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보고했다”는데 “모른다”는 윗선은 무죄…책임은 누가

2020.09.23 21:22 입력 2020.09.23 21:49 수정

법원장만 몰랐다?

지난 18일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 “올바른 판단을 해주신 재판부께 감사드린다”며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8일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 “올바른 판단을 해주신 재판부께 감사드린다”며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장만 몰랐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60)에게 지난 18일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6부(재판장 김래니) 판결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재판부는 2016년 검찰이 서울서부지법 집행관사무소 비리를 수사하며 청구한 영장 기록의 수사 정보가 보고서 형태로 법원행정처로 전달되고, 영장청구서 사본과 관련자의 검찰 진술 내용이 유출된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이는 서울서부지법 기획법관이던 나상훈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한 일이고 당시 서울서부지법의 가장 윗선 책임자이던 이 전 원장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다. 법원장은 정말 몰랐을까. 기획법관과 법원 직원들을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인가.

아래에서 일을 벌인 것이라는 논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다른 사법농단 재판에서도 나온다. 피고인들은 재판 개입·거래와 관련된 법원행정처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자신들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불이익한 발령이 났는데 ‘전국 3000명 법관의 인사를 다 알 수는 없지 않으냐’는 식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위해, 좋은 평정을 받기 위해 일선 판사들이 윗선 눈치를 보는 법관의 관료화는 사법농단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이는 오히려 형사재판에서 윗선 책임을 면해주는 모순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광렬 판결과 달리 ‘비밀성’은 인정

재판부는 ‘수사정보 유출’ 사건서
수사정보의 ‘비밀성’은 인정했지만
가장 윗선인 이태종 전 법원장의
지시·승인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재판의 첫 쟁점은 법원행정처로 넘어간 수사 정보가 공무상 비밀누설죄에서 말하는 ‘비밀’에 해당하는지였다.

지난 2월 신광렬 판사 등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유영근) 판결은 이 첫 단계에서부터 무너졌다. 재판부는 신 판사가 영장전담 판사로부터 확보한 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알려준 ‘정운호 게이트’ 관련 수사 정보는 “실질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비밀이 아니라고 했다. 정운호 게이트를 수사하던 당시 이원석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도 김현보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에게 수사 정보를 알려줬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법원 내에선 “윤리감사관이 친분 있는 검사로부터 얻어낸 수사 정보는 또 다른 공무상 비밀누설 행위로 얻어낸 비밀자료일 뿐”이라는 반박이 나왔다.

이 전 원장 사건의 재판부는 법원행정처로 넘어간 수사 정보가 비밀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나 판사가 작성한 문건 중 “오○○, 조○○의 계좌에서 자기 월급 이외의 많은 입금내역 발견(영장전담 판사의 전언)” “수사보고서 중에 ○○○은 오○○, 조○○ 이외에 ○○○ 등에게도 부풀려진 인건비를 지급했다고 진술” “기록목록에 ○○○가 피의자 오○○에게 9회에 걸쳐 1170만원을 송금한 내역이 있는 것으로 기재돼 있음” 등이다.

재판부는 “피의자 측에 알려질 경우 피의자가 그에 맞추어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 진술을 준비할 수도 있는 내용으로 수사기밀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특히 2016년 10월25일자 문건 중 ‘수사기록 5권 2645쪽 수사보고서 내용’이라는 항목에 대해 재판부는 “이 부분은 수사기관이 현재 파악하고 있는 구체적인 혐의 사실, 증거관계, 피의자들의 행적 등에 관한 것으로 수사기밀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봤다. 나 판사는 중요 사건을 법원행정처에 보고하기 위해 수사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이는 ‘직무상 비밀’이 맞다고 했다. 비밀인 수사 정보가 누설되면 수사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죄 판단을 향해 한 발을 뗀 것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29)]법관은 “보고했다”는데 “모른다”는 윗선은 무죄…책임은 누가 이미지 크게 보기

■법관 증언 못 믿는다는 재판부

‘이 전 원장에게 보고했다’는
법관 증언의 신빙성은 부인한 채
법관이 혼자서 상급자 몰래
‘임종헌에 직보’했다는 것

그럼에도 이번 판결이 무죄가 된 이유는 이 전 원장의 지시·승인이 있었는지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재판부가 봤기 때문이다. 임 전 차장에게 직접 문건을 보낸 사람은 이 전 원장이 아니고 나 판사다. 나 판사가 이 전 원장의 지시·승인에 의해 임 전 차장에게 수사 정보를 보냈기 때문에 이 전 원장이 나 판사의 ‘공범’으로 처벌돼야 한다는 게 검찰 공소사실이다. 즉 이 전 원장의 지시·승인이 있었는지가 중요했다.

재판부는 이 전 원장은 집행관사무소 비리에 대한 ‘철저한 감사’만 지시했을 뿐, 수사 정보 전달은 지시·승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 전 원장의 지시·승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는 나 판사 법정 증언의 신빙성을 부인했다. 법률 전문가인 법관 증인의 증언은 일반 시민의 증언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될 여지가 많지만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나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집행관사무소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처음 보고한 것은 2016년 9월13일자 문건이다. 이 문건은 공소사실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이어진 법원행정처 보고의 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나 판사는 9월13일자 문건을 “이 전 원장에게 대면 보고했다”고 이 전 원장 재판은 물론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도 말했다.

