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리는 노동

사람 대신 로봇…일자리 없어지진 않겠지만 ‘노동 양극화’ 우려

2020.01.13 06:00 입력 2020.02.05 15:39 수정 심윤지·최미랑 기자

②무인화의 허구

누구를 위한 자동화인가
퇴사자 생겨도 충원 안 하는 마트…기계 도입에도 업무 강도는 더 세져
지점 통폐합하는 금융업…하청 직원 줄이고 기존 정규직으로 채워
“일부 고숙련 노동자·기계보다 비용 낮은 저임금 노동자만 남게 될 것”

지난 9일 경기 의왕시 롯데슈퍼 오토프레시에서 ‘장보는 로봇’이 온라인 주문 물품을 담고 있다(위 사진). 로봇이 골라 담은 물품은 배송 직전 사람이 최종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아래). 롯데슈퍼는 물류배송에 로봇을 도입한 결과 사람이 할 때의 5분의 1가량으로 시간을 줄였다고 밝혔다. 권도현 기자

“일하는 것은 여기가 훨씬 편하죠. 기계가 다 가져다주니까요.” 지난 9일 경기 의왕시 롯데슈퍼 오토프레시(온라인 전용 배송센터)에서 만난 한수연씨(36)는 기계가 주문 상품을 빠짐없이 담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동화 물류시스템이 도입된 오토프레시 의왕센터에서 8개월 전부터 일하고 있다.

머리 위로는 ‘장보는 로봇’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19대의 로봇들은 15단으로 쌓인 7150개의 바구니 위를 상하좌우 초속 3.3m로 오가며 고객이 주문한 물건을 최대 30개까지 골라 담는다. 예전 같으면 사람이 매장을 오가며 직접 했을 일이다. 주문 하나 처리하는 데 드는 시간은 최대 5분. 사람이 할 때에 비해 5분의 1로 줄었다.

이런 변화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해 보인다. 작업 시간이 줄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덜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계가 대신하기 어려운 냉동·신선식품 관리 등만 최저임금 수준(월150만원)의 노동자들이 대신한다. 유통업체들은 온라인 쇼핑 증가에 따라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 직원 수를 대폭 줄인 물류센터를 늘려가고 있다.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란 우려에 의왕센터 관계자는 “어쩔 수 없는 흐름 아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자동화를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규정하면 ‘없어질 일자리’에 있는 이들이 겪는 고통 역시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되기 쉽다. 경향신문이 만난 노동자들은 기계화 이후 인력감축과 업무재배치로 노동강도가 오히려 세졌다고 호소했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기도 했다. 기계값이 사람값보다 비싼 고된 노동도 여전히 노동자의 몫으로 남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자동화일까.

■ 제2의 톨게이트 수납원들

이마트는 최근 2년 사이 80여개 매장에 무인 계산대 등 기계를 도입했다. 17년차 마트 노동자 윤현숙씨(50)가 일했던 대전둔산점도 그중 하나다. 윤씨는 “있으나 마나 한 옛날 기계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기계가 너무 똑똑했다”고 말했다. 윤씨의 주업무는 다양한 상품권을 교환해주는 것이었다. 기계는 거의 모든 일을 대신할 수 있었다. 고객 반응이 위기감을 더했다. 젊은 고객은 직원 쪽으로 아예 발길을 주지 않았고 중장년도 일단 기계로 간 뒤에 직원을 불렀다. “고객들이 가르쳐 달라는데 어떻게 해요. 우리 손으로 일자리를 없앤 거죠.”

이마트 측은 기계 도입이 “1~2인 가구의 소액결제 수요 증가에 맞춰 소비자 편익을 늘리기 위한 선택”이라며 “다른 업무로 재배치되기 때문에 기존 직원이 일자리를 잃은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업무 재배치는 큰 도전이다. 윤씨가 일한 상품권 부서는 기계 도입 후 고객만족센터와 통합됐고 윤씨는 이마트 자체 브랜드인 노브랜드 매장으로 발령 났다. 다른 직원도 뿔뿔이 흩어졌다. 윤씨는 “이마트와 달리 노브랜드는 계산과 진열, 재고조사와 정산까지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하다”며 “회사에 어려움을 이야기해도 ‘싫으면 그만두라’는 답이 돌아온다”고 했다.

최저임금으로 한 점포에서 오래 근무한 여성 사원들은 타점 발령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기보다 퇴사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둔 사람이 생겨도 신규 채용은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기계 도입 후 오히려 노동 강도가 세졌다고 호소한다. 최철한 마트노조 홈플러스지부 정책국장은 “기술이 발전하면 노동 강도가 줄어야 하는데 기계 도입 후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돌아온다”고 했다.

