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책’ 열 권... ‘공정·페미니즘·과학’, 일상이 멈추고 깊어진 생각의 시간

2020.12.25 11:36 입력 2020.12.25 20:56 수정 선명수·배문규 기자

2020년 올해의 책. 이상훈 선임기자

코로나19로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치열한 방역 현장에서, 삶을 지탱하려 애쓰는 일터에서, 도움을 뻗는 연대의 손길에서 희망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책은 우리가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가장 큰 신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책의 ‘쓸모’를 귀하게 여긴 독자들 덕분에 올해 책 판매가 예년보다 크게 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2020년을 떠올리는 단초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올해 경향신문 ‘책과삶’ 등을 통해 소개한 책 중 10권을 골라봤습니다. 책을 통해 오늘 한국 사회의 화두를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해외 석학부터 국내 저자들까지 공정과 불평등을 진단한 책들이 주목받았습니다. 한국 사회 중심 의제로 부상한 페미니즘과 퀴어에 관한 책들과 더불어 장애를 사유하는 책들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과학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SF소설은 한국문학의 확고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탈리아 소설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 이 역병의 시기를 “정상적인 일상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생각의 시간’으로” 활용하자고 말합니다.

“날 수를 세면서, 슬기로운 마음을 얻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

그 옆에는 읽는 기쁨을 주고, 마음을 위로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들이 있을 것입니다.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지음 | 봄알람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싸움의 기록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2018년 3월5일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2019년 9월9일 대법원의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 544일간의 기록이다. ‘미투’ 이후 삶의 기록인 동시에 노동자 김지은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왜 가만히 있었냐”고 “좋아했던 것 아니냐”는 수많은 질문을 세상으로부터 받았다. 터무니없는 위증, 비방과 손가락질이 이어졌다.

지난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으로 사회적 파장이 일었을 때 무수한 ‘김지은들’은 이 책을 서로에게 선물하고, 함께 읽음으로써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에 연대하며 항의했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가해를 멈추지 않는 이들과 무엇이 성추행인지 인식조차 못하는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

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아직은 늦지 않았다, 다른 미래가 있다”

1980년 출간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우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 <코스모스>의 ‘정통’ 후속작이라 할 만하다. 칼 세이건과 함께 글을 쓰며 다큐멘터리를 만든 그의 부인 앤 드루얀이 최신 과학성과를 반영해 썼다.

‘코스모스’에 대한 탐구로부터 인간 존재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책의 묵직한 메시지도 여전하고, 우주의 경이와 신비 역시 가득하다.

하지만 불안한 기운이 깔려있다. 기후변화와 핵 재앙 등 직면한 위기를 애써 외면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다. 드루얀은 과학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면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역설한다. “아직은 너무 늦지 않았다. 다른 미래, 다른 가능한 세계가 있다.” 광대한 우주 속 스스로를 겸허히 성찰하게 한다.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지음·안준범 옮김·이정우 해제 | 문학동네

불평등은 해소될 수 있을까

<21세기 자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논의를 촉발한 토마 피케티의 신작이다. 21세기 전 세계가 당면한 한층 심화된 불평등의 근원을 정치·사회·경제적 역사 자료와 통계들을 통해 살펴보고, ‘더 정의로운 미래사회’를 향한 대안을 제시한다.

책에선 ‘소유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역사 속 다양한 사회를 종횡하며, 경제학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요인을 중심으로 불평등 문제를 살펴본다.

한국의 ‘강남 좌파’를 떠올리게 하는 ‘브라만 좌파’와 보수적인 자산가를 의미하는 ‘상인 우파’라는 엘리트 집단에 대한 분석으로 주목받았다. 부의 대물림을 제한하는 누진세 도입 등 다양한 제안을 통해 불평등한 현실을 넘어서는 기획을 시도한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능력주의 허구를 파헤친 ‘샌델의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2010년 한국 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은 8년 만의 신작에서 ‘능력주의’를 파헤친다. 능력주의는 개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공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샌델은 ‘노력한 대로 받는다’는 능력주의 이상이 허구라고, ‘공정함은 곧 정의’라는 통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가혹한 현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에선 미국 좌파 엘리트들의 능력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며, 사람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노동을 통한 사회적 기여로 공동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논의를 다시금 촉발했다.

