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리플레이
2024.04.18 06:00 입력 2024.04.18 16:56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가부장이 되지 못한 연민이었을까…열린사회와 그 ‘남’들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는 이혼 후 ‘싱글대디’가 된 FT아일랜드 출신 최민환이 아이들과 함께 출연한다. 방송 화면 캡처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는 이혼 후 ‘싱글대디’가 된 FT아일랜드 출신 최민환이 아이들과 함께 출연한다. 방송 화면 캡처

MBC <나 혼자 산다>(이하 <나혼산>)와 이혼남. 조금은 의외인 두 키워드의 조합을 관통하는 흥미로운 두 장면이 단 일주일 사이에 교차했다. 지난 4월12일 <나혼산>에는 배우 안재현이 이혼한 지 약 4년 만에 ‘돌싱’의 자격으로 출연해 근황을 알렸다.

그리고 그 <나혼산> 초창기에 원조 ‘돌싱’으로서 출연자들에게 ‘대부님’으로 불리던 배우 김용건은 늦둥이 아빠의 자격으로 4월18일부터 방영하는 채널A 신규 예능 <아빠는 꽃중년>에 MC로 합류했다. 도식적으로 말해 <나혼산>에 새 이혼남이 등장하자, 과거에 떠났던 이혼남은 이혼남이 아닌 새로운 자격으로 새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단 6일 만에 벌어진 이 두 장면의 교차는 재밌는 우연이지만, 이 두 사례가 등장할 수 있는 공통의 맥락은 존재한다. 이혼남이든 늦둥이 아빠든, 남성은 비교적 쉽게 자신의 위치를 판돈 삼아 방송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

젊은 ‘돌싱’인 안재현의 <나혼산> 출연이 화제를 모으며 나온 여러 기사 중 스포츠서울 ‘김효원의 대중문화수첩’은 흔치 않게 공격적인 논조로 작성되었는데, 해당 기사는 “안재현이 혼자 사는 싱글 남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는 <나혼산>에 출연한 것은 <나혼산> 팬들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며 “안재현은 이혼한 ‘돌싱’들이 출연하는 SBS <신발 벗고 돌싱포맨>(이하 <돌싱포맨>)이 알맞은 포지션이 아닐까”라 질문한다.

비록 프로그램 탄생 훨씬 이전에 이혼했다고는 하지만 ‘돌싱’으로 출연했던 김용건이 있는 만큼 <나혼산>을 꼭 결혼하지 않은 싱글 남녀들의 프로그램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안재현 개인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이혼한 이들의 삶 역시 싱글라이프의 한 형태로 소개하는 것은 혼자여도 괜찮은 삶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는 <나혼산>의 기획의도에도 부합한다.

다양한 삶 선보이는 최근 프로
남성 경우 ‘이혼’남 아닌 이혼‘남’
삶의 방식을 긍정하는 데만 동원
자신 위치 판돈 삼아 방송 출연

싱글맘·돌싱 여성 자리는 없어
관습 탈피해도 혐오는 그대로

MBC <나 혼자 산다>에는 배우 안재현이 ‘돌싱’으로 출연한다. 방송 화면 캡처

MBC <나 혼자 산다>에는 배우 안재현이 ‘돌싱’으로 출연한다. 방송 화면 캡처

하여 기사 내용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의도치 않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안재현에게 어울리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에겐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미리 놓여 있다는 것. 결혼 안 한 싱글들 사이에서 자신의 느긋한 하루를 전시하거나, 중년의 다른 이혼남들 사이에 껴서 서로의 궁상맞음을 과시하거나.

<돌싱포맨>이 유독 이혼남 출연자가 많은 SBS <미운 우리 새끼>(이하 <미우새>)의 스핀오프라는 걸 떠올리면 <미우새>도 선택지가 될 수 있겠다. 실제로 역시 ‘돌싱’인 이동건도 제작진의 2년간 구애 끝에 <미우새>에 근래 출연한 바 있다. 그러니 안재현이 어디에 나와야 했느냐는 질문은 잘못됐다. 왜 남성에게만 이혼이 출연할 선택지를 늘려주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역시 우연이겠지만 지난 4월8일부터는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이하 <슈돌>)에도 이혼 후 ‘싱글대디’가 된 FT아일랜드 출신의 최민환이 아이들과 함께 출연하고 있다. 아이들의 방송 노출에 대한 우려가 있긴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앞으로 더 자주 만날 육아의 여러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섭외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삶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남성의 경우에만 긍정적인 주체로 호명된다는 점이다.

