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전격 퇴임 발표한 이웅열 코오롱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호방하고 사교적이다. 비슷한 시기 경영권을 물려받은 재벌 2, 3세들의 ‘맏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새로 창업하는 일이 성공하면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지만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에 대한 사진촬영이 불가능해 과거 코오롱 사보에 실린 경향신문 자료사진을 사용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호방하고 사교적이다. 비슷한 시기 경영권을 물려받은 재벌 2, 3세들의 ‘맏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새로 창업하는 일이 성공하면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지만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에 대한 사진촬영이 불가능해 과거 코오롱 사보에 실린 경향신문 자료사진을 사용했다.

지난 4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나인스게이트그릴에서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62)과 아침식사를 했다. 전날 약속을 잡을 때에도, 식사 중에도 이 회장은 “인터뷰는 아니다”라며 거듭 선을 그었다. 그는 “오늘은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 나누자”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이 회장의 전격적인 퇴임 발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재벌 2, 3세가 나이 70도 안돼 스스로 은퇴를 선언한 사례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같은 날 그가 임직원에게 보낸 서신 내용도 장안의 화제였다. 서신에서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그 금수저를 꽉 물고 있느라” “이빨이 다 금이 간 듯” 하다는 등 솔직하면서 유머러스하게 퇴임 소회를 밝혔다.

이 회장은 실제로 활달하고 유쾌하다. 게다가 달변이다. 종업원이 점심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라고 귀띔해줄 때서야 시간이 2시간40분이나 흘렀음을 깨달았을 정도다.

우물쭈물하다간 새 도전의 용기를 못 낼 것 같아 떠나기로 결심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플랫폼 사업 하고 싶어…많은 사람 만날 것


- 내년 1월1일부터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용단을 내린 특별한 계기나 배경이 있나요.

“1996년 나이 마흔에 회장 자리에 오를 때부터 딱 20년만 코오롱의 운전대를 잡겠다고 작정했어요. 아버님(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74세에 은퇴를 선언하고 제게 자리를 물려주셨는데, 당시 어떠한 미련도 보이지 않으셨어요. 그러고는 히말라야 베이스캠프까지 산소호흡기도 안 한 채 등반하셨죠. 아들은 아버지의 뒤꼭지를 보고 배운다고 하잖아요.”

- 부친은 물론 LG그룹 구자경 회장,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도 자발적으로 물러났지만 모두 70세가 넘어서예요. 그에 비해 이 회장은 아직 너무 젊지 않습니까.

“예전에 이병철 회장님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60이 넘으니 나한테 바른말 하는 놈들이 밉더라’는 말씀이 있었어요. 60이란 나이가 그때 각인된 것 같아요.”

- 예정보다 3년쯤 늦은 셈이군요.

“이 정도면 나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라는 게 있을 것 아니에요? 또 퇴임할 만큼 자격이 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하지만 우물쭈물하다 더 늦어질 것 같고, 지금 아니면 새롭게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나기로 한 거예요.”

- 지금은 퇴임 자격이 있는 것 같나요.

“인보사(세계 최초의 무릎 골관절염 통증완화제)가 치료제로서 미국 출시를 위한 대규모 글로벌 임상 3상이 진행 중이고, 인보사를 개발한 티슈진은 지난해 말 코스닥에 상장했어요. 제가 27년간 투자한 일이에요. 또 저는 우리 직원들에게 좋은 기운을 넘겨주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작년에 울릉도에 개장한 리조트(코스모스 리조트)가 그래요. 7년 전 누님 부부와 같이 울릉도에 처음 놀러갔다가 그곳 기운이 너무 좋아서 땅을 매입했어요. 바람, 별, 물 등 그곳의 모든 좋은 기운이 합쳐지는 건축물이 되도록 설계해 지난해 완성했죠. 우리 직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가 리조트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휴대폰을 꺼냈다. 2G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1년반밖에 안돼 조작이 서툴다고 했다. 카톡과 SNS는 하지 않는단다. “쓸데없는 리스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란다.

- 퇴임은 언제부터 구체적으로 준비했나요.