재판부는 나 판사 증언에 관해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거나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그 이유로 ‘추석연휴’를 댔다. “9월13일자 문건의 완성 시각이 오후 6시15분경이고, 그날은 추석연휴 바로 전날이어서 법원장인 피고인이 그 시각까지 청사에 남아있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바, 나상훈이 피고인에게 직접 대면 보고했다는 이 부분 진술은 정확한 기억에 근거한 것인지 의문이다.” 이 전 원장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이 보고 시점이 퇴근시간 무렵인 점을 들며 이 전 원장에게 보고했고, 그가 승인한 게 맞느냐고 거듭 질문했지만 나 판사가 “제 기억으로는 그렇다”고 했던 부분이다.

나 판사는 공소사실에 포함된 10월18일자 문건부터는 이 전 원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검찰 조사 초반에 진술했다가 말을 바꿨다. 자신이 문건을 첨부해 법원행정처로 보낸 e메일을 확인한 후 검찰 조사와 법정 증언에서는 “이 전 원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해당 e메일엔 이런 문장이 있다. “원장님께서 내일 인편으로 보내자고 하셨고 차장님께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차장님께서 암호 걸어서 메일로 일단 보내달라고 하셔서 차장님께 보내드렸습니다. 원장님의 취지를 살피시어 제가 이 메일을 보내는 것을 비밀로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마 원장님께서 인편으로 내일 오전 중으로 보고서를 보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 판사가 10월21일자 문건을 첨부해 법원 직원들에게 보낸 e메일에는 이런 대목도 등장한다. “국장님, 과장님. 금요일 밤에 원장님께 메일로 보고드렸던 보고서입니다.”

재판부는 이 부분에서도 나 판사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또 e메일 내용을 검찰 주장과 거꾸로 해석했다. e메일은 나 판사가 법원행정처 보고 의사를 밝혔는데도 이 전 원장이 ‘제지’한 증거라고 했다. 또 나 판사가 이 전 원장과 공모했다면 굳이 이 전 원장 의사에 반해 미리 문건을 법원행정처에 보낼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e메일은 이 전 원장이 내일 보낼 문건을 자신이 미리 보낸다는 취지로 ‘전달 시기’에 대한 언급만을 담고 있다. 맥락상 이 전 원장이 문건을 보내라고는 했고, 다만 ‘내일’ 보내라고 했다는 의미다. 재판부는 10월21일자 문건은 나 판사가 이 전 원장에게 송부한 것으로 보인다고 인정하면서도, 법원행정처 보고 이후 이 전 원장이 사후적으로 알게 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나 판사 증언에 의하더라도 법원행정처 보고를 알렸을 때 이 전 원장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이 전 원장이 공모하지 않은 근거라고 판결문에 썼다. 이 판단대로면 나 판사가 직속 상급자인 이 전 원장 몰래 수사 정보를 빼내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공무상 비밀누설의 주체가 된다. 이 전 원장 승인을 받았다는 나 판사 증언도 잘못된 게 된다. 다만 재판부는 나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문건을 보낸 게 공무상 비밀누설죄에서 말하는 ‘누설’인지에 관해서는 나 판사의 방어권 행사가 되지 않았다면서 이번 판결에서 판단하지 않았다. 앞서 신광렬 판사 등의 무죄 판결에서는 ‘언론이나 국회 대응’ ‘사법 신뢰 회복 방안 마련’을 위해 수사 정보를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것은 정당한 사법행정이라며 누설도 아니라고 했다.

법관·직원들을 움직이게 한 힘
윗선도, 재판부도 몰랐을까

집행관사무소 비리에 대한 감사를 한다는 이유로 형사과에서 검찰이 접수한 영장청구서의 사본을 총무과에 넘겨주고, 감사계에서 관련자들의 검찰 진술 내용을 확보한 것도 각각 형사과장과 감사계장이 독자적으로 승인하거나 결정한 일이라고 재판부는 밝혔다. 감사계 문건엔 비리 관련 검찰 조사에서 검사가 무엇을 물어봤고, 뭐라고 답했는지가 담겨 있지만 재판부는 “이 전 원장에게 검찰 진술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한 것은 아니다”라는 감사계장 말에 초점을 맞췄다. 결과적으로 직권남용 혐의도 무죄가 나왔다.

검찰은 당초 사법농단 사건을 재판에 넘기면서 기획법관이나 법원행정처 심의관 등 평판사급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했다. 지위에 따라 책임 소재를 가른 것이다. 나 판사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윗선에는 무죄가 선고되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헌법은 검찰의 강제수사는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통해서만 하도록 정한다. 법원은 영장심사를 하는 기관이고, 마침 수사 대상이 법원 신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행관사무소 비리였을 뿐이다. 형사재판의 무죄 선고율은 1%로 알려져 있다. 사법농단 사건에선 아직 한 번도 유죄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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