안재현과 최민환에 대해 OSEN에선 ‘“나 다시 혼자 산다” 안재현→최민환 당당한 돌싱 라이프 공개’라는 기사로, 스포츠경향은 ‘돌싱남들의 예능 출연 “혼자서도 잘 살아요”’라는 기사로 소개했지만, 이들의 당당함이 시청자들에게 호의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선 남성이란 지위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가령 최민환은 결혼하고 기혼남의 자격으로 육아를 할 땐 KBS2 <살림하는 남자들>(이하 <살림남>)에 출연하다가 이혼하자 <슈돌>의 멤버가 됐다. ‘돌싱포맨’이든 ‘살림남’이든 ‘슈퍼맨’이든 남성에겐 항상 긍정적인 이름이 준비되어 있다. 핵심은 ‘이혼’남이 아닌 이혼‘남’에 있다. 늦둥이가 생겼지만 재혼도 육아도 하지 않는 김용건이 <아빠는 꽃중년> MC가 될 수 있는 건 그가 이혼남이라서가 아니라 ‘꽃중년 아빠’라는 남성을 위한 또 하나의 구체적 호명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방송의 고질적인 성비 불균형 문제와 분리할 수 없지만, 다른 맥락도 가지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이 표면적으로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혼자여도 살만하거나 조금 궁상맞아도 재밌는 삶을 비추는 <나혼산>과 <미우새>는 적령기에 결혼을 하고 둘이 되어야 한다는 통념에 반하며, 남성을 육아와 살림의 주체로 재현하는 <슈돌>과 <살림남>은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한다는 통념에 반한다. 50세가 넘어 육아를 담당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아빠는 꽃중년>은 결혼적령기와 육아에 대한 통념과 배치되며, 중년 이혼남들끼리 시시덕대는 모습을 담은 <돌싱포맨>은 이혼에 대한 부정적 통념에 도전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 프로그램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핵을 이루는 가부장적 구조에 균열을 내는 대신, 정상성 혹은 전통적 가부장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거나 잃은 남성들을 위무하는 데 애쓴다. 물론 <나혼산>과 <미우새>에 남성만 출연하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파일럿 프로그램 <남자가 혼자 살 때>에서 출발한 <나혼산>에서 위생관념이나 사회성이 부족해도 정서적 보살핌을 받는 건 남성들뿐이며, 역시 남성 출연자만으로 출발했던 <미우새>에서 그나마 희소한 여성 출연자인 모델 한혜진은 늙은 이혼남인 임원희, 이상민에게 젊은 여성 모델 후배들과의 미팅을 주선해주는 역할로 소비되었다. 다양성이란 가치는 오직 남성의 온갖 삶의 방식들을 긍정하는 데만 동원된다.

겉으로만 전복적인 이들 프로그램의 한계는 바로 그 이유로 동시대적이다. 이제 더는 남성들도 가부장의 지위를 딱히 목표하지 않거나 포기하며, 가부장의 권위를 해체하는 것은 남성 중심적 세계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다. 과거엔 가부장으로서 짊어진 무게에 대한 존경을 강요했다면, 이제는 가부장이 되지 못한 남자에 대한 연민이 요청된다.

그 기안84가 걱정할 정도로 <나혼산>에서 안재현이 종일 술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자, 역시 <미우새>에서 몇 년 동안 매일 술을 마셔왔음을 고백한 이동건의 사례와 엮어 ‘이혼→돌싱 술꾼…이동건·안재현 예능 치트키 평행이론’ 같은 기사가 나오는 것처럼. 과거 술독에 빠진 이혼남이라면 응당 실패한 남자로 낙인찍혔겠지만 이제는 그 약점조차 일종의 매력 자원이 된다.

전통적 가부장 모델과 거리가 먼 남성을 더는 실패자로 규정하지 않는 건 긍정적이면서도, 그 반대편에서 JTBC <용감한 솔로 육아-내가 키운다>에서 이동건의 전 아내인 조윤희를 비롯해 여전히 뜨거운 모성애로만 긍정되던 여성 출연자들이 술을 즐기는 모습이 나왔으면 어떤 식으로 여론 화형식을 당했을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최민환의 <슈돌> 출연과 함께 육아를 전담하지 않는 전 아내 율희에게 악플 테러가 쏟아진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단순히 불공평한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으로 누렸어야 할 몫을 가정하고 그 손실분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보편으로 요구될수록, 여성에겐 그만큼 더 많은 감정노동과 어른스러움의 의무가 부과되며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미움은 정당화된다.

가부장의 권위와 가족 모델이 해체된 자리에서도 가부장적 권력 구조와 여성혐오는 고스란히 남는다. 더 많은 여성을 출연시키고, 더 다양한 여성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폭넓은 관용으로 여성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합당한 해법만으로는 부족하다. 남성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몫이 애초에 없다는 정당한 좌절의 경험 없이는.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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