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판사도 그렇다

2018.07.01 20:54 입력 2018.07.01 20:55 수정

판사들의 트라우마 ‘외부 침입자’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내리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현장 감식, 관련자 증언이 있더라도 완벽하게 입증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리기 힘들다. 가능성만으로 판결을 내리면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수 있다. 사진은 영화 <타짜>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내리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현장 감식, 관련자 증언이 있더라도 완벽하게 입증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리기 힘들다. 가능성만으로 판결을 내리면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수 있다. 사진은 영화 <타짜>

- 저는 K라고 하는 순경입니다. 카페 여종업원인 여자친구가 있었죠. 한때 결혼까지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날도 신림동에서 여자친구를 만났습니다. 새벽 3시30분 근처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했고, 잠을 잤습니다. 일하러 가야 했기에 여관주인에게 콜을 부탁하여 아침 7시에 깼습니다. 여자친구는 더 자겠다고 했고, 저는 방문을 잠그고 혼자 나왔습니다. 그 길로 파출소에 가서 근무를 하다가 오전 10시에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죠. 여자친구는 죽어 있었습니다. 저는 놀라 경찰에 신고했죠. 자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살인이라더군요. 목이 졸려 죽었다고요.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인 건 어처구니없게도 경찰은 제가 범인이랍니다.

- 그야 당신이 피해자와 같이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

- 살인이라면, 제가 나온 오전 7시부터 10시 사이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여자친구를 죽였을 겁니다. 전 아니에요.

- 그 틈에? 과연 그런 교묘한 우연이 있을까? 감정결과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오전 3시30분에서 7시 사이로 나왔어. 현장감식 경찰관에 따르면, 오후 3시10분경 사체를 보았을 때 시반 및 시체경직이 확실했다고 해. 각막이 혼탁했고 발가락과 손가락 마디가 완전히 경직되어 있어 억지로 폈다는군. 손가락 끝까지 완전히 경직되려면 사망 후 10~12시간이 경과되어야 하며, 역산하면 사망시각은 오전 3시10분~5시10분으로 추정할 수 있어. 이건 국과수 부검의의 공적인 견해야. 또 경찰관은 사체 직장온도를 측정했는데, 오후 3시30분경 23도로 나왔어. 이걸 토대로 부검의가 뮬러의 공식이란 걸로 산정해봤는데, 사망 후 12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나와. 역시 사망시각은 오전 3시30분경 전후가 되지. 위 내용물도 검사했어. 황색의 반죽 형태였고, 소화 정도로 보아 식후 2~3시간 정도 지나 사망한 것으로 판명되었어. 그런데 피해자는 오전 2시경 식사를 한 것으로 확인되었어. 아무리 늦추어 잡더라도 오전 5시에 이전에는 죽었다는 결론이 나와. 사후경직, 직장온도, 위내용물. 이건 과학이야. 어떻게 보더라도, 사망 무렵 같이 있었던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

- 억울합니다. 저와 여자친구의 혈액형은 A형인데, 현장 침대에서는 정액 양성반응에, 혈액형이 AB형인 휴지가 발견되었어요. 이불 위에서도 B형의 체모가 발견되었고요. 침대 위에는 발자국이 있었고, 그건 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제가 투숙했던 203호는 열쇠도 분실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외부 침입자가 있었던 겁니다.

- 피해자의 몸속에서는 혈액형 A형인 정액만이 검출되었어. 제3의 인물에 의한 성폭행은 없었단 얘기지. 또 203호에는 당신이 투숙하기 전에 다른 커플이 머물다가 나갔고, 여관주인은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군. 어차피 불특정 다수인이 이용하는 곳이 여관이야. B형의 체모 같은 건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겠지. 그것만으로 제3자의 범행으로 볼 순 없어. 침대 위 신발 자국은 굉장히 희미했어. 만약 그게 범인의 것이었다면 달랑 2개만 생길 수 있을까? 그건 현장을 다녀간 경찰 등의 부주의로 생긴 것이었을 가능성이 커. 휴지에서 다른 혈액형이 검출되었다지만, 그게 범인의 것이라면 왜 하필 남이 닦고 버린 휴지를 사용했는지 납득이 안 가. 그건 당신이 경찰에 신고한 후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현장을 변경했던 것으로밖에는 설명이 안돼.

- 여자친구가 갖고 있던 수표가 없어졌어요. 그중 2장을 교환해 간 사람이 확인됐는데, 제가 아니었죠. N이라는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 수표 문제는 살인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 그래도….

- 여관주인은 아침 7시에 인터폰을 했을 때 당신이 바로 받았다고 했어. 그런데 인터폰과 침대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바로 받기는 어려운 구조야. 당신이 깨어 있으면서 인터폰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 당신이 나간 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고도 증언했지. 또 당신은 왜인지 처음부터 여자친구가 자살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어. 307호 투숙객은 오전 4시경 여자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악 하는 비명소리가 나더니 그 후로 조용해졌다고 증언했어. 이런 의심스러운 정황도 많지만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가 죽은 시간에 같이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당신이라는 사실이야. 피해자는 살해당했어. 그렇다면 범인은 당신일 수밖에 없어.

살해 용의자로 지목받은 K씨
피해자 사망 시간 추정 결과
1·2심에서 징역형 선고 받아

여기까지 읽은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판단하실지 궁금하다. K순경의 말이 그럴 법하다고 생각해서 무죄로 할 것인지. 아니면,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외부인이 침입해서 살해한다는 게 말이 돼? 하면서 유죄로 할 것인지.

