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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재판을 하는 곳이지만, 재판외 업무도 적지 않다. 재판을 하기 위해 법원 조직을 운영하고 인사와 예산을 짜며 각종 정책을 기획·집행하는 ‘사법행정’이 있다. 매년 2월 전국 법원에서 판사 800명 이상이 인사발령을 받아 이동한다. 사법부 1년 예산은 2조원이 넘는다. 사법행정은 재판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행법상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권한은 대법원장에게 있다. 대법원장은 전국 법관 3000여명의 인사권을 갖고 있고, 각급 법원의 법원장들은 소속 법관들에 대해 평정을 매긴다.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 실·국장과 심의관들, 법원장을 보좌하는 수석부장판사도 있다. 이른바 법원의 엘리트 코스로 불리는 자리이다. 이런 ‘사법행정 라인’에는 여성 법관이 얼마나 있을까.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5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장남 제사 주재자 지위 인정 여부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5월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장남 제사 주재자 지위 인정 여부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경향신문이 법원 내 사법행정과 관련된 주요 보직의 현황을 전수 분석한 결과 여성 법관의 수는 남성 법관에 비해 한참 적었다. 올해 전국 37개 법원 중 여성 법원장은 울산지방법원 한 곳 뿐이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장 권한을 분산하고 판사들 의견을 반영하겠다며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했지만 이 제도 시행 후 법원장으로 임명된 여성 법관은 없었다. 현재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차장, 실·국장, 심의관 총 14명은 모두 남성이다.

판사들은 사법행정 라인의 불균형한 성비는 문제라고 말한다. 주요 사법정책의 의사결정을 남성들이 주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나 간부로 일한 뒤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고 법원장 또는 대법관이 되는 ‘엘리트 코스’를 남성들이 지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대법원 구성과도 무관치 않다고 판사들은 지적한다. 사법행정을 중심으로 남성 법관들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풍토 속에 여성 법관들은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부에 놓인다.

유엔(UN) 인권이사회의 법관·변호사의 독립성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2021년 UN총회에 낸 보고서에서 “사법행정 체제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대표성은 인권과 실질적 평등의 효과적인 보호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 법원에서 10년 넘게 일한 한 여성 판사는 “한 번도 내가 법원의 주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판사는 “공고한 남성연대가 법원에 있다”고 했다.

📌[플랫]여성의 말을 자르는 남성들

2004년에도, 2023년에도 여성 법원장은 ‘1명’

2004년 이영애 춘천지방법원장이 ‘1호 여성 법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처음엔 여성이 소수 입장이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있다. 여성 법조라는 말이 아예 없어지는 이상적 시대가 오지 않을까”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올해 전국 37개 법원 중 법원장이 여성인 곳은 울산지방법원 1곳(서경희 울산지법원장) 뿐이다. 법원장급이 참석하는 전국법원장회의를 기준으로 따지면 윤승은 법원도서관장을 포함해 여성이 단 2명이다. 법원장회의는 법원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대법원장에게 자문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인데, 여성 참석자가 4.8%에 불과하다. 울산지법은 법원장으로 근무하기가 쉽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다. 유일한 여성 법원장을 이곳에 배치한 데 대해 법원 안팎에선 볼멘소리가 나왔다.

여성 법원장이 극소수인 건 올해 만이 아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기 말인 2017년에는 전국 법원의 모든 법원장이 남성이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임기가 시작된 2018년에야 여성 법원장이 그나마 임명됐다. 그렇지만 3명을 넘지는 못했다. 법원장회의 참석자를 기준으로 여성은 2018년 3명, 2019년 2명, 2020년 1명, 2021년 3명, 2022년 3명이었다. 2020년에는 법원장회의에서 여성 비율이 2.5%로 내려갔다.

[이토록 XY한 대법원]법원의 ‘엘리트 코스’… 사법행정 꽉 잡은 법관들의 ‘남성연대’[플랫]

김 전 대법원장은 야심차게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했지만 2019년부터 2022년까지 5차례 추천된 여성 법관은 모두 법원장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2019년 의정부지법 후보로는 여성 법관이 단독 추천됐지만 후보에 없던 남성 법관이 법원장이 됐다. 법원장 후보 추천제로 도리어 법원의 유리 천장이 공고해졌다는 말이 나왔다.

지원장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국 법원장과 지원장을 모두 분석한 결과 여성의 수는 2019년 7명(8.8%)에서 2022년 13명(15.7%)까지 늘어났다가 2023년 7명(8.4%)로 뚝 떨어졌다.

각급 법원의 사법행정 업무에서 법원장을 보좌하는 수석부장판사 중 여성 법관 수 역시 1명(2017년)에서 5명(2019년)까지 늘어났으나 올해 4명에 그쳤다. 수석부장판사는 법원장에 이어 대법관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의 첫 단계로 여겨진다. 수석부장판사를 거쳐 법원장이 되고, 법원장 경험을 발판삼아 대법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기수가 낮을 때 수석부에서 경험을 쌓은 법관이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기획법관(현 사법행정지원법관)을 맡는 경우도 잦다. 이 때문에 수석부는 평정을 신경 쓰는 법관들이 선호하는 자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사법행정에 한 번 발을 들이면 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사법행정을 맡기 쉽고, 이런 이력이 쌓이면 대법관 등으로서 자질을 갖췄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김형두 헌법재판관의 경우 2001·2005년 사법정책연구심의관, 2006년 사법정책실 정책2심의관, 2017년 서울중앙지법 민사제2수석부장판사, 2021년 법원행정처 차장을 거쳐 2023년 헌법재판관이 됐다.

