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논객’ 강광석 전농 강진군 농민회 정책실장

2011.02.21 21:10 입력 2011.02.21 23:37 수정
손동우 기획에디터

“구제역으로 축산농 무너지면 농촌경제 마지노선 함락되는 셈”

우리 농촌의 피폐한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년 내내 뼈 빠지게 농사지어 봐야 비료값 등 각종 비용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한다. 풍년이면 농산물값의 폭락 때문에 시름이 깊어지고, 흉년이면 수확량의 절대 감소 때문에 가슴이 찢어진다. 그런데도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농민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기는커녕 ‘다방 농민’ ‘도덕적 해이’ 등의 언사로 오장육부를 뒤집어놓곤 한다.

최근에는 구제역까지 덮쳐 농촌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이미 350만마리의 소·돼지, 조류 인플루엔자까지 합치면 무려 1000만마리의 생명이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살처분’ 조치로 생매장 당했고, 이들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침출수가 거대한 환경재앙으로 되돌아와 인간의 오만과 독선을 겨누고 있다. 전국 농촌은 방역초소가 되어 마치 계엄령을 연상시키는 살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구제역은 동물만 죽인 게 아니라 축산농가를 비롯해 대부분의 농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고향인 전남 강진군 성전면 영흥리 영풍마을에서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이자, 농민운동도 병행하고 있는 강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강진군 농민회 정책실장(41)을 만나 구제역을 바라보는 농민의 심정과 농촌의 현실, 농사일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경향신문에 ‘낮은 목소리로’라는 제목으로 6년째 농촌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있는 ‘농민 논객’이기도 하다.

비닐하우스에서 오이를 따고 있던 강광석은 사람 좋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정겨운 남도 억양으로 손님을 맞았다. 악수할 때 느껴지는 굵은 손마디, 흙이 잔뜩 묻은 헐렁한 추리닝 바지와 낡은 운동화는 그의 ‘농사 내공’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는 “인터뷰 기사를 잘 써 달라”며 ‘특상품’ 오이를 ‘뇌물’로 내밀었다. 강진 읍내에서 막 점심을 먹은 터여서 반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갓 따온 오이는 디저트로 그저 그만이었다.

강광석 전농 강진군 농민회 정책실장이 전남 강진군 성전면 영흥리 영풍마을 고향에 있는 자신의 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구제역 등으로 황폐해진 농촌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상처투성이인 농민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면서 “그러나 농촌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농부가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강광석 전농 강진군 농민회 정책실장이 전남 강진군 성전면 영흥리 영풍마을 고향에 있는 자신의 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구제역 등으로 황폐해진 농촌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상처투성이인 농민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면서 “그러나 농촌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농부가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인터뷰는 비닐하우스 안 장판 위에 퍼질러 앉은 채로 진행됐다. 엉덩이가 대지의 흙과 맞닿는 ‘비닐하우스 회견장’은 작고 초라했지만, 사람과 자연이 소통한다는 점에서 ‘블루 하우스’나 ‘화이트 하우스’의 프레스룸을 능가했다. 강광석은 “축산업은 우리 농촌경제의 안전판이자 버팀목 구실을 하고 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이번 구제역 파동에 대해 근심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이미 쌀·보리 농사가 무너진 데다, 과수·화훼·원예작물 재배도 과잉 출하로 초토화되고 있는 마당에 축산농가까지 붕괴되면 최후의 마지노선이 함락되는 셈이라는 것이다. 강진군의 경우 2000여개 농가가 2만6000마리의 소를 키우는데 전국을 휩쓸고 있는 구제역 쓰나미가 아직 강진을 포함한 호남지방에는 못 미치고 있지만 이곳 소 사육농가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소를 키우는 농민들은 명절에도 하루에 두 번 방역작업을 하고, 외지로 떠난 자녀들도 못 오게 하면서 축사를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강광석은 “방역초소를 보면 거의 계엄령 분위기”라며 “황량해진 농촌 풍경을 보면 상처받은 농민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구제역의 피해는 사람 사이의 단절이나 불통(不通)과 같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면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도 포함된다. 다른 농촌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강진에서도 계모임, 동창회, 작목반 회의는 물론 농민회 총회 등 모든 모임이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경북 안동에서는 당국에 의해 어느 농가가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너 때문에 동네 망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을 뒤집어쓰고, 마을 전체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됐다고 한다. 농업은 ‘관계론의 결정(結晶)’ 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독창적 이론’인 ‘쌀 미(米)자’론을 꺼냈다. ‘미(米)자’를 살펴보면 가운데 ‘열 십(十)자’를 기준으로 전후좌우 네 곳으로 삐침이 펼쳐지는데, 이것은 하늘과 땅, 사람과 씨앗 등 사방이 협력적 관계를 맺어야 한 톨의 쌀이 나온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광석은 “쌀 한 톨을 생산하는데도 이처럼 인간과 자연의 거대한 협력체계가 필요한데 정작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일그러지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문제는 대규모 공장식 축산방식은 구제역 등의 질병에 더욱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생산성과 효율,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항생제를 사용하고, 인공교배를 일삼는 자본주의적 규모화 축산농업은 자연과 자연, 생명과 생명,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나눔과 소통의 관계까지도 단절시킨다”고 말했다.

