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빠르게 성장했던 전기차 시장이 주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른바 ‘캐즘(대중화 전 수요 정체)’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내연기관 차량 대비 높은 가격과 부족한 충전 인프라, 고금리 기조 등이 수요 침체 요인으로 꼽힌다. 캐즘이 길어질 수 있다고 보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전동화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전기차 업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국내 배터리 3사의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업체마다 온도차는 있지만, 올해 성장률이 지난해보다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일치했다.
지난해 배터리 3사 중 유일하게 적자를 낸 SK온 입장에선 뼈 아픈 상황이다. 올해 상반기에도 SK온은 적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금융투자업계는 내다봤다.
배터리 3사 중 가장 늦게 뛰어든 SK온은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면서 차입금도 빠르게 증가했다. 물적 분할이 이뤄졌던 2021년 말, 부채비율은 166.4%, 순차입금의존도는 26.5%로 다소 양호한 수준이었지만 2023년 3분기 말에는 부채비율이 187.5%, 순차입금의존도는 34.9%로 불어났다. 지난해 말에는 부채비율이 190.0%까지 치솟았다.
문제는 합작공장 투자 등으로 빚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회사 측도 “미국·유럽 등 글로벌 생산능력 확대에 필요한 자본적 지출(CAPEX) 규모를 고려하면 차입금 증가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CAPEX는 기업이 생산 설비나 건물, 차량 등의 자산을 사들이거나 개선·확장하는 데 지출하는 비용이다.
SK온이 지난달 공시한 회사채 발행에 따른 투자 설명서를 보면 2022년 4조8712억원이던 CAPEX는 지난해 3분기에는 6조7712억원으로 늘어났다. SK온은 올해에는 이 비용이 7조5000억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포드·현대차와 손 잡은 SK온, 미국 시장에 수 조원 투자
실제 지난달 29일 SK이노베이션은 공시를 통해 자회사의 유상증자 소식을 알렸다. 블루오벌(BlueOval)SK가 시설자금 투자를 위해 6890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증자를 단행했다는 내용이다. 블루오벌SK는 전기차 시장 공략을 위해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와 배터리 회사인 SK온이 손을 잡으면서 탄생한 법인이다. SK온의 미국법인인 SKBA가 지분 절반을, 나머지 절반은 포드사가 보유 중이다.
유상증자는 자본금을 늘리기 위해 기업이 새로 주식을 발행해 기존 주주나 새로운 주주에게 돈을 받고 파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주배정 증자는 ‘기존 주주들에게 지분율대로’ 주식을 배정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풀이하면 SKBA는 새로 발행하는 주식을 지분율대로 받는 것을 조건으로, 블루오벌SK에 6890억원의 자금을 투입하는 셈이다. SKBA는 지난해 12월 말에도 같은 내용으로 9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진행했다.
이번 유상증자로 조달한 금액은 미국 켄터키주 2개 공장과 테네시주 1개 공장을 짓는 데 쓰일 계획이다. 내년부터 차례대로 가동할 예정인 이들 배터리 공장이 모두 완공되면 SK온과 포드는 120기가와트시(GWh)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는 대당 105킬로와트시(㎾h) 배터리가 들어가는 전기차 약 120만대를 매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SK온은 2027년까지 5조1000억원을 미국 배터리 공장 건설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만큼 이 같은 유상증자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SK온은 현대자동차그룹과도 손을 잡고 투자를 진행 중이다. 양사는 오는 2027년까지 6조5000억원을 투자해 전기차 30만대 분량의 배터리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설 투자를 위해 지난 2월 SK온과 현대차의 미국 배터리 합작법인인 HSAGP에너지는 올해 말 납입을 목표로 7367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한다고 공시했다.
이처럼 대규모 증설 투자를 진행하면서 2022년 마이너스(-) 7조원이던 잉여현금흐름은 지난해 –9조원으로 확대됐다. 잉여현금흐름은 설비투자액 등으로 지출하고 남은 돈으로, 이 돈이 부족하면 이자 지급이나 기존 차입금 상환이 어려워진다.
전기차 시장 둔화에 SK이노베이션도 흔들
지금까지 SK온은 재무 안전성이 악화해도 유상증자와 프리IPO(상장 전 지분투자) 유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외부자금을 끌어들여왔고 별 문제도 없었다. 2차전지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한 덕분이었다. SK이노베이션이라는 든든한 뒷배도 한몫했다. SK이노베이션은 2022년 12월 자회사인 SK온이 2조8000억원의 유상증자를 할 때 2조원을 출자했다.
그러나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빨간불이 켜졌다. 최근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SK이노베이션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로 한 단계 낮추면서 위기감은 현실화됐다. S&P글로벌은 지난달 “SK이노베이션의 차입 부담이 예상보다 더 크고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며 재무 위험도를 ‘상당한(significant)’ 수준에서 ‘공격적(aggressive)’ 수준으로 조정했다.
‘BBB-’와 ‘BB+’는 한 단계 차이지만 투자 적격 등급과 투자 부적격 등급으로 나뉜다. 기업의 신용등급이 투자 부적격 등급으로 떨어지면 차입 비용이 늘고, 기존 채무의 차환에 어려움을 겪는 등 전반적으로 자금 조달 여건이 나빠진다.
주력 계열사의 신용등급이 투기 등급으로 강등되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면서 SK그룹의 구조 개편 논의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윤활유 사업 자회사인 SK엔무브를 SK온과 합병해 상장하는 방안부터 배터리 분리막 업체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 지분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는 방안까지 다양하다. 이들 회사는 모두 SK이노베이션의 알짜 자회사다. 지난해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SK엔무브는 9995억원, SKIET는 320억원이다.
트럼프 리스크에 전기차 시장 우려 커져
체질구조 개선과 함께 대외 리스크도 넘어야 할 장벽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이 회사에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역사상 가장 큰 세금 인상”이라고 비난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선거 유세에서 “임기 첫날 전기차 (보조금 지원) 명령 폐기에 서명할 것임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IRA에 따라 미국 현지에서 생산해 판매하면 전기차 배터리 셀(전지)은 ㎾h당 35달러, 모듈(팩)은 ㎾h당 10달러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 1조1988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던 SK온도 이러한 IRA의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AMPC) 덕택에 적자 폭을 5818억원으로 줄일 수 있었다.
물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법안을 폐기하려 해도 상·하원 승인 등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즉각 실행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혜택 규모가 줄거나 보조금을 받는 시점이 늦어지는 등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동안 SK그룹은 정유·석유화학 등 화석연료 기반 사업으로 번 돈으로 전기차 배터리와 친환경 소재 등 새로운 먹거리에 투자했다. 그러나 신사업이 기대했던 수익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적자 폭을 키우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됐다. 예상보다 긴 경기침체와 고물가 환경 속에서 ‘탄소중립’에 대한 피로감까지 닥치면서 기존 사업계획을 추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언제 백조가 될 수 있을까. SK그룹 앞에 아직도 긴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