반면 사법행정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첫걸음에서 밀려나면 이후에는 진입 자체가 어려워진다고 여성 판사들은 말한다. A판사는 “여성 법관의 경우 초임 시절에 주요 보직에 못 가게 되면 그 이후 부터는 ‘안 해봤다’는 이유로 안 데려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배제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사법행정 경험은 대법관이 되는 발판으로 여겨지지만, 여성 법관이 최초로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된 건 2005년이 되어서였다. 올해 전국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의 성별을 모두 살펴본 결과 여성 법관은 다시 0명이었다.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첫 여성 수석부장판사가 나온지 4년 밖에 되지 않았다. 2019년 우라옥 수석부장판사가 나올 때까지 1995년부터 서울중앙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역임한 법관 40명 모두 남성이었다.

법원행정처 규모가 줄자, 여성 법관이 사라졌다

대법원장의 손발 역할을 하는 법원행정처에도 여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법원행정처 근무는 엘리트로 인정받는 법관들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이들이 가는 보직으로 취급된다. 법원장 이력과 마찬가지로 행정처 근무 경험도 대법관이 되기 위한 필수요소로 꼽힌다. 법원행정처 역시 김소영 전 대법관이 2002년 첫 여성 조사심의관을 맡았을 때 화제가 될 정도로 과거에는 ‘금녀의 구역’으로 꼽혔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판사가 승진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이른바 사법의 관료화가 심해지자 법원 안팎에선 법원행정처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행정처의 비법관화를 추진했다. 사법정책 결정을 법원 내·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사법행정자문회의가 하도록 바꾸면서 법관이 맡는 심의관 자리를 축소했다. 이 과정에서 행정처 내 소수이던 여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마지막 인사를 냈던 2017년 법원행정처 구성을 보면 차장 이하 총 35명 중 여성은 4명이었다. 2018년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취임한 후에는 총 33명 중 여성이 5명이었다. 여성 비율이 11%에서 15%로 늘어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주요 보직으로 꼽히는 인사제2심의관 자리에도 최초로 여성 판사가 배치됐다. 사법지원총괄심의관 자리도 여성 부장판사가 맡았다.

그러나 2019년부터 법원행정처가 본격적으로 축소되면서 여성이 늘어나던 흐름이 끊어졌다. 2019년부터 차장 이하 총 24명 중 여성은 3명에 그쳤다. 2023년 법원행정처 차장 이하 법관 인사 14명은 모두 남성으로 채워졌다. 기획총괄·사법지원총괄·인사총괄심의관 등 보직을 전부 남성이 맡았다. A판사는 “행정처 내 심의관이 스무명이 넘어갈 땐 여성 법관이 없을 수 없었다”며 “비법관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여성 법관이 다 빠지게 됐다”고 했다.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꼽히는 법원행정처 차장은 한 차례도 여성이 맡은 적이 없다. 사무를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처장은 역대 26명 중 25명이 남성이었다.

여성 법관은 ‘여성의 대표’만?

어떤 판사들은 이런 법원의 현실을 두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고 말한다. 법원장을 할 만한 연차에 여성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란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변화가 너무 느린 것”이라며 의지의 문제라고 반박하는 판사들도 있다. B고법판사는 “과거와 달리 법원장 등 자리에 갈 수 있는 여성의 인력풀 자체는 많이 쌓였는데 여전히 리더 역할을 하는 여성 법관이 없다”며 “법원 내에서 여성에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역할 자체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 게 문제”라고 했다.

예컨대 여성 법관은 아동·여성·젠더와 같은 현안에 의견이 필요할 때만 찾고, 헌법·조세·도산법 등 전문성을 가진 분야나 사법행정의 주요 현안과 관련된 위원회의 장 같은 자리는 모두 남성 법관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여성 법관은 가사나 젠더 이슈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B판사는 “여전히 여성 법관은 ‘여성의 대표’ 정도로 여기는 게 법원의 인식”이라고 했다.

여성 법관에게 사법행정의 주요 보직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 문제는 단순히 여성이 의사결정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법행정 경험이 대법관의 주요 자질로 여겨지는 터라 여성 법관들은 대법관 후보에 오르는 절차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될 수밖에 없다. 사법행정을 중심으로 한 남성연대가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유지된 탓에 여성 법관이 대법원의 중심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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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시스템이 공고한 남성연대를 토대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최종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의지만으로 ‘성평등한 법원’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 전 대법원장은 기수를 파괴하고 여성 법관을 적극적으로 발탁하려고 시도했지만 임기 말에는 동력을 잃었다. 다음 대법원장이 누가 오느냐에 따라 법원장 후보 추천제 같은 제도들도 폐지될 가능성이 있다.

C부장판사는 “김 전 대법원장이 사법행정을 판사들 손에서 탈피시키겠다고 강조했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자원을 분배하고 인사를 담당하는 핵심적인 자리는 조직의 수장이 신임하는 사람들로부터 채워질 수밖에 없다”며 “김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도 사법행정 관련 보직을 거의 남성 법관들이 독식했고, 퇴임 직전에는 양형위원회 정도 빼놓고는 전부 남성 법관이 자리를 맡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성 법관도 잘할 수 있는데 아예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D판사는 “전체 법관 중 여성의 비율(35%)로만 보면 여성 법관이 중심부에서 한참 밀려나있는 법원의 현실이 희석된다”고 했다.

▼ 김희진 hjin@khan.kr · 이혜리 lhr@khan.kr · 김혜리 기자 harr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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