뉴턴의 아틀리에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예술가와 과학자가 만났다, 생각이 폭발했다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는 과학자와 물리학회를 쫓아다니는 디자이너가 만났다. 근대 과학의 선구자 ‘뉴턴’과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아틀리에’가 결합된 지면에서 두 저자는 ‘이야기’ ‘유머’ 등 26개 키워드를 놓고 서로 다른 영역을 잇는 다양한 생각들을 펼쳐낸다. 무엇보다도 “관계 맺고 소통하기”를 지향한다.

과학과 예술의 발전은 무관하지 않다. 유씨는 모더니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경구 “적을수록 낫다(Less is more)”를 통해 인간 감각의 여러 측면을 통찰하고, 김씨는 수학 정규분포 개념을 민주주의 문제로 확장하기도 한다. 창의력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소통들이다.

비슷한 듯 다른 목소리로,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가는 두 사람의 생각을 담아낸 책 편집도 탁월하다.

제국의 브로커들
우치다 준 지음·한승동 옮김 | 길

경계인 자리에서 일본의 민낯을 들여다보다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재조(在朝) 일본인의 역사를 ‘정착민 식민주의’라는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일제 식민통치는 조선총독부라는 강압적 권력에 핍박받는 조선 민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되어왔다. 저자는 식민권력의 대리인이나 앞잡이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제국 통치에 저항하고 조선인과 협력한 일본인 정착민의 다층적 모습에 주목한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아니었던 경계인의 경험을 통해 “제국의 가장자리와 틈새를 들여다”보게 한다.

100만명에 달했던 이들은 일제 패망과 함께 역사에서도 사라진다. 저자는 역사에서 지워져버린 이들 존재가 일본의 기억상실 악순환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 의미있는 연구서다.

가난의 문법
소준철 지음 | 푸른숲

‘45년생 윤영자’의 가난 밀착 보고서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여성 도시 노인의 생애사를 통해 한국 사회 가난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가상의 ‘윤영자’라는 여성노인의 생애경로를 해부하며, ‘가난’의 구조를 해부한다. 윤영자의 가난은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와 시대의 변화 과정에 휘말린 결과다. 노인의 소득과 일자리, 경로당과 종교시설 등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 도시에서의 나이듦 등 노인의 삶을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책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45년생 윤영자>가 될 것 같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사회과학 연구서를 떠올리게 했다면, <가난의 문법>은 사회과학 연구에 서사를 병치해 도시 말단의 ‘가난’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세세하게 인식하고, 해결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제안을 담았다.

연년세세
황정은 지음 | 창비

고난과 피로에도 이어지는 삶, 그 찬란한 역설

2019년 <디디의 우산>에 이어 2020년에도 황정은의 소설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 시대의 비극과 아픔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이를 소설로 써온 황정은이 올해 가을 연작소설 <연년세세>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1946년생 이순일과 그의 두 딸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룬다.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작가는 ‘순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었을 그 이름과 달리 고단했던 그 시대 여성들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 속 ‘순자씨’와 그의 두 딸이 겪은 숱한 고난과 폭력, 피로에도 삶은 ‘연년세세’ 계속된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묵직한 감동이 이어지는 소설이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된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여성 영웅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정세랑이 2020년 ‘가모장’이 중심이 된 ‘여성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시선으로부터,>는 올해 한국문학 최고의 화제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꼿꼿하게 살아남은 여성 ‘심시선’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모계 중심 3대의 이야기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여성에게 유독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모든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와 같은 소설이다. 가부장제의 민낯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부장제를 넘어 어떤 방식으로 연대를 모색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줘 독자들의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출간 6개월 만에 10만부 넘게 팔린 화제작.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 황금가지

‘시녀’들의 투쟁 “당하고만 있지 않아”

여성이 ‘출산 기계’로 전락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마거릿 애트우드의 역작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이다.

34년 만에 발표한 후속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를 일으켰고, 이 작품으로 애트우드는 지난해 자신의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했다. 여성이 철저히 재생산 기계가 된 소설 속 ‘시녀’의 빨간옷과 하얀 보닛은 낙태죄 폐지와 미투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가 재생산 도구인 ‘시녀’들이 만들어지고 착취당하는 과정을 충격적으로 그렸다면, <증언들>은 그로부터 15년 뒤 이야기를 담았다. 여성 세 명의 증언을 교차하며 광기에 휩싸인 독재국가 길리어드의 비밀과 이에 맞서는 여성들의 투쟁을 들려준다. 부커상 최고령 수상자인 애트우드는 여전히 탁월한 필력과 흡인력 있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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