들이켤 거야
기르는 개랑 툭탁툭탁
장난을 칠 거야
친한 친구들과 키득거리며
맛있는 걸 먹으러 갈 거야
뭐가 달라지겠어
새로 산 청바지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거울 앞에서
씰룩씰룩 엉덩이를 비춰 보고
거울 속의 나에게
키스도 할 거야
연극을 보다 눈빛이 근사한 배우한테
푹 빠지는 건 당연해
뭐가 달라지겠어
새로 나온 책이 뭐 있나
새로 개봉한 영화가 뭐 있나
더듬더듬 검색하겠지
좋아하는 가수 티켓값이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며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겠지
쪼글쪼글 희끗희끗하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 김개미, ‘나란 할머니’ 전문, <미지의 아이>(문학동네, 2021)



영화와 연극을 찾는 문화 취향으로 봐서 어린이 독자보다는 어른 작가의 목소리에 가깝게 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늙어도 나일 거라는 예상은 어린이에게도 해당되는 유쾌한 상상이니까.

오늘날 아동문학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얼굴이 각양각색인 까닭은 지금 우리의 얼굴이 저마다 달라서다. 어린이라고 해서 몽땅 한데 묶고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듯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의 현재는 할머니의 과거와 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니 다 다르다.

구돌 글·그림 | 비룡소 | 2022년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

구돌 글·그림 | 비룡소 | 2022년

그림책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구돌, 비룡소, 2022)는 옛이야기 같은 말투와 현대적 이미지의 이질적인 조합으로 할머니의 현재와 과거를 신나게 넘나든다.

놀이터 정자에서 낮잠을 자던 일곱 할머니는 문득 왕년의 자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랑한다. 시장 모퉁이에서 뜨개방을 하던 홍장미 할머니,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에 신문을 돌리던 배달자 할머니,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나박사 할머니, 아이 열 명을 낳아 기르고 독립시킨 구주부(아마 ‘주부 9단’에서 연상된 성명 아니었을까) 할머니…. 할머니들은 한 명씩 놀이터에서 뛰고 구르며 아직도 녹슬지 않은 재주를 보여주고는 각자 특기를 발휘해 놀이터의 ‘동물학대범’을 붙잡기까지 한다.

옛이야기 ‘재주 많은 오 형제’를 연상시키는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 때문에 할머니는 일상의 영웅처럼 보인다. 자기 자랑이 퇴행적인 회상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몰랐던 할머니의 예전 노동 현장이 밝혀지면서 할머니의 오늘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이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엄청나게 멋진 거군요!”라는 말은 추억의 미화라기보다는 가려져 있던 여성의 역사에 대한 경외로 들린다.

할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남성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여성이 삭제된 인류의 역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시선 또한 만날 수 있다. 역사 현실에서 고통당한 여성 수난사를 강조했던 아동문학은 이제 역사를 만들어간 여성의 주체성에 집중한다. 그림책 <막두>(정희선, 이야기꽃, 2019)는 6·25 전쟁으로 열 살에 고아가 되어 두려움에 떨던 여성 어린이가 홀로 꿋꿋하게 생애를 일궈 온 역사를 말한다. 어린 막두에게 응축된 한국 현대사는 막두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가운데 비로소 이 땅의 여성들과 이어진다. 그림책 <엄마가 수놓은 길>(재클린 우드슨, 주니어 RHK, 2022)과 <할머니의 조각보>(패트리샤 폴라코, 미래아이, 2018)는 보다 더 적극적이고 거시적으로, 퀼트와 바느질에 담긴 이주민의 문화를 여성사로 자리매김한다. 8대에 걸친 흑인 여성 가족과 7대에 걸친 유대인 가족의 역사가 여성의 저항과 용기로 구성된 걸 보여준다.

할머니와 나

어린이 독자는 종종 할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자신과 상당히 다른 한 사람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어린이와 할머니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시간에 있겠다. 우선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다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에 대한 감각도 다를 거다. 1976년 독일아동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동화 <할머니>(페터 헤르틀링, 비룡소, 1999)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와 살게 된 여섯 살 칼레가 느끼는 차이는 이렇다.

“칼레는 할머니가 옛날 얘기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이십 년 전, 혹은 사십 년 전에 겪은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 기차를 탔을 때나 결혼식 때 어떤 옷을 입었었는지, 잔치 음식으로 무엇이 나왔었는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추억이 있다는 건 좋아. 현재가 늘 최고는 아니거든. 이런 게 바로 칼레와 할머니의 차이였다. 칼레에겐 오늘 일어난 일, 친구와 약속한 일, 그리고 어떤 것을 경험했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하는 등의 일만이 중요했다.”(<할머니>, 34면)

수지 모건스턴, 비룡소,2005

어느 할머니 이야기

수지 모건스턴, 비룡소,2005

<어느 할머니 이야기>(수지 모건스턴, 비룡소, 2005)에서도 어린이와 할머니가 달리 생각할 만한 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동화는 제목처럼 서술자가 어느 할머니의 일상과 추억을 어린이 독자에게 옛이야기처럼 들려준다. 예전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기에 할머니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없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하면 된다”(<어느 할머니 이야기>, 15면)고 여기면서 말이다.

할머니는 전쟁 중 잃은 자식을 떠올리며 “세상의 사탕이란 사탕을 다 모아도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기는 쓴맛을 없앨 수는 없다”(<어느 할머니 이야기>, 27면)고 느끼던 걸 기억한다. 또, 다시 젊어지면 좋겠냐는 손주들의 질문에 전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아니, 내 몫의 젊음을 살았으니 이제 늙을 차례야. 내 몫의 케이크를 다 먹어서 나는 배가 불러.”(<어느 할머니 이야기>, 50면) 아마도 손주들은 언제라도 다시 젊어지고 싶다는 대답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시간 감각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어린이가 동감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인생의 온 시기를 겪고 마지막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 유년은 노년과 만나며, 자신과 아주 다르고 크게 차이나는 누군가와도 서로 이해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 같다. 아동문학의 할머니 캐릭터가 오직 사랑과 돌봄의 전형성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성으로 살아 숨 쉴 때 그렇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조건 시혜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맞춰나갈 여지가 있는 고유한 인간으로서 평등한 관계일 때. 어린이와 할머니는 예전부터 친하고 서로를 사랑했으니 충분히 가능할 거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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