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리플레이
2024.05.30 06:00 입력 2024.05.30 06:04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겉핥기 쇼’ 그친 계급사회 분석…불평등 쉽게 그린 게으른 선택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에이트 쇼(The 8 Show)>는 한재림 감독이 그리던 궤적이 닿을 수 있는 어떤 종착지 같다. 이 작품의 서사와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건 공개 이후 꾸준히 비교되는 <오징어 게임>과의 교집합도, 원작 웹툰인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에서 가져온 아이디어도 아닌, 그동안 한재림이 만들어온 작품의 연속적인 흐름이다. 그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번 작품에서 그의 전작들의 흔적을 읽기란 어렵지 않다. 밀폐된 공간에 갇힌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축소판을 비판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은 치사율 높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행기에 갇힌 승객들의 갈등과 선택을 다룬 <비상선언>을 연상케 하고, 극중 나름 선한 집단이 악역들과의 대결에서 반복되는 잘못된 선택으로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은 <관상>의 서사를 따르며, 독백을 독점한 주인공을 통해 얼핏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비정한 세계에의 몰입과 배신의 변곡점을 따라가는 구성은 <더 킹>과 흡사하다. 단순한 크레디트를 넘어 <더 에이트 쇼>는 명백히 한재림의 작품이다. 다만 나쁜 의미에서 그러하다.

1층부터 8층까지 방을 나눈 뒤, 1층엔 가장 좁은 방과 1분당 1만원씩 누적되는 상금을, 그 위부턴 층마다 조금씩 더 넓어지는 방과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 상승하는 상금을, 최고층인 8층은 펜트하우스 같은 방과 가장 많은 상금뿐 아니라 물과 음식을 독식 혹은 배분할 절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게임 설계에서 알 수 있듯, <더 에이트 쇼>는 노골적으로 한국의 계급사회를 재현하려 한다. 이 흥미로운 야심은, 검사 사회를 그리던 <더 킹>이 그러했듯 다분히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른다. 1층부터 8층까지의 배치가 숫자의 의미를 모른 채 게임 참가자들이 각각 선택한 결과라는 것은 계급의 우연성을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이러한 우연이 고착화되고 지배 계급이 헤게모니를 획득해 아래층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억압의 사슬에 편입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이 작품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이젠 익숙해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K드라마의 핏빛 폭력 재현을 계급 불평등의 알레고리라는 핑계로 게으르게 반복할 뿐이다.

3층에 배치된 주인공 배진수(류준열)를 포함한 8명의 인물 모두가 안 좋은 의미로 기능적으로 설정된 건, 계급 부조리의 구조적·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재현하는 어려운 과제는 포기하면서 그것이 폭력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을 쉽게 그려내기 위한 편법에 가깝다. 가령 8층에 배치되어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매 순간 충동적으로 행동해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의 혈압을 올리는 송세라(천우희)는 자신의 재미를 위해 아래층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괴롭히지만, 그것은 그의 계급적 아비투스(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사고, 취향, 습관 등) 때문도 8층이라는 지위의 내면화 때문도 아닌 그저 극단적인 도파민 중독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악의 축을 이루는 6층 태석(박해준)의 잔인한 면모는 애초에 거친 성격 탓이다. 기본적으로 호혜성의 원칙은 개나 준 인물들이 철저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연합하는 악운을 거쳐 게임은 그들이 나머지를 착취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게임을 주최하고 지켜보는 미지의 누군가가 재미를 느껴야 게임의 제한시간이 늘어나고 제한시간이 늘어나야 누적 상금이 늘어나는 게임 규칙 안에서, 8층과 6층 그리고 기회주의자로서의 기능적 역할에 충실한 4층 김양(이열음)은 식음료에 대한 독점권과 미리 구매한 무기 등을 이용해 아래층 사람들에게 가학적인 게임을 시키거나 전기충격기로 체벌해 주최자를 만족시키며 게임의 제한시간을 늘려나간다. 착취당하는 이들 따로, 배를 불리는 이들 따로 있는 상황은 계급사회의 부조리를 유사하게 재현하는 듯하지만, 그 모순의 근원을 통찰해 우리를 불편하지만 유의미한 자기이해로 이끌기보다는 이 자극을 구경하며 팝콘을 씹는 방관자의 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관상’ ‘더 킹’ ‘비상선언’ 연장선
8개 층으로 나눠 참가자 배치
선량한 피해자·가해자 이분화

