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모순의 현실, 그 위에 서지 않고서 ‘정치’를 논할 순 없다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보며 든 첫 생각은 이거다. 윤석열은 정말 편하게 대통령이 되었구나. 영화에서 나오듯, 김대중은 정치인이 된 후 죽을 고비,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관권의 노골적인 개입이 있던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를 상대로 선전했으나 낙선한 이후, 그는 박정희의 유신 독재정권에선 암살 목적으로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전두환 정권 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구금, 고문, 강제 망명 등 그의 정치적 상징성을 죽이기 위한 시도는 훨씬 더 많았다. 독재정권 시절에만 핍박받았던 건 아니다.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대선 출마를 하지 않겠다던 김대중의 협상 제안은 전두환 정권의 거부로 결렬되고 무효화되었음에도 이후 그를 비롯한 시민들의 투쟁으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그의 대선 도전에 대해 김영삼을 비롯한 야당 세력은 약속 번복이라 비난했다. 과거 정권에서 씌운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프레임 역시 여전히 강력했다. 영화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6년 만에 광주를 방문해 인파의 환영을 받는 모습에서 끝나지만, 역사가 알려주듯 그는 그때도 그다음에도 낙선하고 정계 은퇴까지 했다가 다시 돌아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야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를 비난하던 이들은 ‘대통령병’이란 말로 그의 대권 도전을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 오랜 정치적 투쟁의 시간을 단지 대통령이라는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 환원하는 것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평가로서 온당치 못하며, 무엇보다 <길위에 김대중>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오독이다. 영화는 당장 제목에서부터 목적지가 아닌 ‘길’을 강조한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편히 당선됐다고 했지만, 단순히 고난을 겪었느냐 겪지 않았느냐는 비교를 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길의 유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걸어야 하는 길, 민중과 직접 만나 호흡할 수 있는 길, 지나온 발자국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길.
영화는 남해 작은 섬 하의도의 아이던 자신이 임금이 되고 싶었다던 김대중의 육성으로 시작된다. 분명 김대중은 자신의 정치적 꿈과 신념, 야망을 실현할 위치로서의 대통령을 욕망했다. 그만큼 정치로 이루고픈 세계의 청사진도 뚜렷했다. 현실 정치에서 개혁 의지와 권력 욕망을 분리해 말하는 건, 사기거나 몽상이다. <길위에 김대중>은 시기적으로 두 개념 사이 갈등이 심해지는 1987년 이후의 김대중에 대해선 다루지 않지만, 적어도 꼿꼿한 민주화 투사로서의 그와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그를 함께 그려낸다. 특히 영화 내레이션(배우 장현성)에서 당의 장외투쟁에 동조하지 않던 일에 대해 “그는 의회주의자였다”고 콕 집어 규정하는 순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제목은 <길위에 김대중>이지만 그는 처음부터 길 위를 선호했던 정치인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실제로 영화는 당내 비주류에서 40대 나이에 제1야당의 대선 후보가 될 정도로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근접했던 김대중이 그를 실제로도 정치적으로도 살해하려 했던 독재정권 때문에 계속해서 정치 주변부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소위 재야의 거두가 되는 과정으로 그의 정치 인생을 재구성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고 배척될수록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김대중의 정치적 상징성은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김대중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 신군부 정권에도 딜레마였지만, 정당한 정치권력을 얻고 싶었던 김대중에게도 딜레마였다. 민주화를 이루는 길, 청와대로 가는 길, 정치적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제각각 뻗어 있었다. 어디로,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군사정권의 위협과 핍박 속 장외로 밀려난 ‘의회주의자’의 꿈
투쟁 방향부터 외교까지, 현실과 신념 사이 갈등하며 ‘길’ 닦아
정치 지도자가 ‘불편’ 감수 않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있나
비판자 입 막고 설득·타협 않는 윤 대통령 행보는 전체주의적