“올 4월이에요. 지주사 부사장을 포함한 직원 4명에게만 말하고 비밀리에 준비시켰어요. 그들도 설마 하면서 준비했나본데, 9월쯤 제가 진짜 실행에 옮길 것임을 알고 놀라더라고요. 2020년에 퇴임하면 안되냐고 했지만, 저는 한번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에요.”

-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새롭게 창업하겠다’고 했는데 구상은 있나요.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요. 젊었을 때는 사람들을 엄청 많이 만나고 다녔어요. 미국에 가서 벤처기업인들도 만나 같이 여행도 다니고 그림도 그리면서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맥이 다 끊겼어요. 인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일단 인맥 먼저 살릴 생각이에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 것 같아요. 뭘 할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그 후에 세우려고요.”

- 지난달 28일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임직원에게 보내는 서신’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어요. 갑작스러운 경영 일선 퇴진과 새로운 창업 도전 선언도 놀라웠지만, 자신을 ‘금수저’로 표현한 점도 크게 회자됐어요. 남들은 부럽기만 한 ‘금수저’인데 너무 엄살 떠는 것 아닌가요.

“부회장으로서 아버님을 따라다닐 때는 뒤에서 많이 졸았어요. 하지만 회장이 되고 나서는 한번도 못 졸았어요. 얼음을 깨어물거나 귀때기를 누르거나 하면서 졸음을 쫓으려 별별 방법을 다 썼죠. 제게는 졸지 말아야 하는 의무만 있고, 졸 권리는 없기 때문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회사를 망가뜨리면 안되니까요.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날 뭘 믿고 맡기실까’ 했는데, 아버님이 ‘넌 더 잘할 거야’ 하셨어요. 제가 느끼는 마음의 짐이 컸어요.”

- 원고는 직접 쓴 겁니까.

“처음에는 제 결심을 미리 귀띔해놓은 직원 4명 중 한 명이 써왔는데,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모든 것을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고 판단해 제가 퇴임 발표 당일 아침에 직접 싹 바꿔 썼어요. 그랬더니 금수저라는 표현이 반감을 일으킬 수 있다며 걱정하더라고요. 저는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제가 금수저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버님 따라다닐 땐 많이 졸았는데, 회장 된 후 얼음 깨물며 잠 쫓아
임직원에게 보낸 퇴진 서신의 ‘금수저’ 표현은 내가 직접 넣었다
4대 세습? 아들도 ‘원 오브 뎀’…능력이 있어야 승계받을 수 있어

이 회장은 코오롱의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손자이자 이동찬 명예회장의 1남5녀 중 다섯째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 후 1991년 부회장을 거쳐 1996년 회장 자리에 올랐다. 코오롱가는 전통적으로 그룹 경영은 장남만 참여하고, 딸들과 사돈가의 경영참여는 철저히 배제한다. 이 회장의 전격 퇴임과 함께 이 회장의 장남 이규호 상무(35)가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전무)로 올라선 것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재계에서는 본격적으로 4세 경영권 세습에 대비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 이 회장은 지주사 지분이 49.7%나 되는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제가 회장이 된 후 아버님께 회사 일을 보고하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하지마’ ‘오지마’ 하시며 내치셨어요. 저도 그럴 겁니다. 아예 회사 근처에도 안 있을 것이고, 듣지도 보지도 않을 거예요. 설령 회사가 망한다고 해도요. 그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니까요. 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어요. 제가 지분을 다 팔아야 할까요? 그간 사람들은 오너 일가가 지분만 가지면 되지, 왜 경영에 참여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해왔잖아요. 지분 갖고 뭐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에요.”

- 이 회장은 과거에 전경련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내 아들에게 코오롱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자식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뀐 건가요. 4대 세습에 대한 비판이 적잖은데요.

“우리 아들은 코오롱 주식을 1%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아들은 이번 전무 승진에 대해 아주 섭섭해해요. 공유주택 사업을 하는 작은 회사를 설립했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전념하겠다고 한 약속을 못 지키게 된다면서 1년만이라도 경영수업을 늦춰주길 바랐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나는 너에게 목표도 주고 가능성도 줄 수 있지만 오늘 안 들어올 거면 코오롱에서 아예 손 떼라고요. 또한 전무가 되어 경영수업 받기를 선택한다면 하루를 5일처럼 쓰라고요. 그래야 코오롱 주주들도 너를 OK 하고, 저쪽도 인정해줄 거라고요. 하지만 아들도 ‘원 오브 뎀’이에요. 능력이 있어야 승계받을 수 있어요.”

