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서양철학의 주춧돌 ‘이분법적 사고’ 해체…격렬한 논쟁을 낳다

2016.11.29 20:35 입력 2016.11.29 20:36 수정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로고스’ 중심의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탈구축을 시도했다. 전후 서구 사상사에서 열렬한 지지와 격렬한 비난이 교차한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로고스’ 중심의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탈구축을 시도했다. 전후 서구 사상사에서 열렬한 지지와 격렬한 비난이 교차한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후 서구 사상사에서 가장 문제적 철학자로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년)를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데리다의 철학은 혁신적인 만큼 난해하고, 열렬한 지지를 받는 만큼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철학 사상은 해체주의로 알려져 있다. 해체란 말이 함의하듯 그는 기존 사유에 도전하고 그 논리를 전복함으로써 뜨거운 토론들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데리다 사상을 둘러싼 논쟁을 잘 보여준다. 사건은 데리다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할 것인지를 놓고 진행됐다. 어떤 교수들은 데리다 철학을 높이 평가한 반면, 다른 교수들은 정밀함과 명확함을 결여한 유행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명예박사학위가 저명한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제도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이 문제를 놓고 투표가 진행됐는데, 반대 204표, 찬성 336표를 얻어 데리다는 학위를 받았다. 데리다 사상은 이만큼 문제적이었다.

데리다 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1967년에 발표한 세 저작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에서부터 <우편엽서>(1980)에 이르는 전기가 해체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시기였다면,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우애의 정치학>(1994), <환대에 대하여>(1997),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의 공동선언문이 담긴 <테러 시대의 철학>(2003) 등을 발표한 후기는 독자적인 정치 철학을 제안한 시기였다.

자크 데리다의 대표 저작 <그라마톨로지>

자크 데리다의 대표 저작 <그라마톨로지>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그라마톨로지>는 데리다의 대표 저작으로 손꼽힌다. 이 책은 데리다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들인 ‘문자언어’ ‘차연(差延)’ ‘대리보충’ ‘탈구축’ 등이 제시된 저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저작들을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서양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했다. 책의 핵심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형이상학을 관통하는 것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간 이분법의 위계다. 이분법의 위계란 음성언어를 이성·합리성과 결부되고 개인 의식 속 내면적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문자언어를 이차적 외연, 목소리의 대리보충물, 이성에 본질적이지 않은 보조적 테크놀로지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서구 형이상학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글자보다 음성이, 다시 말해 글보다 말이 로고스에 더 가깝고, 그래서 더 가치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를 그는 ‘음성 중심주의’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이름 짓는다.

데리다가 겨냥한 것은 이러한 로고스 중심주의에 내재된 질서다. 진리와 허위,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서양과 비서양, 현전과 부재, 문명과 야만 등의 이항대립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이항대립처럼, 전자를 지배적인 것으로, 후자를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위계를 이뤄왔다. 그런데 후자가 전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그 근거가 부재한 착각이자 환상이라는 게 데리다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분법의 위계질서가 그동안 부당하게 이뤄진 억압들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동해왔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탈구축은 이러한 폭력적 위계를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탈구축은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닌 내부에서 그 위계질서를 전도시키고 열등한 것들을 옹호하는 것을 함의한다.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이란 기호, 흔적, 문자 언어에 대한 학문이다. 문자학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맞서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탈구축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러한 데리다 사상이 그동안 서양 인문·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이성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데리다 사상의 비판과 반비판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현대 프랑스 사상 계보를 프리드리히 니체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를 거쳐 데리다로 이르는 흐름과 니체에서 조르주 바타유를 거쳐 미셸 푸코로 이르는 흐름으로 구분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니체의 전통 아래 놓인, 주체 철학의 기원을 멀리 소크라테스 이전까지 추적한 해체의 철학자다. 푸코와 함께 데리다는 무정부주의 철학자라는 게 하버마스의 비판이었다.

영국 철학자 앤서니 케니는 <서양 철학사> 제4권인 <현대 철학>에서 데리다를 진지한 철학자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데리다 사상은 문학보다 철학에서 그 명성이 떨어졌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진짜 철학과 사이비 철학을 구분하는 것에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둘러싼 논란에서 볼 수 있듯 데리다는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이들에겐 적잖이 불편한 존재였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이론 관점에서 데리다 사상이 던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무엇보다 데리다는 인간의식 내부와 사회구조에 존재하는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유 프레임을 선사했다.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서양과 동양,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종의 이분법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 거점을 제공함으로써 이 분야 연구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데리다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전통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시각에서 보면 빈 틈새들이 존재하고 낯설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통찰은 인간 존재와 그 존재들이 구성한 사회의 선 자리를 돌아보게 하고, 인문·사회과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사회의 감춰진 측면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한 번쯤 읽고 숙고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한국어판 저작은

<그라마톨로지>는 언어학자 김성도와 불문학자 김웅권에 의해 각각 우리말로 옮겨졌다. 김웅권은 번역본 제목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로 붙였다. 김성도는 2010년 전면 개정판을 내놓았다. 120쪽이 넘는 이 개정판의 ‘옮긴이 해제’는 난해한 <그라마톨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라캉·푸코·들뢰즈…90년대 초 대학가 ‘프랑스 사상’ 열풍

데리다 사상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김성곤(서울대 명예교수·사진)은 그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탈모더니즘 시대의 미국 문학>(1989)과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 미국소설>(1990) 등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 소설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1980년대가 마르크스주의의 시대였음을 고려할 때 김성곤의 저작들은 이채롭고 신선했다.

[김호기의 세상을 뒤흔든 사상 70년] (36)서양철학의 주춧돌 ‘이분법적 사고’ 해체…격렬한 논쟁을 낳다


1990년대에 들어와 프랑스 사상은 ‘문화의 시대’ 개막과 맞물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푸코, 질 들뢰즈, 데리다의 책들은 지식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널리 읽혔다. 데리다는 특히 푸코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철학자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아래 김형효(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데리다의 해체 철학>(1993)과 김상환(서울대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1996)은 작지 않은 관심을 모았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 데리다 사상이 모더니티의 가치관을 해체하는 철학임을 강조했다면, <해체론 시대의 철학>은 니체에서 데리다에 이르는 해체론이 서양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들을 탐구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문화담론의 르네상스가 돌연 종언을 고한 후 데리다 철학을 포함한 프랑스 사상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등의 철학이 소개됐지만 그 영향력은 푸코, 데리다, 들뢰즈와 비교할 때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 시기에 나온 이광래(강원대 명예교수)의 <해체주의와 그 이후>(2007)는 데리다를 포함한 프랑스 해체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주목받았다.

그는 한때 “서양의 명품(푸코)에 우쭐해하고 유행(데리다)에 들떠 있던” 자신의 학문적 객기를 성찰하는 문제의식 아래 해체와 유목 철학의 운명을 돌아본 다음 융합과 무구조의 포스트-해체주의 철학을 전망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데리다 철학을 포함한 프랑스 사상의 수용은 그 명암이 분명했다. 한편에서 유행이라는 열광과 소비의 운명을 보여줬지만, 다른 한편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푸코의 권력 비판은 이성중심주의, 서양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사유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