만약 <길위에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까지의 김대중의 삶을 오롯이 신념 하나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 투사의 외길로만 묘사했다면 상당히 뻔하고 따분한 프로파간다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한·일 외교에 대한 야당의 무조건적인 반대 투쟁에 동조하는 대신 줄 것을 주고 받을 건 확실히 받아야 한다는 실용주의 외교 노선을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내거나,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대학생들의 가두 투쟁을 만류했던 것처럼 그는 정치적 계산에도 능했다. 물론 계산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가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세 명의 독재자들을 경험해야 했으므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화 <서울의 봄>이 잘 몰랐던 신군부 집권에 대한 역사적 배움의 기회가 된 것처럼 <길위에 김대중> 역시 그런 역할을 할 법한데, 4·19혁명을 통한 이승만의 하야, 10·26을 통한 박정희 암살, 6월 항쟁에 의한 전두환의 직선제 개헌 과정을 보노라면 현재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얼마나 기적적으로 획득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서 김대중이든 누구든 한 개인이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단지 시시각각 변하는, 심지어 연이은 독재 체제에서도 독재자의 면면은 바뀌는 변화의 양상 속에서 정치인은 자신의 믿음과 책임윤리, 실천적 제약 안에서 역시 끊임없이 파동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사형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기약 없는 수감 생활을 하던 그는 신군부의 미국 망명 제안과 정치 활동 포기 각서 작성을 거부하지만, 아내의 설득에 결국 타협을 택한다. 신념의 포기일까. 하지만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과 만남, 방송 출연을 통해 신군부에 친화적이던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 노선을 압박했고 상당한 정치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전두환 정권의 암살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의 여러 유력인사들과 함께 한국에 귀국하는 장면은 그의 정치적 쇼맨십 역시 잘 보여준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곳에 있을 수 없었지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은 해내려는 것.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제 길을 걷는다는 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그런 이유로 만약 엔딩 타이틀에서 예고한 대로 후속편이 제작된다면 이번보다 더 흥미로운 작품이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에 복귀하는 과정, 외환위기를 수습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수많은 모순과 정치적 타협을 오가는, 더 역동적으로 흔들리는 길로 그려질 수밖에 없으므로. 만약 이번 다큐가 그저 김대중 개인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것에만 열중했거나, 그의 길을 대통령이라는 목적지까지의 과정으로만 그려냈더라면 품을 수 없는 기대다. 이 다큐멘터리가 김대중 개인에 대한 꼼꼼한 기록물이자 현대사에 대한 좋은 교재이면서 무엇보다 정치철학적인 텍스트인 건 그래서다. 개봉 전부터 <길위에 김대중>은 총선을 앞둔 민주진영의 결집을 위한 목적으로 의심받기도 했지만, 이 영화의 비판적 질문은 따로 있다. 현실의 장애물과 부딪히며 수정되고 우회하고 때론 발에 피물집이 잡혀가며 어렵사리 모순을 봉합해 걷는 길이 아니라면, 그것은 좋은 정치거나 나쁜 정치이기 이전에 정치일 수 있느냐는 것. 좋게 말하면 혜성처럼, 나쁘게 말하면 뜬금없이 보수정당의 대선 후보로 발탁될 때부터 대통령이 된 지금까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현재의 대통령 행보와 비교해보면 더더욱 유효한 질문이다.
국민투표로 선출되어 아직 임기 2년도 안 된 윤석열 정권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다름없는 독재정권이라 한다면 너무 엄살일 것이다. 다만 윤석열 정권은 최근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면전에서 조금 비판적 발언을 했다고 경호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간 것을 비롯해 소위 쌍특검법(김건희 특검법과 대장동 특검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안 등 8개 법안에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고, 심지어 지난 22일엔 생방송 30분 전에 민생토론회 참석을 취소하는 등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모든 것을 치워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대형마트 공휴일 의무휴업을 없애고 단통법을 전면 폐지했다. 이 방향이 옳냐 그르냐는 건 차라리 부차적이다. 어떠한 갈등도 망설임도 타협과 설득도 없는 일방통행이란 길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울퉁불퉁한 현실을 걷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버리는 것에 가까우므로. <길위에 김대중>은 그 전까진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원론을 지니고 있던 김대중이 1987년 대선에 출마해 호남의 기대와 광주의 한을 안고 유세하는 마지막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바로 전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역차별이란 현실의 무게를 안고 힘겹게 걷는 것이 정치다. 그에 반해 윤석열 대통령의 발걸음은 덩치에 비해 얼마나 가벼운가. 분명 윤석열 정권을 기존 독재정권과 비교하는 건 과하다. 다만, 정치 없는 통치란 민주주의를 형해화하며 전체주의로 소급한다. 김대중과 시민들이 피 흘리며 꿈꾼 미래란 적어도 그런 게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