꾼들의세계
2023.12.06 06:01 입력 2023.12.06 06:03 수정 박채영 기자
※금융시장이 커질수록 그 속에 숨어드는 사기꾼도 많아집니다. 조 단위의 주가조작부터 수천억원에 이르는 횡령, 트렌드에 따라 아이템을 바꿔가며 피해자를 속이는 보이스피싱까지. 기발하고 대범한 수법은 때론 혀를 내두르게 만듭니다. ‘꾼들의세계’는 시장에 숨어든 사기꾼들의 수법을 들여다보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해 주세요!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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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만원을 사기당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가 입금했던 대포계좌 명의인을 추적했어요. 대포계좌 명의인은 어떤 주식회사였는데 그 주식회사를 처음 만든 사람을 찾아보니 법무사 사무장이더라고요.”

‘사이버 금융사기 피해복구 및 예방을 위한 시민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최정미씨(53)는 본인도 해외선물 사기 피해자다. 최씨는 2018년 2월부터 8월까지 “입금한 금액의 10배로 투자를 하게 해주겠다”는 가짜 해외선물 거래사이트에 속아 6000만원을 보냈지만 돌려받지 못했다.

수사는 더뎠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최씨는 6000만원의 피해금을 입금했던 대포계좌 명의인을 직접 찾아 나섰다. 대포계좌의 명의인은 ‘주식회사 A’. 설립 목적은 투자와 전혀 상관없는 소프트웨어 개발 및 공급업이었다. 대포계좌를 만들기 위한 유령법인이었다. 그런데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한 차례 소유권이 양도된 이력이 있었다. A사를 처음 만들어 양도한 사람은 김모씨. 주소를 보고 찾아가 보니 서울의 한 법무사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사무장이었다.

보이스피싱, 리딩방사기, 해외선물사기 등 금융범죄를 업으로 삼는 조직에게 유령법인은 필수품이다. 범죄에 필요한 대포통장과 대포폰 모두 명의가 있어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 명의도 괜찮지만 법인명의가 여러모로 편하다. 그렇다면 범죄 조직의 필수품 유령법인은 어디서 올까.

“나한테 사기친 그 유령법인”…시작점 찾아나선 피해자

“A사를 사간 사람이 누군지만 알려주세요.” 최씨는 법무사 사무장 김씨를 찾아가 부탁했다. 최씨가 끈질기게 애원하자 김씨는 “여기 A사 서류도 있는지 찾아보라”며 수천장 분량의 서류뭉치를 건넸다. 아쉽게도 A사 관련 내용은 없었지만, 수천장 분량의 서류 뭉치에는 김씨를 비롯한 3명이 판매한 법인 200여개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김씨 등 3명은 2021년1월부터 2022년2월까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200여개의 주식회사를 설립해 이를 수백명에게 판매했다. 가장 많은 법인을 설립한 2021년 4월27일에는 총 13개의 법인을 만들었는데, 모두 두달 안에 다른 사람에게 양도됐다.

법인을 많이 만들어 양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만들어 판매한 법인이 최씨가 피해금을 입금한 A사처럼 범죄에 이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경향신문은 서류뭉치에 있는 200여개의 법인 중 국내에 동명의 법인이 존재하지 않는 83곳을 추려 조사했다. 83곳 중 72곳이 금융감독원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금감원은 홈페이지에 사기이용계좌 정보를 개시하고 채권소멸절차가 시작됐음을 공고하고 있다. 금감원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는 것은 해당 법인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등에 이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금융감독원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 화면 캡쳐 이미지 크게 보기

금융감독원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 화면 캡쳐

예를 들어 김씨가 만들어 양도한 법인 중 하나인 ‘주식회사 OOOOOO트레이드’는 동명의 법인이 존재하지 않는 법인이다. 금융감독원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에 ‘주식회사 OOOOOO트레이드’를 검색하면 ‘주식회사 OOOOOO트레이드’ 이름으로 만들어진 4개 계좌가 사기 이용 관련 사항이 있음이 나온다.

법인을 판매한 김씨는 법인을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했을 뿐 사기에 이용될 줄은 전혀 몰랐다는 입장이다. 김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법인은 인수합병(M&A)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후에 어떻게 쓰이는지는 몰랐다”며 “법인 관련해서는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 혐의로 이미 재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유령법인, 쉽게 만들어지고 팔리지만 잡기는 쉽지 않다

대포통장 유통책이 유령법인을 직접 만들지않고 법무사를 찾아 법인 설립을 의뢰하거나 이미 만들어진 법인을 사는 일은 흔하다. 법무법인 자산 조새한 변호사는 “대포통장 유통책은 한 번에 여러개의 법인을 사다보니 수수료를 내더라도 법무사를 통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라며 “법무사를 통해서 법인을 만들면 나중에 잡혔을 때 꼬리자르기도 쉬운 장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대포통장 유통책은 유령법인을 만들 때 법무사까지 속이기도 하지만 단골 법무사 사무실을 두기도 한다. 2019년 부산에서는 대포통장 유통책에게 ‘자본금 없이 법인을 설립해달라’는 사람들을 소개받고 유령법인을 만들어준 법무사 사무장 B씨가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신고자의 허위신고로 공무원이 사실이 아닌 것을 기재하게 만드는 것)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B씨는 남편과 아들의 명의로 받은 잔고증명서를 이용하는 등 서류를 위조해 33개의 유령법인을 만들었다.

문제는 양도한 법인이 이용됐다는 것만으로는 사기 가담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조 변호사는 “유령법인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법인을 판매한 사람이 ‘이 법인이 사기에 쓰일줄 몰랐다’고 하면 사기나 사기방조로는 처벌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최씨는 “김씨한테 받아온 서류뭉치를 검찰에도 보내고 경찰에도 보냈는데, 수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유령법인 명의로 만들어진 계좌가 사기에 이용된 것이 발각됐다고 하더라도, 해당 계좌만 정지될 뿐 같은 유령법인의 다른 계좌는 계속 이용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현재 개인 명의 계좌는 사기에 연루되면 그 사람 명의의 다른 계좌도 이용이 제한되지만 법인은 그렇지 않다. 금융범죄 조직이 개인 명의를 빌리기보다 유령법인 만들기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앞서 예를 들었던 ‘주식회사 OOOOOO트레이드’는 2022년 7월에 처음으로 사기 이용 관련 사항이 발생해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가 됐다. 이후 2022년 9월과 2023년 2월, 3월에도 OOOOOO트레이드 명의 계좌에 대한 채권소멸절차 개시 공고가 올라왔다. 2022년 7월에 처음 채권소멸절차 개시공고가 된 이후에도 최소 3차례 이상 OOOOOO트레이드 법인 명의의 다른 계좌가 사기에 이용된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유령법인이 대포계좌 개설에 이용되는 상황은 인지하고 있다”며 “유관기관들이 함꼐 법인 대포계좌 개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고 여러가지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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