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의 시인, 한국전쟁 터지자 종군기자로도 ‘맹활약’

2016.02.19 20:57 입력 2016.02.19 21:07 수정

사회부 기자 박인환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요절 시인, 명동의 ‘댄디보이’ 박인환(1926~1956)은 당시 문인들이 대개 신문사 문화부에서 활동했던 것과 달리 1949년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그해 김경린, 김수영 시인 등과 함께 동인 ‘신시론’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그는 5편의 시를 수록하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 받았다. 박인환은 동인 ‘후반기’ 등을 조직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 1950년대 모더니티를 대표한 시인이다.

박인환(오른쪽)은 1955년 3월 서울 명동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시 ‘세월이 가면’을 지었고 여기에 이진섭(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곡을 붙여 노래가 됐다. 오른쪽 세번째는 영화감독 유두연, 왼쪽은 시인 박태진(1955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인환(오른쪽)은 1955년 3월 서울 명동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시 ‘세월이 가면’을 지었고 여기에 이진섭(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곡을 붙여 노래가 됐다. 오른쪽 세번째는 영화감독 유두연, 왼쪽은 시인 박태진(1955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경향신문사가 대구에서 전선판 신문을 발행하면서 박인환은 종군 기자로도 활약했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중공군 얘기를 간접 취재한 기사와 전투로 폐허가 된 서울 외곽을 르포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2월 초순까지 소위 중공군이 강제 속영하고 있었던 안양읍 2동리 김만영이란 촌노인에게서 들은 바 젊은 중공군의 솔직한 고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놈은 사천성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북평으로 와서 며칠 훈련을 받은 뒤 수류탄 여덟개와 볶은 쌀가루 닷 되를 얻었을 뿐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만주로 강제 파견되었다. 그 뒤 소위 연대장이란 자가 ‘한국에 가면 돈도 많고 비단도 많고 또 어여쁜 여자도 얼마든지 있으니 너희들이 가서 싸움만 이기면 모든 것이 손에 들어올 것이요, 일생을 호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서부전선 ○○기지서 본사 특파원 민재정, 박성환, 박인환 발 연착. 경향신문 1951년 2월20·21일자)

“…시흥, 안양 도로 연변의 주택은 지난번의 전투로 폐허화되었고 혹시 남아 있는 가옥이라고 해도 공산군의 약탈로 가재는 사방에 흩어져 그 참상이야말로 필설로 표현키 어려울 뿐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노량진에서 본사 특파원 민재정, 박성환, 박인환 발. 경향신문 1951년 2월20·21일자)

신문사가 부산으로 이주했을 때도 소속은 사회부였지만 문화부 기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당시 문화부장은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였는데, 주량도 대단하고 보스 기질이 있어 주변엔 항상 술꾼들이 몰려다녔다. 1933년 소설 <밤이 깊어갈 때> 등을 발표한 김광주가 그나마 원고료 부수입이 있어 술값을 도맡아 냈다. 박인환은 김광주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오른팔’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경향 문인들의 술자리엔 시인 조병화도 늘 어울려 부산 광복동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박인환은 시인과 신문기자 외에 서점 주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그는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부친 박광선은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머리가 좋고 똑똑한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가족과 함께 서울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한 후 박인환은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이후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지만 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며 공부 대신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 시인들의 시집을 붙잡았다. 결국 영화관 출입이 문제 돼 경기중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박인환의 맏아들 박세형씨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경기중에 다닐 때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 자리에 있던 부민관에서 영화를 보다 선생님에게 들켜 퇴학을 당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경기중에 다닐 때부터 시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 이모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학창 시절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열면 외국영화 포스터가 두루룩 굴러 나왔다”고 했다.

