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우스갯소리로 언론사 기자가 다른 기자의 특종기사를 보고는 ‘물 먹었다’는 표현을 쓴다. 자존심 하나로 사는 기자들에게는 참으로 기분 더러운 순간이다. 가만 보면 소름이 돋는 표현이기도 하다. 기자에게 낙종, 즉 ‘물 먹는다’는 것은 물고문 당할 때의 고통에 비견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1987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물태우’라는 별명이 붙은 적이 있다. 과단성이 없고, 나약한 지도자라는 뜻이니 그리 좋지않은 별명이었다.

■물과 상선약수

하지만 물(水)을 그렇게 단세포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큰일난다.

노자가 ‘무위 정치’의 요체를 설명하려고 인용한 것이 바로 물이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최근 별세한 신영복 선생은 ‘노자의 철학은 바로 물의 철학’이라고 했다. 신영복 선생의 삶에는 바로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구절이 절절이 녹아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선하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잡는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故幾於道).”(<노자> ‘8장 이성·易性’)

구구절절이 맞는 이야기다. 신영복 선생의 풀이처럼 물은 비와 이슬이 되어 만물의 생명을 자라게 한다. 또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앞을 다투지 않고 순리대로 흐른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며 흐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물은 또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에 임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서로 다투지 않는 물은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간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간다.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다가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한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간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뤄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물처럼 부드럽게 남을 이롭게 하면서, 서로 다투지 않고 더불어 함께 낮은 곳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바로 신영복 선생이 읽었던 노자의 ‘상선약수론’이었다.

김홍도의 <노자출관도>. 노자가 함곡관을 넘어 신선세계로 떠날 때의 모습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의 <노자출관도>. 노자가 함곡관을 넘어 신선세계로 떠날 때의 모습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정치

그런데 이 ‘상선약수’ 구절에 정치지도자에게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상선약수’의 다음 구절을 음미해보자.

“머무는 것은 땅처럼 낮고 마음이 연못처럼 고요하다. 정치가 잘 이뤄지고 일이 잘 처리되고 움직임이 때에 잘 맞는다. 오직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夫唯不爭 故無尤)”(<노자> ‘이성’)

무슨 말인가. 노자가 물에 비유해서 무위(無爲)의 정치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노자>의 또 다른 구절은 더 구체적이다.

“강과 바다가 뭇 시냇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잘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언어가 겸손해야 하고, 백성들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 해야 한다.”(<노자> 66장)

노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도자가 된 까닭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잘 낮출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 위에 군림해서 백성을 윽박지르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제왕이 되는 자일수록 더욱 더 겸허한 자세로 백성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을 낮추고 뒤로 물러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의 정치’이다.

■역시 ‘물의 덕’을 가르친 공자

그런데 비단 노자 뿐이 아니다. 조선 전기의 은둔처사 남효온(1454~1492)은 물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두고 살았다. 그런데 그가 남긴 글을 보면 노자와 함께 공자가 등장한다.

“물의 성질은 만물을 잘 비추어 곱고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때문에 허물을 듣고 용감하게 고치는 선비가 물을 좋아한다. 천하의 가장 낮은 곳에 처해 다른 물건과 다툼이 없으니 겸손하게 물러나 부드러움을 지키는 사람도 사랑한다. 그러므로 공자 같은 성인도 물을 지혜롭다 일컬었고, 노자 같은 현인도 물의 ‘낮추는 덕’을 취했으니 나도 이런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지 오래됐다.”(<추강집> ‘감정기’)

노자야 그렇다 치지만 “공자가 물을 지혜롭다고 했다”는 남효온의 언급은 무엇인가. 역시 성인끼리는 통하는 법. 공자도 노자처럼 ‘물의 덕(德)’을 설파했다.

