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메타뷰(VIEW) (11)

“맨몸으로 숨 참으며…고래와 친해져야 촬영 가능하죠”

2022.05.22 08:30 입력 박주연 기자

30년간 혹등고래 찍어온 장남원 사진작가

장남원 사진작가가 지난 5월 17일 미디어 아트전 ‘나는 고래’가 열리고 있는 서울 잠실 롯데월드 서울 스카이 지하 2층 전시실에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장 작가 뒤로 바닷속을 유영하는 어미 혹등고래와 새끼 혹등고래를 찍은 그의 사진작품이 전시돼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푸~~~욱하고 힘차게 내뿜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혹등고래 한마리가 물 위로 솟구친다. 나는 반사적으로 재빠르게 카메라를 잡아들었다. 그러곤 조용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대로 어미는 작은 새끼를 데리고 서서히 유영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두려워서인가 너무 좋아서인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등고래는 어린 새끼와 같이 있을 때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나는 고래와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알고 옆으로 길을 터주며 고래의 좌측으로 바짝 붙였다.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어미와 새끼는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진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다.”(사진작가 장남원)

수염고랫과에 속하는 혹등고래는 남태평양과 대서양에 분포돼 있다. 성체는 몸길이 12~16m, 체중은 30~40t에 달한다. 머리와 턱에 혹들이 있으며, 가슴지느러미가 상당히 길어 몸길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어미 고래는 남태평양에서 새끼를 낳고 4개월 동안 굶은 채 자신의 지방을 태워 젖을 먹인다. 이후 남극으로 향하는데 몸이 찢기는 한이 있어도 포악한 범고래들로부터 새끼고래를 보호한다.

장남원 사진작가(72)는 지난 30년간 혹등고래를 촬영해왔다. 국내 사진작가 중 유일하다. 공기통 없이 맨몸으로 방수 카메라 하나 들고 10m 수심까지 내려가 촬영한다. 주로 14-24㎜ 광각렌즈를 사용한다. 바닷속 광활함과 혹등고래의 장엄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흑백사진이다. 본격적으로 고래 촬영에 나서기 전까지는 중앙일보 사진기자로 근무했다. 자신의 별명으로 상호를 지은 서울 충정로 맛집 ‘고릴라’ 주인이기도 하다.

지난 5월 17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 서울스카이에서 장남원 작가를 만났다. 이곳 지하 2층 전시실에서는 서울스카이 5주년 특별전으로 장 작가의 미디어 아트전 ‘나는 고래’(8월 21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오랜 세월 바닷속에서 다져진 몸이어서인지, 7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해 보였다. 그는 “코로나19로 잠시 멈춰선 고래 촬영을 내년 2월에 재개한다”고 말했다.

장남원 사진작가의 수중 카메라 / 우철훈 선임기자

“1992년 오키나와 자마미섬에서 처음 본 혹등고래
서울로 돌아오는데 고래 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죠”

-어쩌다 혹등고래를 찍게 됐나요.

“1992년 아시아나항공이 오키나와에 첫 취항할 때였어요. 취재차 오키나와 바닷속을 촬영하러 갔죠. 그런데 배 주인이 고래 보러 자마미 섬에 가지 않겠냐는 거예요. 자마미 섬에서 한 30~40분 큰바다로 나가니까 진짜 혹등고래가 있더라고요. 내 눈앞에서 몸을 뒤척이는 고래를 보니까 되게 무서웠어요. 물속에선 사물이 4배 확대돼 보이거든요. 여섯 컷을 찍었어요. 그 순간 얘가 나를 보더니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서울로 돌아오는데 나를 보던 고래의 작은 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다시 만나고 싶었죠.”

-당시는 중앙일보 사진기자였지요.

“그랬죠. 1977년 중앙일보에 수습기자로 들어가 1997년 그만뒀으니까요.”

-고래를 다시 만난 건 언제였나요.

“1999년 5월 바하마에 가서 야생 돌고래를 찍고 있는데, 같이 간 일본 산케이신문 전 사진기자가 통가에 고래를 찍으러 간다는 거예요. 그 친구는 고래 사진을 찍으려고 회사를 그만뒀어요. 같은해 7월에 같이 통가로 가서 혹등고래를 촬영했어요. 배 갑판에 귀를 가만히 대고 있으면 바닷속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려요. 멀리 있는 건 작게, 가까이 있는 건 크게….”

Humpback Whale ⓒ 장남원

“고래 사진의 하이라이트는 어미와 새끼가 함께 있는 장면
새끼 고래가 사람에게 다가가면 어미가 품으로 감싸…모성애 지극”

-혹등고래를 보거나 그 울음소리를 들을 때 어떤 감정이 드나요.

