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버치 보고서

⑭‘서북청년단’ 문제 일으키자 군정청은 “나치와 KKK 합친 것 같다” 보고

2018.07.01 22:11 입력 2018.07.01 22:14 수정

‘서북청년단’ 문제 일으키자 군정청은 “나치와 KKK 합친 것 같다” 보고

<스파이의 왕>에 실려 있는 사진. 한국 경찰과 미군 관계자들이 처형된 게릴라 지도자 김지회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 인물이 니콜스로 보이며, 김지회는 여순사건의 반란군 측 지도자였다. 청년단은 여순사건과 제주도 4·3 사건에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6년 ‘이승만의 양아들’
니콜스는 첩보부대를 만들고
공산주의자 처형을 시작했다
청년단과 관계는 ‘불문가지’

그런데 보고서엔 언급이 없다
문서와 실상은 같지 않았다
버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많은 청년단이 있었지만, 그중 서북청년단은 지금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서북이라 함은 한반도의 서북쪽 평안도 지역을 가리킨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 지역은 행정구역상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황해도,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히 평안도인 ‘서북’이 유명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역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시대부터 특징이 있었다.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중국과의 사이에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정보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또한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는 기독교가 일찍부터 자리 잡은 곳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에 비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지주-소작인의 계층 관계도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선진 정보가 들어오는 곳이면서, 유산계층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교육열도 높았다. 19세기 초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지역적 특징과 관련이 있었다. 교육열도 높고, 가르칠 돈도 있는데, 이 지역 출신은 과거에 합격해도 고위 관료로 성장하지 못했다. 높은 경제력과 교육열에 비하여 사족이 없는 지역이 평안도였다. (오수창, ‘조선후기 경상도, 평안도 지역차별의 비교’, ‘역사비평’ 59) 18세기를 통해 경상북도 지역과 함께 서북지역에서 차별 철폐를 위해 올린 상소가 적지 않았다.

해방 후 서북지역에는 비상이 걸렸다. 소련군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업자본이 융성하고, 지주도 적지 않으며, 기독교가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숭실과 오산같이 역사 깊은 기독교 학교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때문이며, 김일성의 외가가 기독교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지역적 특징과 관련이 있었다. 소작인들이 주가 되는 농민조합이 활발했던 남쪽을 소련군이, 기독교인과 상업자본가가 많았던 북쪽을 미군이 점령했다면, 해방 직후의 소용돌이가 심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북쪽에서 이들에게 소련군이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남한에서는 이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든 것을 잃고 온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로 찍히면 더 이상 자비가 없는 듯했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다양한 청년단이 경찰의 비호 속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미군정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47년의 지방 조사를 통해 이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한 조사에 들어간 것이다. 미군정의 지방 조사 중 경주에서 우연히 서북청년단의 임원 한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경주의 서북 본부를 방문해서 두 시간의 회담을 가졌다. 서북 지도부의 답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김기승(35)이라는 본부 담당자는 2년 전까지 중국에서 상업에 종사했다. 그는 북쪽에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청년단에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의 두 명의 보좌관은 30대로 역시 서북 구성원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지역 사람이었다. 넘버 포(4) 맨은 22세였고 38선 남쪽에 온 지 6주 되었다고 했다. 북쪽에서는 기차역의 이등 보조 역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병장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래는 김기승과의 면담 내용이다.

문: 경주의 당신 조직에 몇 명이 있는가?

답: 90명이다. 25명은 본부에 살고, 65명은 경주군의 다양한 면에서 우익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다.

문 경주에서 조직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답: 6주 되었다.

문: 당신은 조직의 성원인가?

답: 아니, 나는 자문위원이다. 북쪽에 살았던 사람만 성원이 될 수 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서 상인이었다.

문: 당신 조직의 성원 중에 서북이 조직되기 전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이 있는가?

답: 없다. 그들 중 누구도 6주 이상 38선 남쪽에 없었다.

문: 그들 90명이 6주 전에 한꺼번에 왔는가?

답: 아니다. 몇 명만 왔다. 그들 대부분은 그 이전에 왔다. 우리는 항상 커지고 있다.(중략)

문: 누구라도 일자리가 있는가?

답: 없다.

문: 어떻게 사는가? 누가 도와주는가?

답: 우리는 한국 독립촉성국민회 관계자들에 의해 지원받고 있다.

문: 이승만의 조직인가?

답: 그렇다.

문: 어떠한 정치적 정책을 따르는가?

답: 이승만이 내린 정책을 따른다. 그는 우리의 지도자이다.

문: 어떻게 그 정책을 따르는가?

답: 38선 이북의 놀라운 상황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한다. 러시안들이 얼마나 한국인들을 능욕하는지, 어떻게 모든 자유가 사라졌는지, 러시안들의 법 아래에서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우리는 공산주의에 반대해 싸우는 세계에 종사하고 있다.

문: 당신들은 단지 설득하는 방법만 쓰는가? 말로만 하는가? 아니면 테러 행위를 하는가?

답: 우리는 말로만 한다. 우리는 테러 안 한다.

