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그들만의 리그’ 움켜쥔 사법관료들

2018.11.12 00:50 입력 2018.11.12 00:56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행정처 문 닫을 위기 의식에 ‘업무 이관’ 은밀한 작업

“안철상 처장·김창보 차장, 목적 잘 알 것” 내부 비판도

대법원이 법원행정처 폐지와 사법행정회의 신설을 무력화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한 사실이 대외비 문건에서 확인됐다. 사진은 행정처 폐지 등을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공개된 지난 7일 당시 법원행정처 출입구 모습.  권도현 기자

대법원이 법원행정처 폐지와 사법행정회의 신설을 무력화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한 사실이 대외비 문건에서 확인됐다. 사진은 행정처 폐지 등을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공개된 지난 7일 당시 법원행정처 출입구 모습. 권도현 기자

“일제강점기 고위관료들이 광복을 맞이하고도 계속 살아남아 대한민국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법원행정처 법관들을 계속해서 사법행정에 참여시키기 위한 대법원 대외비 프로젝트가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판사가 한 말이다. 여러 법관들은 법원행정처 폐지 무력화 프로젝트를 두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프로젝트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대법원장이 사법관료들에게 둘러싸이고 이들에게 밀리면서 가야 할 방향을 못 잡고 있다”고 했다.

법원행정처 폐지 방안은 지난해부터 나왔다. 국회 개헌특위는 사법행정권을 독립된 헌법기구인 사법평의회에 주는 방안을 지난해 내놨다. 독재정권의 협력자이던 대법원은 민주화 이후 독립성을 강하게 요구받았고, 국민에게 보장받았다. 하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를 계기로 독립성을 가진 대법원에 내부 독재가 자라온 사실이 드러났다. 사법의 민주성 확보라는 새로운 과제를 두고 유럽식 사법평의회 방안이 나온 것이다.

이 방안을 두고 다수의 판사와 김 대법원장도 반대했다. 헌법 개정도 무산되면서 헌법기구인 사법평의회안 논의는 사라졌다.

이후 국회에서 법률 개정에 의한 사법개혁을 제안했다.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의원이 법원행정처를 대체하는 사법행정위원회를 신설하는 방안을, 자유한국당 주광덕 의원이 대법원장 권한을 축소하는 법안을 내놨다.

김 대법원장 취임 이후 만들어진 자문위원회인 사법발전위원회의 후속추진단이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그 권한을 비법관이 참여하는 사법행정회의로 옮기는 방안을 지난주 공개했다. 대법원은 이 법안을 법무부나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발의해야 하는 상황이다.

비밀 프로젝트가 수행된 시점이 이때다. 법원행정처 권한 이양을 골자로 하는 프로젝트는 추진단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발표된 지난 7일 전후로 구성됐다. 법원 관계자는 “이대로 있다가는 법원행정처가 그대로 문 닫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대법원장이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법원의 주류는 이른바 행정처를 거친 사람들이다. 행정처라는 조직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리그가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무렵 강민구 판사, 김시철 판사 등이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를 겨냥해 발언한 것 역시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있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는 대법원이 법원 내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진행한다는 점이다. 일부 법원 관계자들은 “법원행정처 업무를 어디론가 이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일부 법관이 계속해서 맡을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 이렇게 중요한 일을 대외비 문건으로 소통하며 은밀하게 추진한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이 관계자들은 “비밀스럽게 하는 바람에 이 문제가 잘못된 것으로 지적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러 판사들은 법원행정처를 되살리려는 생각이 이 프로젝트에 분명히 담겼다고 본다. 아무도 모르게 회의를 열고 문서에 대외비 도장을 찍은 것도 이런 의도 때문이라고 여긴다. 법원행정처 소식에 밝은 법원 관계자들은 “적어도 대법원 넘버 2인 안철상 처장과 넘버 3인 김창보 차장은 이 프로젝트의 방향과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라며 “법원행정처 내부에서는, 법원행정처가 실수를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판사들 인사에 관여하고 사법행정을 결정하게 두어서는 안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고 전했다.

[단독]‘그들만의 리그’ 움켜쥔 사법관료들

법원행정처 시나리오는 사법관료를 사법정책연구원과 사법연수원으로 보내 사법행정회의를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판사들은 전했다. 법원 관계자는 “후속추진단 법안에서 사법행정위윈회는 ‘의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총괄기구’인데 이를 ‘의사결정을 총괄하는 기구’로 바꿔 통과시키면, 대법원장이 연구원과 연수원을 움직이면서 행정처 기능을 되살릴 수 있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이 대외비 프로젝트 실체를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취재에 응한 많은 법원 관계자들은 “김 대법원장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았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법원장을 돕는 사람이 적은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김 대법원장이 9월 발표한 법원 제도개혁 추진 방안에서 첫 줄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법원 가족 여러분’ 빼고는 초안을 다 고쳐야 했다고 한다.

김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를 장악하지 못한 채 떠밀려 다닌다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법원 관계자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몰랐다고 해서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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