“고래 사진의 하이라이트는 어미 고래와 새끼 고래가 함께 있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나는 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친근하면서도 참 슬픈 감정이 들어요.”

-왜요.

“통가에서 새끼를 낳고 4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기 지방을 태워 새끼에게 젖을 먹이거든요. 새끼를 낳고 키우는 그곳 바다는 너무 맑아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미는 점점 홀쭉해지고 새끼는 뚱뚱해지죠. 4개월 후 어미 고래는 새끼를 데리고 남극을 향해 6500㎞를 헤엄쳐 가요. 가는 동안 새끼 고래를 먹으려는 포악한 범고래와 뱀상어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온몸으로, 자기 몸이 찢겨가며 막아내죠. 그런데 그런 장애물을 다 피해 남극에 도착하면 뭐가 기다리는 줄 알아요?”

-짐작이 안 되는데요.

“일본 포경선이 딱 버티고 있어요. 불법인데도 잡더라고요. 그래서 바닷속에서 새끼를 열심히 키우는 고래를 보면 슬퍼요. 머지않은 미래에 어떤 위기가 닥칠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은 사람이 문제네요.

“새끼는 고래나 사람이나 천방지축이에요. 사람이 다가오면 어미 고래가 그럴 거 아니에요. ‘야야, 사람 온다. 조심해라.’ 새끼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에게 막 다가와요. 카메라도 신기한지 들여다보고…. 그럴 때마다 어미가 새끼를 자기 품 안으로 얼른 감싸요. 모성애가 지극해요. 감동적이죠.”

비교적 수심이 낮고 수온이 높은 까닭에 매년 7월부터 10월까지 남태평양 적도 부근 섬나라 통가에는 혹등고래들이 몰려든다. 이곳에서 새끼를 낳고 키운 뒤 남극으로 내려간다. 전 세계 수중사진 전문가들이 이 시기 고래를 찍으러 모여든다. 어미 고래가 새끼를 감싸고 유영하는 장 작가의 흑백사진에는 유독 따뜻한 기운이 넘실댄다.

Humpback Whale ⓒ 장남원

컬러사진은 처음 볼 때는 좋지만 색 변하고 금방 싫증 나
흑백사진은 오래 지나도 큰 변함 없고 깊은 느낌이 있죠”

-지난 1월 통가에서 해저 화산폭발이 일어나 큰 피해가 발생했어요.

“서식지가 사라졌으니 올해는 새끼를 낳고 키울 다른 곳을 찾고 있을 거예요.”

-고래 사진을 찍을 때는 공기통을 안 메고 10m 수심까지 들어간다고요.

“공기통을 사용해 부르르륵 소리가 나면 고래가 도망간다고 해서 사용하지 못하게 돼 있어요. 공기통을 사용하려면 통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해요.”

-그럼 어떻게 찍나요.

“맨몸으로 숨 참고 찍는 거죠. 그러니 1분 남짓 동안 찍고 나와야 해요.”

-수영 실력이 좋아야겠군요.

“나는 어려서부터 물을 좋아했어요. 군대도 해군으로 다녀왔고요. 한강 정도는 수영으로 쉽게 오갈 수 있어요.”

-왜 혹등고래만 찍습니까.

“향유고래 등 다른 고래들에 비해 접근성이 쉬우니까요.”

-위험하지는 않나요.

“위험하지 않아요. 혹등고래가 착하니까요. 혹등고래를 찍으려면 꼬리 쪽으로 살살 접근한 후 눈을 마주쳐요.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면 고래가 나를 쓱 보고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요. 그럼 나는 다시 배를 타고 가죠. 그러다 걔가 저쪽에 나와 있으면 또 뒤에서부터 접근하죠. 그렇게 두 번 눈을 마주치고 나면 세 번째부터는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대부분 흑백사진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컬러로 찍어 흑백으로 만드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컬러사진은 처음 볼 때는 좋아요. 그런데 내일 보고, 모레 보면 금방 싫증이 나요. 색이 점점 변하고. 반면 흑백사진은 오래 지나도 큰 변함이 없어요. 깊은 느낌이 있죠.”

-고래 촬영을 위해 해외로 나갈 때마다 비용 부담도 크겠어요.

“한 번 나가면 20일 정도 걸리는데, 1000만원 정도 들어요. 2010년부터는 방송국 의뢰로 가는 경우가 많아 부담이 줄었어요.”