‘구조적 폭력’ 통찰·이해보다
나쁜 사람들이 지닌 욕망 탓
창작자·대중은 방관자로 분리

시청자가 마음 편히 쇼를 구경하기 위해선 안전한 자리만큼 그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1화부터 등장해 게임에 참여하기까지의 전사(前史)도 다른 인물들보다 디테일하게 묘사된 3층은 작중 유일하게 독백을 통해 시청자가 상황을 인식할 창구 역할을 해준다. 8층과 6층의 폭거에 온갖 고난을 겪었음에도 반란에 성공한 뒤 차마 똑같이 보복할 수 없을 정도로 선량한 그는, 말하자면 그의 고난을 구경하던 우리가 그럼에도 가해자가 아닌 선량한 피해자의 위치에 이입할 수 있는 기능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추잡한 세계에서 뒹군 내부고발자인 척하지만 딱히 더럽혀진 적 별로 없어 관객이 편히 이입할 수 있던 <더 킹>의 박태수(조인성)도 그러했지만 이번 작품은 그보단 정교하다. <더 킹>이 나쁜 그들(검사 집단)과 정의로운 우리라는 단순하고 허술한 도식을 숨길 수 없이 드러내는 반면, <더 에이트 쇼>는 역시 도식적인 구도와 인물들로 가학적 상황을 만들어내면서도 창작자가 개입한 흔적은 교묘히 지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작품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의 진정한 배후는 규칙을 설계하고 폐쇄회로(CC)TV로 게임을 관음하며 가학적 상황을 유도하는 주최자다. 제목 그대로 참가자들은 주최자가 재밌어할 ‘쇼’를 하며,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종종 주최자의 관음적 시선과 동일시된다. 즉 바깥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추동하는 주체는 실은 미지의 대상이 아닌, <더 에이트 쇼>를 보고 재미를 느끼는 대중이다. 여기서 가학적 사건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창작자의 책임을 미루는 1차 알리바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대중으로서의 시청자가 불편한 자기인식을 통해 쇼를 보길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이 작품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한 2차 알리바이를 위해 관음의 책임을 대신 뒤집어쓸 범인을 제시해야 한다. 영화감독인 7층 유필립(박정민)의 과거 회상에서 ‘대중은 재밌는 걸 떠먹여줘야 한다’고 말하는 제작자와 ‘대중을 무시하지 말라’는 필립의 대화는 이 구도를 정식화한다. 재미와 자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불특정 대중과 이를 충족시켜주는 세상이 <더 에이트 쇼>의 세계를 만들지만, 정작 이 시리즈를 실제로 만들고 보는 한재림과 우리는 의식 있는 대중과 창작자로서 이 세계와 구분된다.

계급적 착취와 자극만을 추구하는 괴물 같은 세상을 비판하는 제스처를 취하되, 그것에 대한 공범의식은 깨끗하게 지워준다는 점에서 <더 에이트 쇼>는 한재림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 높고 가장 기만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 정말 나쁜 종착지인 건 결과가 나빠서만 아니라 여기에 이르는 과정의 연속성이 끊임없이 안 좋은 방향으로 누적되어서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수양대군(이정재)에 대항한 주인공들의 실패가 예정됐던 <관상>은 폭압적인 적 앞에 무능력한 지식인에 대한 자기비판과 자기연민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이 나약한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더 킹>의 박태수는 자신이 검찰에서 배운 이슈를 이슈로 덮는 방식으로 대항한다. 하지만 그것이 협잡으로 협잡과 싸우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선 정의로운 역사의 보증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엔딩에서 조금은 무책임한 방식으로 이 모든 결과를 결정할 몫을 관객에게 넘긴다. 그렇다면 대중은 어떻게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나름 예술적 야심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실패한 작품이 <비상선언>이다. 그는 육지에 바이러스를 퍼뜨릴 가능성을 막기 위해 착륙을 포기하는 비행기 승객들을 통해 악조건 속에서도 숭고한 결단에 이르는 대중의 역능을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 악조건을 위해 더 넓은 범위에 속한 대중의 호혜성을 부정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그의 의도와 달리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적 메시지로 독해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한재림은 대중의 역능을 새로이 탐구하는 대신, <비상선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고집하며 <더 에이트 쇼>의 잔혹한 세계로 넘어간다.

그는 <비상선언>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될 환경을 조성하되 그 환경이 창작자인 자신의 의도적 설계가 아닌 이 세계 자체의 구조적 모순과 나쁜 대중의 욕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환경에서 선한 이들의 의도는 바로 그 이유로 수없이 좌절되고 배신당한다. 아래층의 반란이 실패해 파국이 오는 건 결국 마음 약한 5층 문정(문정희)의 위층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한재림은 <더 킹>에서 그러했듯 다시 화면 밖을 향해 대중을 호명한다. 다만 무능하고 나쁜 대중이 아닌 대중을. 약자를 연민하되 그들과 달리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깨끗하게 분리되었다고 믿는 대중, 한재림의 문제의식에 동조하는 깨어있는 대중. 이것은 지식인 혹은 예술가의 무력함(<관상>)을 대중의 역능을 통해 극복하는 대신, 그 쓸모를 인정해주는 대중이 역량 있는 대중이라는 자기만족적 세계로 퇴행 혹은 도피한 것에 가깝다. 앞서 <더 에이트 쇼>가 한재림이 닿은 나쁜 종착지라고 했지만 이번 작품은 무난히 성공했고 그는 다음 작품을 만들 테니 엄밀한 의미의 종착지는 아니다. 다만 이 작품에 이른 그의 궤적이 전작들이 그러했듯 부족하되 미덕은 있던 방향을 향해 선회하는 것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뿐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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