- 이규호 전무가 잘할 것 같습니까.

“저보다 훨씬 잘할 것 같아요. 뭐든 집중해서 파고드는 성격이거든요.”

- 코오롱은 ‘장자 승계’ 원칙을 지키는 기업으로도 유명해요. 여동생(1.02%)을 제외하면 4명의 누나가 보유한 주식도 모두 1% 미만이던데요. 이 회장의 두 딸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요. 이 회장은 어려서부터 후계자로 특별대우를 받았나요.

“그랬죠. 언젠가 코오롱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운명으로 알고 컸어요. 할아버지는 세뱃돈도 누나들에게는 그냥 주면서, 제게는 꼭 봉투에 담아 더 많이 주셨으니까요. 주식도 고등학생인 저한테 바로 물려주셨고요. 아버님도 돌아가시면서 주식을 제게 전부 남기셨어요. 대신 딸들에게는 생전에 재산을 팔아 돈으로 주셨죠.”

- 누나들과 여동생은 섭섭하겠는데요.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화목해요. 사실 누님들은 저보다 똑똑해요. 그런데도 제가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받았죠. 평생 누님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저는 재산상속을 포기했어요.”

- 운명으로 알았다지만, 다른 꿈을 꿔본 적은 없습니까.

“골프선수도 해보고 싶었고, 미국 유학 중에 먹어본 맛있는 햄버거 가게를 한국에서 열고 싶기도 했죠. 햄버거 가게는 실제로 아버님께 말씀도 드렸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타박을 듣고 접었어요. 돌아보면 배부른 생각이었죠.”

그가 회장으로 23년간 재임하는 동안 코오롱은 숱한 부침을 겪었다. 하필 수장을 맡았던 시기가 IMF 외환위기 직전이었다. 그는 1999년 신세기통신(현 SK텔레콤) 매각을 시작으로 26개 계열사를 15개로 줄이고 부채비율을 대폭 낮추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4년 코오롱캐피탈 횡령 사건, 같은해 정리해고된 구미공장 노동자들과의 수년간에 걸친 갈등과 화해, 2014년 발생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 등도 코오롱 사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 2014년 2월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 때, 이 회장이 사건 현장에 바로 내려가 사고 수습을 직접 챙기면서 대처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눈앞에 캄캄했겠습니다.

“그날 따라 오후 6시쯤 일찍 귀가해 TV를 보고 있었어요. 마침 대구에 내려가있던 아들이 집사람에게 전화해 빨리 TV 뉴스를 보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딱 보고 ‘우리 거 아니야’라고 했어요. 체육관을 지은 적이 없으니까요. 알고 보니 보고할 정도의 규모가 아니어서 안 했던 거였어요. 여하튼 혹시 몰라 비서에게 알아보라고 했어요. 30분쯤 후 우리 게 맞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달려갔죠.”

- 유족들에게 봉변은 안 당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랬어요. 대국민사과와 희생자 유족들과 장례 및 보상에 대해 합의를 마친 이튿날 합동분향소로 문상을 가려니까 직원이 봉변당한다고 만류했어요. ‘저는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혼자 갔죠. 5대쯤 맞을 각오를 했어요. 그런데 유족 중 어느 누구도 때리거나 고함을 치거나 멱살을 잡는 분이 없었어요. ‘괜찮다’며 ‘가라’고 하시더군요. 어느 아버님은 ‘우리 딸의 운명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며 ‘그러나 우리 딸의 죽음을 돈으로 따지면 화가 납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너무 죄송하고 고마웠어요.”

- 무노동·무임금을 관철하려다 노조와 충돌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회사를 나오며 유일하게 노조와 전화 통화를 할 정도로 친해졌다고요.

“착각인지 모르지만 제가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는 건 직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거예요. 노조도 지금은 99% 열심히 상생해 보자고 하고 서로 잘 지내요.”