정작 고된 노동을 덜어주는 기술 도입은 더디다. 이마트 서울성수점에서 마트에 들어온 물건을 창고로 옮기는 일을 하는 장성민씨(36)는 후방 창고의 자동화 수준을 묻자 “하나도 안돼 있다. 지게차로 자동화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창고에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의심케 하는 풍경이 여전하다. 높은 곳까지 물건을 옮기기 위해 “스파이더맨처럼 매달려” 일하는가 하면, 무거운 물건을 직접 옮기다 근골격계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다. 노조의 오랜 요구로 1년 전쯤 ‘전동자키’라 불리는 운반기계가 도입됐지만 수량 부족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금융업은 지급결제 시스템 변화와 비대면 거래 증가로 대량실업 가능성이 높은 산업이다. 한국씨티은행은 2017년부터 영업점을 126개에서 36개로 줄였다. 노조는 정규직 감원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점포 통폐합에 합의했다. 영업점 직원들은 자산관리(WM)센터, 고객만족센터 등으로 재배치됐다. 피해는 콜센터 등 하청직원에게 돌아갔다. 하청직원들의 자리는, 영업점 자리를 잃은 정규직이 채웠다.

이는 금융권 전반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로봇프로세스자동화(RPA)라 불리는 단순 사무업무 자동화 프로그램은 이런 흐름을 가속화한다. 백정현 사무금융노조 교육국장은 “대면업무를 하던 ‘프런트오피스’를 ‘백오피스’로 보내는 단계가 이미 진행됐다”며 “금융위기가 재발해 금융사들이 적자를 보는 순간이 오면 백오피스 인력을 구조조정하는 단계로 갈 것이다. 경기가 다시 회복돼도 기계로 대체가능한 업무를 위해 사람을 뽑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자동화 이후 일자리는…노동의 양극화

미국 대선에서 앤드루 양의 부상을 보면 자동화로 인한 고용 감소는 전 세계적 흐름이다. 앤드루 양은 2000~2010년 미국 제조업 일자리 감소의 88%가 자동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논쟁을 일으켰다. 자주 인용되는 연구는 옥스퍼드대 칼 프레이·마이클 오즈번 연구팀의 2013년 분석이다. 이들은 ‘기술발전으로 20년 내 미국 일자리 47%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2016년 인공지능(AI) 알파고 대국과 더불어 대량실업 담론을 이끌어온 쌍두마차다. 이 분석은 ‘일부 직무가 대체되지 직업 자체가 대체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등 반박에 부딪혔고, 이후 보다 완화된 일자리 감소 전망들이 나온 상태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나 플랫폼 경제에서 새 일자리가 생겨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고용량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대체로 수렴되는 전망은 중숙련 일자리가 줄어들고 소수의 고숙련과 다수의 저숙련 일자리가 남는 ‘일자리 양극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오은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수한 한 명이 일과 성과를 몰아 받고 나머지는 기계가 대체하며, 기계로 대체하는 것보다 비용이 낮은 저임금 노동자만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변화 과정에서 기존 불평등 구조의 개선이 없고, 노조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경우 미래사회는 더 심각한 ‘양극화’에 직면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상자에 구멍 하나 뚫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마트 노동자들 ‘손잡이 구멍’ 요구
노동부·마트·제조사 등 논의에도
올 설 이전엔 해소하기 어려울 듯


기술은 노동자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윤만 따진다면 ‘아니요’다. 하지만 노동자를 우선순위에 두고 이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댄다면 바뀔 수 있다.

마트 노동자들이 무거운 상자를 덜 힘들여 옮길 방안을 찾기 위해 고용노동부가 나섰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관계자들을 면담하고, 생활용품 제조업체와 종이상자 제조공장까지 둘러봤다. 오는 17일엔 LG생활건강, CJ, 애경, 대상, 동원 등 마트에 가장 많이 납품하는 생산업체들과도 만난다.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마트 노동자들은 지난해 10월 기자회견을 열고 “제발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라도 뚫어달라”고 호소했다. 하루 수십번씩 무거운 상자를 들어올리는데, 손잡이 구멍이라도 있으면 작업 부담을 10~40%까지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명절로 물량이 증가할 때는 강도가 더 높다고 한다.

마트들은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다. “상자는 납품업체들 것이어서 간섭하기 어렵다”고 했다. 생산업체들도 각자의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상자 제조공장에선 구멍 뚫는 공정이 추가되면 “1분에 400장 찍던 상자를 200장밖에 찍지 못한다”고 했다. 또 구멍을 뚫으면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더 단단한 재질의 종이를 써야 해 단가가 상승한다고 했다. 제품 특성상 박스를 밀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샴푸같이 향이 있는 제품 용기의 펌프 구멍으로 벌레가 들어가 알을 낳는 일이 간혹 생긴다는 것이다.

이번 설에도 마트 노동자들이 손잡이 구멍이 뚫린 상자를 ‘선물’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근규 노동부 산재예방정책국 사무관은 지난 9일 통화에서 “구멍을 뚫는 방법을 포함, 다른 창의적 방법도 있는지 대형마트·납품업체들과 계속 논의해볼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손잡이 구멍 그 자체가 아니라 작업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를 위한 상자 구멍 하나도 뚫지 못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역설’을 다음 명절까진 해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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