퇴학 후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한 박인환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3년제 관립인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1년 정도 다닌 후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그는 아버지와 이모한테서 얻은 5만원으로 서울 종로3가 2번지(지금의 낙원동 입구), 이모의 포목점 바로 옆에다 서점을 냈다. 이 서점은 뒷날 월북한 시인 오장환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것으로 스무평 남짓했다. 박인환은 서점을 인수한 후 얼마 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열었다.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역할을 하고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던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는 이렇게 탄생했다. 김광균 김규동 이봉구 박영준 김수영 이시우 설정식 김기림 같은 문인들이 드나들었고 박인환은 이들과 친분을 쌓았다. 시인 김수영은 마리서사에 대해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 구별이 없던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마리서사에 진열된 외국문학 서적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인환은 애서가로 책에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의 시집 <군함 마리>에서 따왔다, 프랑스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땄다는 등 여러 얘기가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박인환은 1948년 서점을 그만두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이정숙과 결혼한다. 아내 이정숙은 키가 170㎝로 늘씬했고 진명여고에 다닐 때는 농구선수를 했을 정도라고 한다.

서울 종로3가에 문을 연 서점 ‘마리서사’ 앞에서 박인환(오른쪽)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 종로3가에 문을 연 서점 ‘마리서사’ 앞에서 박인환(오른쪽)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인 김규동은 <목마와 숙녀>(범우)에서 ‘박인환론’을 통해 친구로서 문인으로서 느낀 박인환에 대해 털어놨다. “박인환은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영국 신사처럼 잔뜩 모양을 내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꾀죄죄하게 하고 다니는 벗들을 보면 ‘야, 거 좀 벗어 버려라’ ‘무슨 모양이 그러냐’ 따위의 핀잔을 주곤 했었다.” “평소에 흔히 주머니에 시고를 넣고 다니던 그였다. 언제나 시를 생각했고 또 썼다. 부산 피란 시절에 우리는 모두 객지에서의 물질적 궁핍에 견디기 어려워했으나 인환은 그런 것을 비교적 잘 견디는 성격이었다. 당장 저녁쌀이 없어도 다방에 진을 치고 앉아서 문화와 문학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와 음악에 대해 다투어 장광설과 흥분을 털어놓을 만큼 열중했다.”

1952년 경향신문에서 퇴사한 박인환은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했다. 생활고로 처가살이를 한 그가 가장 노릇을 위해 직장을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목마와 숙녀’가 있는 <박인환선시집>을 발간했다.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담고 있다. 그의 시인 생활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첫 시선집을 낸 이듬해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작고 1주일 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세월이 가면’이 만들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명동의 한 술집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로 읊은 것으로 알려졌고, 방송인 이진섭이 곡을 붙여 노래가 됐다. 나애심이 불러 국민적 사랑을 받은 곡이다. 시인 이상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인환은 이상의 기일로 알고 있던 3월17일(실제는 4월17일) 오후부터 지인들과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하다 20일 오후 9시경 집에서 심장마비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쟁의 허무와 비탄을 술과 낭만으로 견뎌내며 그만의 시어로 피어낸 박인환의 시와 시정신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값싼 센티멘털 시일까…전통 서정시에 맞선 ‘미래파’였다

박인환은 ‘통속적’ ‘값싼 센티멘털리즘’ ‘부족한 한국어 구사력’ 등으로 시인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평가를 종종 받아왔다. 시인 김수영은 박인환과 ‘신시론’의 동인으로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내고, 서점 ‘마리서사’에 드나든 지인이었지만 훗날 누구보다도 혹독하게 박인환의 시를 비난했다. 서양문명과 예술을 향한 박인환의 욕망이 모더니즘 지향으로 나타났지만 낮은 단계의 센티멘털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인환으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에 가려져 그의 시 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유도 있다. 오문석은 저서 <현대시의 운명, 원치 않았던>에서 한국전쟁 이전 박인환은 결코 허무주의자가 아닌 ‘미래파’였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박인환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시론’은 서정주, 조지훈 등으로 대표되는 구시론(‘전통 서정시’)에 맞선 것이었다. 시 ‘서적과 풍경’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등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테마를 적극 수용한 것들이다. 특히 1950년대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동인 ‘후반기’의 중심에는 박인환이 있다. 비록 ‘후반기’는 동인지 한번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해체됐지만 전후 모더니즘 시운동의 계보를 이은 것만은 사실로 평가된다.

박인환은 1955년 <19일간의 아메리카> <박인환 시선집>을 출간했고, 그의 시선집에는 ‘목마와 숙녀’ 외에도 ‘불행한 신’ ‘검은 신이여’ ‘최후의 회화’ 등이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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