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영화·뮤지컬 ‘영웅’ 쌍끌이, 배우 정성화

뮤지컬 배우 정성화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개그맨으로 출발해 뮤지컬 스타로 우뚝 선 그는 지독한 노력을 통해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무대에서 하이힐 신은 채 춤추고 노래하다 무릎 연골이 다 찢어졌어도, 2층 높이에서 졸도해 트라우마가 생겼어도, 그는 “무대에 서는 순간, 설레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뮤지컬 배우 정성화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개그맨으로 출발해 뮤지컬 스타로 우뚝 선 그는 지독한 노력을 통해 정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무대에서 하이힐 신은 채 춤추고 노래하다 무릎 연골이 다 찢어졌어도, 2층 높이에서 졸도해 트라우마가 생겼어도, 그는 “무대에 서는 순간, 설레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14㎏ 감량한 후 영화 촬영 마치고
다시 살 불렸는데 재촬영 제의 와
2㎏ 못 빼 고민하다 설사로 해결

정성화(48)는 지난 15년간 ‘안중근’으로 살았다. 2009년 초연부터 지금까지 창작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이 되어 관객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더구나 현재는 뮤지컬(2월28일까지 LG아트센터)은 물론 그가 주연한 동명 뮤지컬 영화에서도 관객을 만나고 있다. 배우에게는 ‘영광’이자 ‘부담’일 수밖에 없다.

뮤지컬 팬들에게 그는 깊은 내공 연기와 뛰어난 가창력을 겸비한 티켓파워 1위 스타다. <영웅> 외에도 <맨 오브 라만차> <레미제라블> <킹키부츠> 등 굵직한 작품들에서 주역을 맡아 평단과 뮤지컬 팬들의 격찬을 받았다. 더 뮤지컬 어워즈 남우주연상 3관왕 등 수많은 뮤지컬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가 ‘개그맨’ 출신임을 까맣게 잊은 이들도 많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에서 정성화를 만났다. 14㎏이나 감량해 영화에서 홀쭉했던 얼굴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영화 <영웅>에서도 감추지 못해 틈틈이 노출됐던 유머감각은 여전했다.

영화 <영웅>의 한 장면. J ENM 제공

영화 <영웅>의 한 장면. J ENM 제공

- 영화 <영웅>과 뮤지컬 <영웅>이 동시에 관객들을 만나고 있어요. 어떤 기분인가요.

“하하하…. 제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에요. 이렇게까지 집중을 받아본 적은 없거든요. 지상파 TV 메인뉴스를 비롯해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수시로 무대인사 다니고…. 얼떨떨하면서 조금 무섭기도 해요. 영화가 종영되면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그때 좀 허전한 마음이 들까봐서요.”

- 윤제균 감독과는 어떤 인연으로 영화까지 찍었나요.

“윤 감독님이 제작과 각본을 맡은 영화 <댄싱퀸>(2012년)에 조연으로 출연했어요. 영화가 상영 중일 때 뮤지컬 <영웅>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죠. <댄싱퀸> 주연배우였던 황정민 선배님이 윤 감독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그날 같이 소주 한잔하는데 윤 감독님이 ‘공연 보며 엄청 울었다’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감독님은 뮤지컬 <영웅>의 영화화를 생각하고 계셨더라고요.”

- 원래 2020년 개봉할 계획이었다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늦어진 거지요. 그 시기에 재촬영한 장면들이 있다고요.

“마두식(조우진)의 사망 후 안중근 의사가 성당 문을 열고 설원으로 나서면서 노래 ‘영웅’을 부르는 장면을 다시 찍었어요. 또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장부가’를 부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재촬영했고요. 감독님은 설원 장면에서 ‘노래를 부르며 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해보겠다고 했죠. 그런데 눈물은 흐르는데 계속 NG가 났어요. 어느 지점에서 눈물을 흘려야겠다는 제 마음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들통난 거예요. 미치겠더라고요. 14번 촬영 끝에 OK 사인이 났어요. ‘장부가’는 첫 촬영까지 합해 40번은 불렀고요.”

- 그러한 디테일이 뮤지컬과 영화 연기의 차이겠군요.

“맞아요. 분장이 진하고 객석과 무대 사이에 거리가 있는 뮤지컬과 달리, 영화는 관객이 카메라를 통해 바로 코앞에서 제 연기를 지켜보니까요. 그 때문에 감정의 흐름대로 연기하지 않고, 표현을 위한 표현을 하면 바로 들키고 말아요.”