- 닷컴 붐이 절정이던 2000년에 생긴 ‘브이 소사이어티(V-Society)’의 핵심 멤버였죠. 당시 최태원(SK그룹)·정몽규(현대산업개발) 회장 등 재벌 2, 3세 오너들과 이재웅(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 이찬진(드림위즈)·안철수(안철수연구소) 대표 등 벤처사업가들이 멤버였는데, 언론에서는 황태자클럽이라느니 불건전 재벌사교모임이라느니 하면서 공격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는 어떤 모임이었나요.

“대기업과 벤처의 만남이었어요. 벤처들의 설명을 우리가 듣고 좋으면 투자해주자는 거였죠. 또 필요하면 우리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요. 아주 좋은 모임이었어요. 이뤄낸 것도 꽤 있었고요. 그 모임에서 인터넷뱅크를 만들자고 자본금을 모아서 정부에 신청하기도 했어요. 당시엔 세계 어떤 나라도 인터넷뱅크를 준비하지 않을 때였는데 정부가 허가해주지 않았어요. 그때 만약 성사됐다면 지금쯤 세계에서 제일 큰 인터넷뱅크가 됐을 거예요.”

- 모임의 멤버수가 얼마나 됐나요.

“100명 정도? 재계 대부분이 끼어 있었으니까요.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은 공부하고 있을 때라 없었고요.”

호방하고 사교적인 성격인 그는 비슷한 시기 경영권을 물려받은 재벌 2, 3세들의 ‘맏형’으로 불렸다. 호형호제하며 학맥으로 뭉쳤다는 얘기도 있다. 이 회장은 신일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메리칸대와 조지워싱턴대학원(MBA)을 졸업했다.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은 신일고·고려대 후배다. 정몽규 회장과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 등은 고려대 후배다.

- 이 회장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인생을 풀(full)로 활용하자, 의무에는 충실하되 나머지는 풍요롭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예요.”

- 부친의 생전 말씀 중 특별히 기억하는 게 있습니까.

“아버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자주 편지를 써주셨어요. 제가 회장이 됐을 때도 당부 편지를 전하셨죠.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어요. 제가 회장에 취임한 후 보내주신 청동으로 만든 독수리와 종이로 만든 부엉이 조각품에 대한 의미도 마음에 잘 새기고 있어요. ‘독수리는 저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넓게 본다. 독수리처럼 위에서 다 보는 시각을 가져라. 부엉이는 깜깜한 밤에도 본다. 어둡다고 눈빛을 잃으면 안된다. 부엉이처럼 어둠 속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라’ 하셨어요.”

- 이 회장은 아들에게 어떤 말을 자주 하나요.

“아들은 자기 일이 바빠 저를 별로 안 따라다녔어요. 저도 강요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훗날 네가 후회할 부분이 하나 있을 것이다, 라고는 말해줬어요. 아비 뒤꼭지 보고 배우라는 게 꼭 좋은 것만 배우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저런 거 안 해야지 하는 점을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고 했죠. 저도 그런 게 있거든요.”

- 예컨대 어떤 거요.

“저는 사람들과 중국집에서든 어디에서든 식사할 때 음식을 제일 늦게 주문해요. 아버님은 항상 제일 먼저 주문하셨거든요. 아버님이 짜장면을 주문하시면 저나 다른 사람들은 다른 걸 먹고 싶어도 똑같은 음식을 시켜야 했어요(웃음). 저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어요.”

- 모든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특히 골프와 낚시 마니아인 것으로 알아요. 주량도 꽤 센 것으로 아는데,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 직원들과 회식을 많이 하는데 논현동에 제가 단골로 가는 중국집을 통째로 빌리는 경우가 많아요. 70명이 가서 회식하면 돌아가면서 직원들과 한 잔씩은 마셔요.”

- 70잔을 마신다고요.

“40잔은 끄떡없어요(웃음).”

이 회장은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창업한 일이 성공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그와의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는 동안, 2016년 국세청이 주식에 대한 상속세 탈루와 관련해 이 회장을 검찰에 고발한 사건의 수사가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가고 연결되지 않았다. 코오롱 관계자는 “회장님의 퇴임 발표와 검찰 수사는 무관하게 이뤄진 것”이라며 “검찰 수사에 대해선 말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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