강광석은 현재 논 35마지기(2만3100㎡)와 고추밭 3300㎡에 5000주(株), 오이 비닐하우스 1980㎡의 농사를 짓고 있는, 적어도 외형적인 규모로만 보면 중농(中農)에 속한다. 논에서 1년 농사를 지어 거둬들이는 나락은 350가마로 1가마(55㎏)에 4만원이니 계산상으로는 1400만원의 돈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러나 비료값, 농약값 500만원을 제하고 나면 실질소득은 900만원이다. 이것마저도 자기 소유의 논일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고, 소작농인 강광석은 지주에게 500만원의 토지영업세까지 내고 나면 최종 실질소득은 40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농촌 문제는 쌀의 문제로 귀결된다. 농민의 70%가 쌀농사를 짓고 있고, 전체 농업소득의 50%가 쌀소득인 만큼 쌀은 농민에게 생명인데도 정작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쌀은 자판기 커피값 300원보다 싼 200원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생산과잉, 가격폭락도 논에 벼를 심지 않고 축사를 짓거나 콩·감자·배추를 심으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기 때문이다. 강광석은 “4대강 사업에 들어가는 22조원 가운데 1조원의 자금이라도 공공비축제(公共備蓄制·정부가 일정 분량의 쌀을 시가로 매입해 시가로 방출하는 제도)에 추가로 배정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닐하우스 작물 재배도 도시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돈 버는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 특히 한여름 비닐하우스 작업은 폐쇄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숨이 막힐 듯한 고열을 들이마시는 일이어서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또 곰팡이를 막기 위해 살포하는 살균제나 살충제에도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 때문에 노인들은 면역력이 약해져서 감기를 달고 사는 등 ‘하우스병 증후군’을 앓는다. 강광석은 “우리 어머니도 30년 동안 비닐하우스를 하고 계신데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서 최근 광주에 있는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논농사에 비닐하우스를 해도 워낙이 소득이 신통찮아 젊은 농민, 특히 여성들은 겨울철에는 학교급식 조리원, 장례식당 식당일, 노인요양원실 등에서 ‘투잡’ ‘스리잡’을 한다.