문: 성원들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답: 평균 21.5세이다. 우리는 25세가 넘는 사람이 없다.

문: 왜 25세로 제한하는가? 나이든 사람들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더 좋지 않나?

답: 대답하지 않겠다.

(이하는 우리에게 한)김기승의 질문.

문: 우리는 일반 시민들을 선거에 등록하도록 해도 되는가?

답: 그렇다. 만약 그들이 당신과 함께 가겠다고 한다면. 그러나 만약 당신이 무력을 쓰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문: 시민들을 여론조사에 투표하도록 해도 되는가?

답: 그렇다. 그러나 무력은 쓰지 마라. 만약 당신이 무력을 쓰거나 위협을 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잘못을 밝힐 것이라고 경고를 한다.”



답변에는 논란의 여지가 컸다. 조사관이 먼저 만난 사람은 모두 서북이 아닌 지역에서 왔거나 해당 지역의 청년들이었다. 서북 출신의 청년들만으로 전국적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유권자를 데리고 투표소에 간다는 것이다. 투표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서북은 분명 스스로를 민병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히틀러의 브라운 셔츠(필자 주=나치의 청년조직인 유겐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와 KKK를 합친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주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20명의 이상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연설에 의해서 변화를 얻을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먹과 무기가 가장 효과적인 타입이었다. 그들과의 문답에서 중학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단지 소학교를 다녔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부잣집의 아들이거나 성공한 집안의 자손은 없었다. 북한에서 그들은 머슴 일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정치적 이익보다는 경제적 이유를 위해 남한에 온 것이 명백했다.”


어찌 보면 조사관도 편견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겉모습을 보고, 단지 몇 마디를 나누어 본 후 그는 모여 있는 청년들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는 듯한 보고서를 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집안 출신의 청년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 지주와 기독교인들이 주로 월남했다는 기존의 연구는 잘못된 것인가? 그들은 설득이나 통제가 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청년단은 25세 이하의 열혈 청년들을 정치적으로 세뇌시키고 이용하려고 했다. 어쩌면 그들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피해자들일 수 있었다.

<스파이의 왕>에 실려 있는 사진. 1950년 군내 숙청 시 처형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이미 방송을 통해 몇 차례 방영되었다. 그러나 그 장면의 반대쪽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미군과 한국군의 모습은 공개된 적이 없다. 사진 설명에는 니콜스가 맨 오른쪽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인상착의로는 가운데 있는 인물로 보인다.
“이 조직의 또 다른 본부는 영일군의 포항과 영덕군에 있었다. 둘 다 모두 6주도 채 안돼 시작되었다. 영덕군 검사 정영조에 의하면 영덕군 본부에는 35~36명의 구성원이 있다. 상당수가 주변 면에 나뉘어 있었다. 그는 정확한 숫자를 몰랐다. 영덕 본부는 영덕경찰서의 바로 길 건너편에 있다. 이 세 개의 군에서 경찰과 법원 관리들은 서북청년단의 테러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청북도 충주에서 분명한 경찰의 비호 아래 테러를 행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북 성원들은 경찰 보조로서 1947년 8월15일 그 지역에 경비를 섰다. 경주에서의 회담에서 김기승은 38선 이북으로부터 이용 가능한 사람들이 충분해지는 대로 서북이 남한의 모든 군에서 조직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서북 청년단은 좌우 힘의 균형이 불분명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광복청년단은 서북의 친구 조직이다. 모든 광복 성원들은 38선 이남 출신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서북 본부가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 광복과 서북은 가까운 연결과 협조를 유지하고 있다. (중략) 우리가 인터뷰를 한 경찰, 검찰, 판사들은 모두 서북과 광복에 호의적이었고, 그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영덕 검사는 ‘서북은 진정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공짜로 길을 고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의 조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서북청년단은 대부분 20세에서 26세 사이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북에서 내려왔는데, 직업이 없으며 앞으로도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없다. 최광준(29)은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테러리즘의 행동은 필요하다. 어떠한 민주주의도 피 없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희 미국도 전쟁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서북이 대전에 400명이 있다. 이들은 주로 경찰 정보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경북과 전북의 기지로 대전을 이용하고 있다. 서산에서는 서북이 매우 강하다. 30명의 서북 대원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 모두 수원 사람들이다.”(‘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 대한 정치적 조사’)



청년단에 대한 조사는 마치 미군정이 아무런 책임도 없는 제3자로서, 오히려 이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2017년 미국에서 <스파이의 왕(King of Spies, 블레인 하든 저)>이라는 흥미로운 저서가 발간되었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첩보부대 책임자 니콜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승만의 지원으로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나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버치는 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까? 일부러 감춘 것일까? 버치가 활동하고 있었던 정치고문단과 군 정보국(CIC), 그리고 미 공군 소속 니콜스의 첩보부대는 서로 분리된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버치의 문서군 속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에 대해 다른 부서에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보국이나 첩보부대의 활동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버치의 정치고문단에는 오히려 포섭대상이 될 수 있었다. 버치의 문서군에 있는 청년단 관련 문서들은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실상은 문서의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버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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