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박근혜 7시간’ 꽁꽁 숨긴 주역들에 ‘찜찜한 유죄’

2019.06.25 22:15 입력 2019.06.25 22:49 수정

청와대 포괄적 지시·해수부 암묵적 공모 ‘위법’ 첫 확인

“다른 권력기관도 책임 가능성” 사유 ‘가벼운 양형’ 논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막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왼쪽부터)이 25일 1심 선고가 내려진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을 나서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막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왼쪽부터)이 25일 1심 선고가 내려진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을 나서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막은 혐의(직권남용)로 기소된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 대해 법원이 25일 유죄 판결을 내렸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청와대와 해양수산부가 정치적 득실 때문에 조직적으로 진실을 가린 행위가 ‘위법’하다고 처음 확인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부 혐의는 무죄가 선고됐고, 형량도 집행유예에 그쳤다.

서울동부지법 형사12부(재판장 민철기 부장판사)는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종범 전 경제수석, 김영석 전 해수부 장관, 윤학배 전 차관에 대한 판결에서 청와대와 해수부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고 인정했다.

이 전 비서실장과 조 전 수석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들은 해수부가 작성한 특조위 방해 문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며, 그러한 문건 작성을 지시한 적도 없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정부기관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청와대에 속했고, 이들 지시로 해수부 문건들이 작성됐다고 판단했다.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 조사 안건을 특조위가 의결하려고 하자 해수부가 대응 방안을 마련한 것이 이 전 실장 지시로부터 시작됐다고 본 게 대표적이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이 2015년 10월30일 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특조위가) 청와대 행적 조사 안건을 채택하지 못하도록 해수부가 대응하라고 지시했다”며 “구체적인 문건의 작성까지 지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위와 역할, 장악력 등을 고려할 때 문건 작성에 본질적 기여를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지휘계통에 따라 공모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 전 장관과 윤 전 차관은 청와대 지시를 아래에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조 전 수석은 특조위 방해의 시발점이 된 2015년 1월19일 서울 중구 소공동 플라자호텔 회의에 자신은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플라자호텔 회의 직후 조 전 수석이 해수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로 질책한 것은 분명하다”며 “이러한 질책은 특조위 직제·예산이 과다하게 추진되지 못하도록 해수부가 플라자호텔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대응조치를 취하라는 포괄적인 지시를 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조 전 수석은 ‘특조위 설립준비 추진경위 및 대응방안’ 문건, 규모가 축소된 직제·예산안 작성에 대해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에 제공할 용도로 해수부 공무원에게 ‘특별조사가 필요한 세월호 특조위’라는 제목의 문건을 쓰게 한 혐의도 유죄가 나왔다. 이 문건은 실제 새누리당 홈페이지에 논평으로 올라갔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과 김 전 장관, 윤 전 차관이 공모해 직권남용의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하급공무원들에게 보장하는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하는 위법한 행위”라고 했다.

재판부는 일부 혐의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죄로 봤다. 하급공무원들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공모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특조위 파견 해수부 공무원들에게 특조위 동향을 비공식적 방법으로 파악해 보고하게 한 혐의에 대해서는 윤 전 차관만 유죄를 받았다.

재판부는 양형이유에서 “당시 정부·여당이 기본적으로 특조위 진상규명 활동을 경계하는 입장에 섰던 것으로 보이고, 피고인들 외에 다른 권력기관에 의한 정치적 공세가 특조위 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며 “따라서 특조위 활동이 저해된 모든 책임을 피고인들에게 돌리기보다는 상응하는 범위 내에서 적절한 형벌이 부과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고인들의 특조위 방해 행위로 진상규명이 지연되는 등 400여명의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집행유예는 가벼운 형량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단순 공무방해 문제 아닌, 책임자 처벌 중요 길목을 막은 것”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

“이들로 인해서 우리는 5년을 늙은 거예요. 진상규명이 5년 더 늦어진 건데, 누가 책임질 건가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막은 혐의로 기소된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 대한 1심 판결 선고를 앞둔 25일 낮 서울동부지방법원 앞에서 만난 ‘큰 건우엄마’ 김미나씨가 말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방해 사건은 유가족들이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다. 박근혜 정부가 인력과 예산을 주지 않아 진상규명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인사들에게 적용된 직권남용죄는 피해자가 없는 범죄이기 때문에 특조위 방해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가족 목소리는 배제됐다.

가족협의회 사무처장인 ‘큰 건우아빠’ 김광배씨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보고 겪은 일을 한마디로 “무책임”이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피고인들은 일말의 도의적인 책임을 지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법이 사람 위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304명의 생명이 사라진 것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재판에 넘겨져 유일하게 처벌받은) 해경 123정의 경장에게만 책임을 물으면 끝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배서영 4·16연대 사무처장은 “(수사와 재판에서) 희생자들을 없는 존재처럼 여겼다”며 “특조위 공무가 방해된 게 문제가 아니라 참사 책임자를 처벌해야 할 중요 길목을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 막은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특조위를 ‘세금 도둑’으로 몰아붙인 영향은 아직도 있다. 김씨는 “(박근혜 정부 때 프레임 때문에) 지금도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고 했다.

이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안개 속 불빛을 찾아가는 느낌이었죠. 5주기를 기점으로 명확히 했어요. 책임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진상규명의 시작이라고요. (유죄 선고 등을 받은) 5명이 바로 그렇습니다.” 김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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