갑작스러운 감량으로 체력 떨어져
뮤지컬 ‘영웅’ 공연하다 졸도까지
최근까지 트라우마 시달리다 극복

- 영화를 위해 체중을 14㎏이나 감량했다던데, 힘들었겠어요.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뭐 먹을까’예요. 그런 제가 살을 빼려니 죽을 힘을 다했어요. 86㎏을 72㎏까지 빼서 2019년 영화 촬영을 마쳤어요. 다시 잘 먹으니까 금세 78㎏이 되고, 1년간 체중이 그렇게 유지됐어요. 그때 감독님이 재촬영하자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74㎏ 이하로는 안 내려가더라고요. 감독님께 CG로 얼굴을 깎아달라고 부탁드려야 하나 고민했죠. 그런 제게 안중근 의사가 오셨어요. 덕분에 이틀 만에 2㎏이 정확히 더 빠졌어요.”

- 그게 무슨 말인가요.

“코로나19 백신을 맞았거든요. 그러자 바로 설사가, 하하하…. 재촬영 직전 이틀간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니까 2㎏이 쑥 빠지더라고요.”

그러나 갑작스러운 감량은 체력 저하와 함께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2019년 여름 뮤지컬 <영웅>을 공연할 때다. 마지막 교수형 장면에서 2층 높이 리프트에 올라 ‘장부가’를 열창하다 그는 졸도했다. 때마침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서 스태프들이 그를 들쳐업고 나갔다. 관객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졸도 직전 순간적으로 앞에 있는 올가미를 잡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최근까지 “해당 장면을 무대에서 연기할 때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며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 지금은 어떤가요.

“원인을 알기 위해 혼자 연구를 많이 했어요. 소리를 낼 때 너무 센 압력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어요. 그 압력을 어떻게 분배해서 내야 할지 연습하고 레슨도 받았어요. 다행히 요즘은 트라우마에서 많이 벗어났어요.”

뮤지컬 <영웅>

뮤지컬 <영웅>

- 2009년 뮤지컬 <영웅> 공연을 앞두고 안중근 의사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알아요. 중국 다롄(大連)과 하얼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도 다녀왔고요.

“오디션 합격 이틀 후 윤호진 예술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함께 현지 답사를 떠났어요. 안 의사가 머문 뤼순감옥 독방에서 나와 처형대로 가는 작은 언덕길을 걷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이분의 삶을 함부로 연기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귀국 후 안 의사가 옥중에서 직접 기술한 <안응칠 역사>와 미완의 <동양평화론>은 물론, 이문열 작가의 <불멸> 등 안 의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읽었어요. 특히 안중근기념관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정성화는 1975년 서울 왕십리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으로 이사했다. 그는 “학교생활기록부에 ‘교우관계가 원만하나 다소 산만함’이라고 써 있던 게 기억난다”며 웃었다.

- 예상대로 명랑소년이었군요.

“하하하…. 오락부장은 늘 제 몫이었어요. 중학생 때 수학여행에서 선생님 흉내를 내서 메가히트를 쳤어요. 그날로 학교 스타가 됐죠. 고등학생일 때는 학교 축제 때마다 사회를 도맡았고요. 옆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 반 선생님이 분위기를 띄우려 저를 데려갔을 정도예요. 고3 때 교장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네가 예능인으로 활약해 학교를 빛내주면 좋겠는데 너는 그런 꿈이 있느냐, 있다면 장학금을 지원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 뭐라고 답했습니까.

“당연히 감사하다고 했죠. 제 꿈은 개그맨이 되는 거였거든요. 친구들을 웃게 하는 게 좋았고 그러면서 저도 행복했으니까요. 당시 가장 유명했던 연기학원이 서울의 MTM이었어요. 월 60만원이나 되는 수강료를 학교에서 지원해줘 인천에서 전철 타고 서울로 학원을 다녔어요.”

-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나요.

“초등학생일 때 동요를 좋아했어요. MBC <창작동요제>에 나온 동요들을 녹음해 매일 들었어요. 제가 노래를 잘하는 것을 처음 인지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컴퓨터학원에서 선생님이 벌로 노래를 부르게 해 동요 ‘노을’을 불렀는데, 제가 들어도 잘 불렀거든요. 어려서부터 교회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했어요.”