그는 1950년 평안남도 유복한 집안의 5남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서울대에 재학하던 아버지는 6·25전쟁 발발 후 1·4 후퇴 때 북쪽의 아내와 일곱 자식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제주도를 거쳐 서울에 정착했다. 서울에서도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형 둘(장종원·장인원)은 국가대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사진은 언제부터 한 건가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습니까.

“아니에요. 저는 공대 출신이에요. 서울대 공대에 지원했는데 면접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과감하게 떨어졌어요(웃음). 공부한다고 각성제 ‘아나뽕’을 한알 두알 늘려먹다가 면접 전날 따뜻한 연탄불 방에서 친구와 소주 한잔 나눠 마시고 잠들었는데 긴장이 풀렸나봐요. 둘 다 낙심해 죽겠다며 그날 저녁 한강에 갔어요. 그런데 다리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한강이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게 빠지면 진짜 죽겠다 싶더라고요. 그 길로 돌아왔죠. 당시엔 후기였던 한양공대 기계과에 들어갔어요.”

Humpback Whale ⓒ 장남원

공대 졸업 후 기업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신문사 입사
소말리아 내전·르완다 내전·걸프전 종군기자로 참여

-공대 출신이 어쩌다 신문사 사진기자가 됐나요.

“대학 졸업 후 기업에 들어가서 2년쯤 일하다 그만두고 신문사에 들어갔어요. 사진기자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저는 시험을 봐서 한 번에 붙은 적이 없는데 그때는 한 번에 붙었어요. 그런데 일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허구한 날 부장으로부터 ‘이 머리 나쁜 놈아, 사진은 머리로 찍는 거야’ 하며 타박을 들었어요. 나는 도저히 사진에 자질이 없는 놈인가보다 싶어 사표도 여러 번 냈어요. 그런데 부장이 내가 미워서였는지, 예뻐서였는지 모르겠는데 남들 못한 일을 많이 하게 해줬어요.”

-예를 들면 어떤?

“1993년 소말리아 내전을 시작으로, 르완다 내전, 걸프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했어요. 르완다 출장 명령은 내가 제주 서귀포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여관에 돌아가니 서울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왔다고 해요.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르완다에 가야 하니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빨리 올라오라’는 거예요. ‘제가 거길 왜 가요?’ 했더니 ‘야, 아프리카 길 아는 사람 너밖에 없어!’라고 해요. 내가 무슨 아프리카 길을 알아…. 하여튼 보따리 싸가지고 올라오는데, 르완다 가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말리아 내전을 겪었기 때문에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까요.”

-종군기자는 보통 희망자를 보내지 않나요.

“걸프전 때는 부장이 ‘종군기자 해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내 책상 밑에 이름 써서 넣어둬’라고 했어요. 아무도 안 냈어요. 그때 내가 사진부 수석이었는데 부장과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누가 꼭 가야 한다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부장은 ‘야, 네가 왜 가! 기다려봐!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심 안도했죠. 그런데 회의 때문에 먼저 식사자리에서 일어난 부장보다 늦게 편집국으로 올라왔는데, 저쪽에서 편집부장이 큰소리로 ‘야, 릴라야. 역시 너인 줄 알았어. 네가 간다며? 부장이 네가 간다고 했어’ 하는 거예요(웃음).”

-릴라가 뭔가요.

“고릴라가 내 별명이었어요. 그때 체중이 100㎏이 넘었거든요(그의 신장은 178㎝다).”

-수중사진은 언제부터 찍은 건가요.

“1979년부터요. 입사해보니 중앙일보 필름뱅크에 선배들이 찍은 수중사진들이 많더라고요. 강원도 속초, 고성 등지에서 촬영한 거였어요. 그걸 암실에서 현상하고 인화해 여름스케치로 신문에 싣더라고요. ‘내 길은 이거(수중촬영)다’ 싶었어요. 즉시 스쿠버다이빙을 배웠죠. 같이 배운 직장인 7~9명과 매주 토요일 밤에 속초 등지로 가서 스쿠버다이빙을 했어요. 물론 저는 수중촬영을 했고요.”

-잘 되던가요.

“아뇨. 처음엔 쉽지 않았죠. 바닷속에서 카메라 잡고 중심 잡기조차 힘들었으니까요. 수중촬영 기법은 선배들이 찍은 필름을 보고 또 외국 사진잡지를 보며 독학했어요. 그런데 외국 작가들이 수중사진을 어떻게 찍었나 봤더니, 그들이 사용한 장비가 중앙일보에 다 있더라고요. 가장 기본은 광각렌즈로 가깝게 붙어 촬영하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광각렌즈는 크기가 큰 사물에 아주 가깝게 붙어도 화각이 넓으니까 좁은 공간에서도 넓게 찍을 수 있거든요. 한국에서 수중촬영할 때 16㎜ 광각(와이드)렌즈를 처음 사용한 게 저예요.”