농민들의 사정이 이런데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농민들이 정부보조금을 챙기면서 다방에서 노닥거린다’ 뜻으로 ‘다방 농민’ 운운으로 폄훼하는 데 대해 강광석은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끼고 있다. 적잖은 정부 보조금을 받는 농민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규모화 농업정책에 따라 정부가 정책적으로 키우는 농민들이다. 강광석은 “정부 보조금을 받는 이들은 전체 농민의 1%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를 일반화해서 마치 모든 농민이 나랏돈은 돈대로 챙기고, 희희낙락하는 도덕적 해이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광석도 ‘다방’ 때문에 ‘설화(舌禍)’는 아니지만 ‘필화(筆禍)’는 겪은 적이 있다. 그는 2007년 7월 경향신문에 ‘삼거리 Y다방 이야기’란 제목으로 면소재지에 있는 어느 다방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 다방에 최양과 성양, 아가씨 두 명이 새로 왔는데 이들의 출현으로 마을이 활기를 띠고 있다, 이곳 출신이 아닌 두 사람은 곧 떠날 것이지만 경영상의 이유도 일신상의 이유도 비켜가서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이런 내용이었다. 한 번 사라진 5일장은 다시 서지 않았고, 그것이 농촌의 운명처럼 느껴지는 애잔함과 서글픔 때문에 글을 썼는데, ‘떠꺼머리 노총각이라면 그 현기증 나는 분내와 차마 눈 둘 곳 없는 아슬아슬한 의상에 넋을 잃는다’와 같은 ‘선정적 표현’을 여성단체들이 문제삼았던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특히 “전농의 농민운동가라는 사람이 어떻게 여성을 비하하고 성 상품화를 미화할 수 있느냐”며 집중 성토했다. 결국 강광석은 경향신문의 지면 등을 통해 공개사과했다. 그는 “농촌의 현실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했던 것이 꼬였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진땀나지만 나 자신의 여성관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여성을 비하하고 성 상품화를 미화’한다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을 “복잡한 여성편력의 소유자”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가 애정과 연민을 느끼는 여성들은 막실이 할머니, 김천 할머니, 현산 할머니, ‘어느 아주머니’ 등 주로 주변의 ‘노년층’이다. 막실이 할머니는 꽃다운 스무 살 때 서른다섯 살 머슴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한국전쟁 때 좌익활동으로 살해당한 뒤 삯바느질, 소금장수 등 온갖 고생 끝에 강진에 정착해 50년을 살다가 6년 전 돌아가셨다. 김천 할머니는 시집와서 60년 동안 인생을 걸고 메주와 청국장을 만들어 왔으며, 할머니의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매일 아침 한 숟가락씩 드리는 청국장을 잡수시고 백수를 누리셨다. 현산 할머니는 백순의 시어머니를 50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어느 아주머니’는 소처럼 우직한 남편과 2남2녀를 낳아 길렀으며, 아흔을 넘긴 시아버지를 모시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착하디 착한 심성을 지녔다. 그러나 그녀는 서른 살 적 이웃 동네 아저씨와의 ‘로맨스’ 때문에 회관에 불려가 문초를 당했고, 대동계에서도 쫓겨났다가 마침내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가사노동과 육아에 시달리면서 위험하고 작동이 힘겨운 농기계를 다루다가 큰 사고를 당하기도 하며, 한에 겨워 노래방에서 트로트를 판소리로 부르는 젊은 “농촌 슈퍼우먼”들도 그는 사랑한다. 강광석은 “넉넉지 못한 생활과 관습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쓸 수 없는 농촌 여성들의 삶이 가슴 아프다”며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흔을 넘긴 모친과 5년 전 서른일곱 살 노총각이었던 그를 구원해 준 부인도 당연히 ‘그들’에 포함된다.

경향신문뿐만 아니라 전농이 발간하는 ‘한국농정신문’ 등에도 기고하는 강광석의 글은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글은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미사여구보다는 직접 땀 흘려 노동하고 이웃들과 하나가 되며, 자연과 교감하는 가운데서 체득한 ‘가슴과 온몸의 언어’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바닥이 무르거나 여러 날 물에 잠긴 논을 쟁기질하기 위해 트랙터에 ‘최첨단’ 회전식 원판 쟁기를 달고 처음에는 환호작약했다가 미꾸라지, 뱀, 지렁이 등의 몸이 처참하게 잘려나간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한다. 그는 “농사를 오래 지었으면서도 그렇게 많은 생명이 논에 의지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면서 “우리는 살자고 논을 가는데 그들은 삶 전체가 절단난다”고 탄식한다. 그는 “대학 다닐 때는 데모만 해서 글쓰기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면서 “굳이 연관성을 찾는다면 2007년에서 2009년까지 광주에서 전농 광주·전남도연맹 정책위원장 일을 할 때 각종 성명서나 대회사를 무지하게 많이 썼던 것이 조금 도움이 된 듯하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고정 필자가 되면서 그는 마을의 좌장 어르신에게 △글을 쓰기 전에 어르신들에게 꼭 상의를 드리겠다 △원고료를 모아 돼지 한 마리를 내놓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좌장 어르신은 “한 마리는 너무 많고 앞다리로 반 마리만 내라”고 하셨는데 첫번째 약속은 지금도 지키고 있고, 두번째 약속은 이미 지켰다.