- 서울예대 연극과 93학번이지요. 라미란, 김수로, 이종혁 등이 동기고요.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가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개그서클’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고3 때 SBS 개그그룹 ‘틴틴파이브’가 굉장히 인기 있었는데, 표인봉, 홍록기 선배 등 멤버들이 모두 개그서클 출신이었거든요. 입학하자마자 오디션을 보고 1등으로 개그서클에 들어갔어요. 그 기수의 회장도 맡았고요.”

개그맨으로 출발해 뮤지컬 스타
‘맨 오브 라만차’ 첫날 공연서
관객들 기립박수에 눈물 쏟아져

- 대학 1학년 때 SBS 3기 개그맨으로 합격했더군요.

“개그서클 출신으로 당시 SBS에서 활약하던 신동엽 선배가 우리 기수가 만든 개그서클 공연을 보고 가셨어요. 얼마 후 제 삐삐(무선호출기)에 모르는 번호가 떴길래 전화했더니 저의 우상이었던 신동엽 선배였어요. 깜짝 놀랐죠. 홍대 인근에서 만나 밤새 같이 소주를 마셨어요. 그날 선배가 ‘SBS에 와서 활약을 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어요. 그 길로 FD(방송연출 보조원)로 일하다 공채를 준비했어요. 자동차 마임 연기로 합격했어요.”

- 하지만 개그맨으로는 빛을 보지 못했어요. 1994년 틴틴파이브에도 잠시 들어갔지만, 주목받지 못했고요. 그래서 서둘러 군입대를 한 건가요.

“어차피 군대는 가야 하니까요. 강원도 양구 21사단 GOP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어요. 괜히 까불면 혼나니까 조신하게 1년 정도 지냈을 때였어요. 문선대가 저희 부대에 와서 공연했어요. 그런데 사회자가 학교 동기였어요. 그 친구는 제가 군에 있는 것을 몰랐다고 해요. 그가 참모에게 ‘정성화란 놈이 있는데, 왜 문선대에 안 데려오냐’고 해서 문선대에 파견됐어요.”

- 거기서 뭘 했습니까.

“제대한 친구의 후임으로 제가 공연 사회를 봤어요. 쉬운 일은 아니에요. 트럭이 들어갈 수 없는 산악지대에 있는 GOP가 많다보니 무거운 스피커를 등에 지고 올라가 장비 설치까지 해야 했거든요. 끝나면 완전히 파김치가 되는데, 하루에 두세 곳을 다니기도 했어요. 하지만 얻은 게 엄청 많아요.”

- 뭔가요.

“시간이 지나니까 장병들 얼굴만 봐도 분위기 파악이 금세 되더라고요. 그때마다 멘트를 달리해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어요. 무엇보다 부대에서 트러블메이커가 누구인지 직관적으로 알게 됐어요. 그 사람만 집중 공략하면 모두가 즐거워했어요. 또 문선대는 공연을 하지 않는 시즌이 있어요. 그때는 군악대 일을 했어요. 휴가 나간 나팔수나 트롬본 연주병 대신 제가 제식에 맞춰 연주를 했죠.”

- 각종 악기를 다 연주할 줄 안다고요.

“아뇨. 손가락과 양 볼 등 얼굴 표정으로 부는 척만 하는 거죠. 거기서 음악성을 많이 키웠어요. 하하하….”

군 제대 후 그는 SBS 드라마 <카이스트>(1999~2000년)에서 사고뭉치 석사과정생 정만수를 연기해 큰 사랑을 받았다. CF도 여러 편 찍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카이스트> 이후 시트콤도 세 편 정도 했는데, 그게 다 끝나자 거짓말처럼 일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땅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 이유가 뭐였을까요.

“세상은 냉정해요. 부단한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요. 저는 늘 같은 연기만 보여줬던 거예요. 일이 모두 끊겨 돈도 떨어진 상황에서 아는 형님이 운영하는 바에서 1년간 바텐더로 일했어요. 하지만 도저히 생활이 안 돼 인천 본가로 들어갔죠.”