고래 사진가 장남원 / 우철훈 선임기자

멕시코 유탄반도에 세노테 찍으러 갔다 패혈증 걸리기도
현재 심장에 기계 판막 달고 있지만 건강 상태 좋아
“내년 스리랑카나 도미니카에 향유고래 찍으러 갈 것”

-언제부터 직접 촬영한 수중사진이 신문에 게재됐습니까.

“1년쯤 열심히 하고 나서예요. 선배들은 내가 사비 털고 휴일 반납하며 연습한 건데, 놀러다니는 줄 알고 야단쳤어요(웃음). 신문에 실은 첫 사진은 별것 아니었어요. 지천에 깔린 산호 같은 것 찍은 거니까(웃음). 그때는 컬러사진이 없어 전부 흑백사진이었어요.”

당시는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인 필름카메라 시대다. 가장 긴 필름이 36컷짜리였다. 물속에서 필름을 갈아끼울 수 없으니, 딱 그만큼만 촬영하고 나와야 한다. 암실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쳐야 해 촬영한 자리에서 사진이 잘 찍혔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그는 “현상소에 가서 받은 사진이 마음에 안 들면 또다시 가서 찍었다”고 회상했다. <물속엔 물고기만 사나>(1994), <나는 수중사진을 한다>(2005) 등 수중촬영 관련 서적도 2권 펴냈다.

-마흔일곱 살이던 1997년 사진기자를 그만둔 건 고래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였을 때였는데,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발전이 없는 것 같았어요. 아내한테도 말 안 한 채 무작정 사표 쓰고 대책없이 1년 6개월간 하와이 등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다니며 스쿠버다이빙을 했어요. 카메라는 아예 안 들고 갔어요. 다시는 사진을 안 찍으려 했거든요. 그렇게 놀다 돌아와보니 퇴직금이 나왔더라고요. 그걸로 뭘 할까 하다가 내가 술을 워낙 좋아하고, 한국인들은 된장찌개를 질리지 않게 먹으니 대폿집을 차리자, 한 거죠.”

1999년 1월 중앙일보 인근에 돼지고기 특수부위 구이집 ‘고릴라’를 냈다. 수개월 동안 직접 앞치마 두르고 숯을 피웠다.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마음을 바꿔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이때부터 수중촬영만 했다. 바하마, 통가 등 여러 곳을 다녔다. ‘고릴라’는 원래 있던 자리가 재개발되면서 2~3년 후 충정로로 옮겼다. 처음 오픈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매출이 똑같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수중촬영을 하면서 위기를 겪은 적은 없나요.

“2013년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 수천개가 있는 수중 동굴인 이른바 세노테를 촬영하러 갔다가 패혈증(미생물에 감염돼 전신에 심각한 염증반응이 나타나는 상태)에 걸렸어요. 비가 많이 와서인지 동굴 안에 쓰레기가 많이 쌓여 있어 며칠 후 다시 갔거든요. 기가 막히게 물이 깨끗해 한두 모금 손으로 떠마셨더니 청량감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후 자꾸 설사를 하고 아픈 거예요. 귀국해 병원에 가니까 심장내과의와 감염내과의 두분이 패혈증이라며 빨리 입원하라고 해요.”

-패혈증이면 발병 후 짧은 시간 내에 사망할 수 있는 심각한 병 아닌가요.

“살 수 있는 방법은 빨리 항생제를 투약하는 거예요. 가슴부터 발목까지 절개해 혈관을 타고 감염된 부위들과 고름을 제거했어요. 판막이 손상된 심장에는 기계 판막을 넣고 대장 등 장기 일부도 잘라냈죠. 항생제를 하루에 8병씩 두 달간 맞았는데 세어 보니까 내가 490병을 맞았더라고요. 그때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세상 참 재미있게 살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 여한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일어섰잖아요.”

그는 지금도 석 달에 한 번씩 심장에 이식한 기계 판막 등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가지만 건강하다고 한다. 체력 관리를 위해 매일 2시간씩 자택 겸 사진갤러리가 있는 경기도 양평 양수리에서 뛰고 걷는다. 코로나19로 2년여 쉬었지만, 그는 다시 고래 촬영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내년 2월 스리랑카 또는 도미니카에서 이번엔 향유고래를 찍을 예정”이라고 했다.

원문기사 보기
상단으로 이동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경향신문 뉴스 앱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