즉 공자는 졸졸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면서 늘상 ‘물이여! 물이여!(水哉 水哉)’라고 감탄했다. 훗날 맹자의 제자인 서자는 스승 맹자에게 “공자님이 ‘물이여! 물이여!’ 하며 감탄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이 때 맹자는 “공자는 군자의 덕망(德望)을 흐르는 물에 비유해서 말한 적이 있다”고 상기시켰다.(<맹자> ‘이루·하’)

그것이 언제인가. 공자시대에 공자의 제자 자공이 물었다는 내용이다. 즉 자공은 “군자가 큰 물(水)을 보면 반드시 감상한다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라고 스승(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그 때 “군자는 물을 덕(德)에 비유하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물은 두루 베풀어 사사로움이 없으니 덕(德)과 같다. 또 흐르는 곳마다 생명을 주니 인(仁)과 같다. 낮은 곳에 흐르면서 곧게 가기도, 돌아가기도 하니 그 이치를 따르는 것은 의(義)와 같고, 100척의 깊은 계곡으로 달려가면서도 의심하거나 주저함이 없는 것은 용(勇)과 같다. 또 성질은 유약하지만 미세한 틈이라도 메워주니 명철(明察)함과 같고 더러운 것까지 거절하지 않으니 정(貞)과 같다. 깨끗하지 않은 것을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신선하고 청결한 것을 내보내니 교화(敎化)를 잘 하는 것과 같다. 그릇에 넣으면 반드시 평형을 유지하니 공정(公正)함과 같다. 가득차면 고르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반듯해지는 것은 법도(法度)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군자가 큰 물을 감상하는 것이다.”(<설원>)

정선의 <노자 출관>. 노자는 함곡관을 떠나면서  5000여자에 이르는 <도덕경>을 함곡관 관리인 윤희에게 전했다고 한다.|왜관수도원

정선의 <노자 출관>. 노자는 함곡관을 떠나면서 5000여자에 이르는 <도덕경>을 함곡관 관리인 윤희에게 전했다고 한다.|왜관수도원

■물은 절대 유약하지 않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물은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물질인가. 노자의 말씀처럼 그저 ‘매가리’ 없이 자연의 힘에 순응하면 잘 사는 것일까.

만약 위정자가 ‘물의 순리’를 벗어나는 통치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백성은 그저 위정자가 하는 대로 휘둘려야 하는 것일까. ‘물의 철학자’인 노자가 ‘물처럼 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시 노자의 말씀을 들어보자.(<노자> 43장)

“천하에서 가장 유약한 것은 가장 강한 것으로 깊이 스며든다. 무(無)라는 것은 틈이 없는 곳으로 스며든다. 나는 이로써 무위가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물의 힘이 가장 강한 것 속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노자는 한없이 유약한 것 같은 물이 얼마나 강한지 설명한다.

“천하에 물처럼 유약한 것은 없지만 물처럼 견고하고 강한 자를 공격해서 능히 이길 수 있는 것도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다. 하지만 누구도 막상 이를 실행하지 못한다.”(<노자> 78장)

노자의 말씀이 지당하지 않은가. 삼척동자도 다 알듯이 물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일단 계곡에 모여 흘러내리기 시작하면 어떤 장애물도 뚫고 지나간다. 물보다 강한 존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이쯤에서 끝났지만 순자는 무시무시한 말을 보탰다.

■물은 혁명이다.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물은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 ‘왕제’)

순자는 ‘물=백성’, ‘배=군주’라 하면서 군주가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면 순항할 수 있지만 백성의 인심을 거스르면 전복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천하에 물처럼 유약한 것도 없지만 물처럼 강한 것도 없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상기할 수 있겠다.

지금 고 신영복 선생처럼 사물의 가르침, 즉 노자의 ‘상선약수’를 삶의 신조로 삼는 이들이 많다. 물처럼 부드럽고,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가르침인가. 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라면 ‘물의 가르침’을 곱씹어라. 물은 물론 순리에 따라 흐른다. 그러나 지도자가 물의 소통을 막는다면 둑이 터지고, 거센 풍랑에 천하를 잃는다. 노자, 공자, 순자가 전하는 물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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