위기는 마음가짐을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전화위복이 됐다. 어느 날 표인봉이 전화했다. 그는 정성화에게 대학로에 공연장을 열었다며 2인극 <아일랜드>에 출연하라고 제안했다. 그를 눈여겨본 이 연극의 제작자인 설도윤 당시 설앤컴퍼니 대표가 2004년 코미디 뮤지컬 <아이 러브 유>에 그를 캐스팅했다. 자신의 강점인 코미디를 매개로 뮤지컬과 성공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당시 함께 주역을 맡은 배우는 1세대 뮤지컬 스타 남경주다. 정성화는 남경주의 조언으로 멜리사 브루더의 <배우 수첩>, 우타 하겐의 <산연기> 등을 교재 삼아 연기공부를 본격적으로 했다. 이후 <올슉업>을 거쳐 당시 최고의 뮤지컬 스타인 조승우와 함께 2007년 <맨 오브 라만차>의 주역(돈키호테)을 당당히 꿰찼다.

- ‘산초’ 역할을 맡아달라고 한 제작자(신춘수 오디뮤지컬 대표)에게 ‘돈키호테’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지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맨 오브 라만차>가 공연될 LG아트센터 인근에 단기로 방을 빌렸어요. 대본을 열심히 분석하고 방바닥에는 오디션이 열릴 공간과 똑같은 크기로 테이프를 붙였어요. 그 안에서 대사를 하고 오디션에서 부를 ‘임파서블 드림(불가능한 꿈)’을 연습하며 치밀하게 계산해둔 동작과 감정 표현을 했죠. 그런데 정작 오디션이 열린 날, 노래를 부르다가 음이탈이 났어요. ‘끝났구나’ 하고 나오려는데, 음악감독님이 ‘지금 긴장한 것 같으니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해봅시다’라고 하셔서 역할을 따냈어요.”

- 노력이 통했군요.

“합격한 후에도 예정된 연습시간보다 항상 두 시간 먼저 가서 돈키호테 갑옷을 입은 채 연습했어요. 단체 연습 후 배우들과 소주를 한잔하는 날에도 어김없이 다시 돌아와 연습했고, 집에서도 멈추지 않았어요. 첫날 공연의 막이 내리고 커튼콜이 이어졌는데, 눈물이 막 쏟아졌어요.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를 쳤거든요. 저로서는 한 번도 겪지 못한 광경이었어요.”

작업실과 일산집 침실 벽마다
확대한 대본 붙여놓고 대사 외워
지독한 노력 통해 정상에 올라

- 지금도 공식적인 연습 외에 따로 연습하는 시간이 많나요.

“그럼요. 서울역 부근에 제 작업실이 있어요. 15평 정도 되는데, 거기서 대사도 외우고 노래 연습도 해요. 큰 거울과 방음 부스도 설치했어요. 또 작업실과 일산 저희 집 침실 벽마다 크게 확대한 대본을 붙여놨어요. 눈만 뜨면 대사를 외우기 위해서죠. 물론 보컬 레슨도 꾸준히 받고요.”

<맨 오브 라만차> 이후 <영웅>을 연기한 그는 이후 <라카지> <레미제라블> <킹키부츠> <레베카> <웃는 남자> <비틀쥬스>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 수많은 명작 뮤지컬에서 주역을 맡아 열연했다.

- <라카지> <킹키부츠>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코미디 장르예요. 여전히 코미디에 욕심이 있습니까.

“엄청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코미디만 한 게 없어요. 아무런 생각 없이 웃는 순간 인간은 정직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코미디 연기가 고생스럽기는 해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수시로 8초 만에 가발과 마스크, 특수분장 의상을 바꿔 착용해야 하고, <킹키부츠>에서는 15㎝ 높이의 하이힐을 신은 채 춤추고 노래해야 해요, <킹키부츠>를 하던 어느 날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 갔더니, 연골이 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무릎에 테이핑하고 무대에 올랐어요. 결국 수술을 받았고요.”

- 그렇게 데미지가 있는데도 그 공연을 계속하고 싶은가요.

“해야죠. 저는 사람들을 웃게 하는 일이 즐거워요.”

2011년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9살 딸과 5살 아들·딸 쌍둥이를 둔 그는 번아웃이 올 때면 ‘진짜 감사한 일이 뭔지’를 생각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렇게 바쁜 삶을, 과거에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돌이켜보고 안도한다는 것이다. 연기 외 취미는 캠핑이라고 했다. 그는 “높은 산이나 유유히 흐르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작은 일에 아등바등하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갑자기 생각난 듯 그는 물었다. “배우는 뭘 먹고 사는지 아느냐”고. 그러고는 자답했다. “배우는 관심을 먹고 산다. 관심이 계속되는 한 배우는 행복하다”고. 그래서 자신은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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