강광석은 자신의 삶에서 단순명쾌한 이유로 중요한 선택을 했다. 국문과에 진학한 까닭은 인근 해남군 출신의 고(故) 김남주 시인을 중·고교 때부터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이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농촌을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전농 일을 하게 된 것은 농민을 무시하는 정부가 싫었기 때문이다. 강광석은 “대학 때 전북 순창·고창으로 농활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농부의 삶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김남주 시인과의 인연은 전농 광주·전남도연맹에서 시인의 동생 덕종씨와 함께 활동하면서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인터뷰는 강광석의 휴대폰에 몇차례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끊겼다. 대화의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그는 동네 대소사나 농민회 일과 관련해 갖가지 갈등을 중재·조정하고 도움말을 주는 듯했다. 비닐하우스로 찾아온 해병대 출신의 동네 후배(장국재·33)와는 오이 재배와 봄철 농사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농촌의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고 어려워도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과 낙관만이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근거”라고 말했다. 젊은 농부의 담대한 낙관이 바람결을 타고 퍼졌기 때문일까. 영풍마을 곳곳에는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왔던 겨울을 이겨내고 힘차게 솟아난 푸릇푸릇한 보리가 새봄을 알리고 있었다.

■ ‘한글학교’로 어르신들 문맹퇴치
“당신, 항상 나 무시했지… 이제는 무시 못할 걸요”


3년 전 어느 날 강광석은 마을 이장이 배포한 서류를 작성하던 칠순 노모가 ‘임영자’라는 이름을 ‘임여자’로 쓰는 것을 목격했다. 그가 “똥글뱅이(동그라미) 하나가 어디 도망갔소”라고 묻자 노모는 “그것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란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강광석은 문맹률이 높은 농촌 노년 여성들을 위해 한글 습득의 공간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인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이하 한글학교)’는 이렇게 탄생했다.

강광석이 부지런히 뛰어다닌 끝에 2008년 7월 강진군의회에서 한글학교 지원을 위한 조례가 제정됐고, 군내 7개면, 18개 마을에서 신청을 받아 2009년 1월14일 315명의 ‘어르신 학동’들이 입학했다. 강광석은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한글교사 5명과 음악교사 1명이 선발됐다.

기존의 한글학교들은 교사를 면사무소에 두고 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바람에 교통편이 좋지 않거나, 농번기를 맞은 학생들은 거의 출석하지 못했다. 또 자원봉사자로 교사를 뽑다 보니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이런 실패를 거울삼아 강광석의 한글학교는 학생들이 사는 마을까지 찾아갔으며, 군의 지원과 농협의 후원을 바탕으로 교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했다.

학생들의 구성은 실로 다양하다. 할머니 손잡고 따라온 4살배기 여자아이, 92살 할머니에 이주여성들도 있으며, 할아버지 몇 분도 ‘성(性)적 비주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어르신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강광석은 “이분들은 한글 습득 그 자체보다는 교사(校舍), 교가, 동창생, 차렷·경례, 소풍, 졸업식 등 학교를 다니지 못한 한이 크다”면서 “이런 어르신들이 학교에서 어린애들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 새삼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글학교의 운동회나 소풍날은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학생들은 신나는 막춤을 곁들인 장기자랑을 하는데 60·70대 ‘어린’ 할머니들은 90대 ‘진짜’ 할머니들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한다. ‘어머니 솜씨 전시회’에서는 ‘여보쇼, 당신 항상 나를 많이 무시했지요. 이제는 무시 못할 걸요’라는 등 남편을 향해 서슬 퍼렇게 으름장을 놓는 글도 출품된다.

졸업식날에는 1년 과정 동안 한글은 물론 덧셈·뺄셈과 기초 한자까지 깨쳤다는 환호성과 긴 세월 동안의 한과 설움을 씻어내는 울음으로 뒤범벅이 된다. 인천 사는 딸을 찾아갔다가 ‘터미널 앞 평화슈퍼 앞에서 잠시 기다리시라’는 딸의 말을 듣고도 한글을 몰라 한참을 헤맸던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현재 24개 마을 351명 재학생으로 학교를 키운 교장 강광석은 “당신의 이름 석 자도 써보지 못했던 우리 할머님, 어머님들이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강광석 약력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전농 광주·전남도연맹 정책위원장 역임
△전농 강진군 농민회 정책실장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 교장
△전남 강진군 성전면 영흥리에서 벼농사 및 오이·고추 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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