이 사건은 1992년 가을에 일어났다. K순경은 유죄로 판결되고 1심에서 징역 12년을 받았다. 사망시각에 대한 추정을 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대 최고수준의 과학이 낸 그 결론은 미심쩍은 약간의 의문을 뭉개버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유죄판결은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 K순경은 상고했다.

상고심 중 진범 잡혀 ‘대반전’
임장 경찰관 엉성한 조사 드러나
결국 K씨는 무죄를 받았지만
진범이 만약 안 잡혔다면…

대법원 재판 중에 이변이 일어난다. 진범이 잡힌 것이다. 그는 전부 자백했다. 피해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는데, 여관을 지나다가 203호 열쇠를 주워 오전 7시30분경 방에 침입했다.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는데 피해자가 일어나기에 엉겁결에 위에 올라타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휴지로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졸랐다는 것이다. 범인만이 알 수 있는 디테일들을 털어놓았고, 수표에 이서된 N은 그의 지인으로 확인되었다.

검찰은 K순경을 석방했고, 대법원은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감식결과 등 과학증거는 어떻게 배척했을까.

먼저 현장감식을 진행한 경찰관의 증언의 정확성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현장임장일지에는 ‘완전경직’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손가락 관절의 경직 등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피해자의 손가락을 억지로 폈다고 하나, 사후경직상태에서는 손가락이 부러질지언정 펴지지는 않는데 사진으로 보면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펴져 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시체의 현상이 과연 경찰관의 진술대로였던 건지 의문이 든다. K순경은 오전 10시경 피해자의 팔이 자연스럽게 들렸다고 진술했는데, 사망추정시각까지 염두에 두고 한 진술이 아니라면 이 또한 경찰관의 증언과 배치된다. 경찰관의 진술이 틀리다면, 그가 인식한 시체의 경직상태를 기초로 판단한 국과수 부검의의 판단도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또 직장온도 측정은 시간 간격을 두어 3회 이상, 20㎝ 이상 삽입해야 하는데, 경찰관은 단 한 번 온도계를, 그것도 7㎝ 정도 삽입하여 측정했다. 그렇다면 추정의 근거로 삼을 만큼 정확성이 있었을지 의문이다. 뮬러의 공식이란 것도 난방하고 있는 여관방에서 피해자가 전라의 상태인 점을 감안해서 적용한 것인데, 여관주인의 진술로는 아침 두 시간만 보일러를 작동하였고, 오전 10시부터는 방이 계속 열려 있었다고 하므로 주위환경이나 기온 등 측정의 전제에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위 내용물로 사망시각을 추정한 부분도 문제다. 피해자는 오전 2시경 과일 안주를 먹었지만 위 내용물에서는 밥이 검출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식사를 한 것으로 보이고, 추정 사망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하여, 여관주인은 처음에 경찰에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가 조사가 진행될수록 진술이 구체화된 점에서 말을 액면대로 믿기 힘들고, 자살이라고 말했다는 건 K순경의 인식하에서 가능한 진술이었으며, 비명을 들었다는 투숙객도 틀어주지 않은 비디오를 보았다고 하는 등 그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읽어 보면 대법원 판결문의 논지는 분명하고, 논거는 합리적이다. 1, 2심이 왜 그 정도 증거만으로 유죄를 판결했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 판단은 결국 ‘사후적’이란 게 문제다. 과연 진범이 잡히지 않았어도 1, 2심 판결이 파기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형소법 이론상 ‘합리적 의심’
희박하기만 한 가능성은 아냐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선례 남겨

법의학적 자료·과학적 분석으로
확실한 초동수사 뒷받침돼야

이 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판결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있어야 하며, 그게 어떤 건지는 아실 것이다. 그리고 제3자가 침입해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죄가 내려진 몇 개의 사건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는 지난 회에 썼던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이 있고, 듀스 김성재 살인사건도 있다(김성재 사건에서는 제3자 침입 가능성에 상당한 이견이 있음을 다른 글에서 밝힌 바 있다.)

판사들이 너무나도 지엽적인 가능성에 구애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실험실에서 이론적으로나 제기될 수 있는 손톱 끝만 한 틈바구니에 집착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K순경 사건을 보면 판사들의 이 답답함은 ‘합리적 의심’이라는 형사소송법상의 이론적인 장벽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는 것이다.

K순경 사건은 판사들의 뇌리에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뱀을 보지도 않은 인류가 뱀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이 사건이 있은 지 한참 후에 법조계에 발을 들이민 판사들조차 일종의 선험적인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과학수사 수준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경찰에서 밝힌 사망추정 시간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선명한 건, 얼핏 작위적인 상황처럼 보이는 ‘제3자 침입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선례를 남긴 점이다. 이 사건은 비록 한정된 시공간이라 할지라도 제3자가 범행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유죄의 합리적인 증명이 있다고 단정하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 틈바구니 때문에 진범을 놓치는 일은 안타깝다. 그 틈을 메우는 건 법 이론이 아니다. 합리적 의심 기준을 완화하면 억울한 이들이 생기기 쉽고, 엄격하게 하면 범인이 빠져나가기 쉽다. 여기서 필요한 건, 혹은 앞으로 더 필요한 건 기술과 수사시스템이다. K순경 사건에서처럼 임장 경찰관의 엉성한 기록만을 믿고 법의학적인 판단을 해서는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외부 침입 가능성’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초동수사에서의 법의학적 자료 확보, 과학적 분석, 감정 같은 것들이다. 그 발전은 언젠가 법률가들을 ‘합리적 의심’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줄지도 모른다.

■필자 도진기

[도진기 변호사의 판결의 재구성]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판사도 그렇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8년 동안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면서 10여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공직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작품으로는 <정신자살>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순서의 문제> <모래 바람> 등이 있고, 2014년 <유다의 별>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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