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서울, 역사 속으로 떠나보낸 것들

2015.12.30 15:59 입력 2015.12.30 17:26 수정

장소가 사라지면 그곳에 살던 이들의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 2015년 한해, 많은 것을 새로 맞이하고 떠나보낸 가운데 서울에서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구조물들이 수명을 다했다.

■서울역 고가도로(1970~2015)

서울역 고가도로 개통을 알리는 신문 보도(경향 1970.8.15) 서울역 고가를 “서울의 새 명물”로 소개하고 있다.

서울역 고가도로 개통을 알리는 신문 보도(경향 1970.8.15) 서울역 고가를 “서울의 새 명물”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 13일 0시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역 고가 폐쇄를 선언했다. 회현동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달리던 차들은 일제히 멈춰섰다. 1970년 세워져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울의 중심에서 사람의 발길을 이어온 고가도로가 생명을 다한 순간이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70년대 ‘산업화의 상징’이다. 1966~67년 정부 주도 하의 본격적인 ‘외화벌이’를 위해 구로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됐다. 이곳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평화시장, 남대문시장 등 상권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운송·유통망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서울을 동서로 가르는 고가도로 중 하나였다. 당시 언론은 서울역 고가가 개통되면서 “이제 서울의 중심부를 논스톱으로 달리게 됐다”며 “우뚝우뚝 솟는 빌딩과 고가도로 등 달라져가는 서울의 모습에 놀라는 말들이 곧잘 튀어나오게 됐다”(1970.11.11)고 보도했다.

한때 서울의 중심에서 물자와 사람을 연결하던 고가도로들은 시대가 지나고 ‘애물단지’가 됐다. 미관을 해치고 상권을 침해한다는 불만이 나왔다. 수십년을 버텨오느라 노후화된 골조때문에 안전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서울역 고가는 2000년, 2006년, 2012년 안전 점검에서 잇따라 안전 낙제점인 ‘D등급’을 받았다. 지난해엔 같은 문제로 국내 첫 고가도로였던 아현고가도로(1968년 개통)와 약수고가도로(1984년 개통)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 서울시에 남은 고가도로는 총 83개. ‘길 위의 길’로 한때 ‘첨단 도시’의 상징이었던 고가도로는 서울에서 점차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금화시민아파트(1969~2015)

지난 8월, 마지막 남은 입주자들과의 오랜 갈등 끝에 금화시민아파트 3,4동이 헐렸다. 지은지 반세기가 돼가는 건물 벽면엔 성한 곳보다 금간 곳이 쉬이 눈에 띄었고 안전검사 결과 최하위 ‘E등급’을 받은 건물은 이미 주거로서의 역할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1969년 서울 서대문구 금화시민아파트 준공식. 당시 준공식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9년 서울 서대문구 금화시민아파트 준공식. 당시 준공식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으스스한’ 폐가의 분위기 때문에 공포 영화나 사진사들의 단골 촬영장소가 된 이곳도 한땐 ‘입주권’이 돈으로 오갈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애초 철거촌 빈민들의 주거 대책 차원에서 지어졌지만 정작 당시 입주자들은 중산층이 대부분이었다.

2001년 개봉한 공포 영화 ‘소름’은 금화시범아파트를 배경으로 했다. 무너져가기 직전 폐아파트의 내·외관은 당시 영화의 음산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2001년 개봉한 공포 영화 ‘소름’은 금화시범아파트를 배경으로 했다. 무너져가기 직전 폐아파트의 내·외관은 당시 영화의 음산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금화아파트는 입주 시작과 함께 헐릴 운명이었다. 공사 기간이 1년이 채 안되는 날림 공사와 공사업체 비리 등으로 인해 시민아파트의 안전은 초장부터 휘청였다. 당시 한 신문은 “지난 20일 입주식을 가진 금화아파트가 비가와 물이새는 난리가 났다”며 “졸속 공사의 후유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1969.4.25)”고 보도했다. 이어 금화아파트 입주가 시작된 1969년의 바로 이듬해인 4월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하면서 경각심은 한층 높아졌다. 이미 지어진 아파트들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검사가 시작됐다. 그렇게 지어진지 한돌도 안된 금화아파트 39동은 1970년에 철거됐다. 와우아파트에서 성수대교, 삼풍아파트 붕괴로 이어지는 현대 도시 건축사의 질곡이 그대로 묻어난 사례였던 것이다.

금화아파트는 시민아파트 1세대로 1969년 처음 500여세대가 입주한 후 질곡많은 세월을 서울시민들과 함께 해왔다. 그리고 2015년 여름 마지막 남은 두동의 건물이 헐리며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 육교(1980~2015)

최근 방영한 KBS의 단막 드라마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에서 4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해온 주인공은 연이은 실패에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노량진역 근처 옥상을 찾는다. 노량진에 붙박힌 그의 삶은 어머니가 찾아와도 역 개찰구마저 빠져나갈 수 없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노량진 육교를 바라보며 그는 “내 인생은 아직 시작도 못한 인생”이라고 자조한다.

지난 10월 31일 방영한 KBS 드라마스페셜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중 고시생 주인공(모희준·봉태규 분)이 노량진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컵밥을 먹고 있는 모습

지난 10월 31일 방영한 KBS 드라마스페셜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중 고시생 주인공(모희준·봉태규 분)이 노량진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컵밥을 먹고 있는 모습

1호선 노량진역과 건너편 학원가를 잇는 노량진 육교는 속칭 ‘속세로 가는 길’이라고 불려왔다. 폭 4m, 30m 길이의 좁다란 육교는 30여년간 학원가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거리에서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 등 수험생들과 ‘속세’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1980년 세워진 노량진 육교는 지난 10월 18일 35년만에 철거됐다. 당시 군사정권은 1979년 도심 과밀화 방지의 일환으로 사대문 안에 있던 학원들을 밖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한때 경기고, 휘문고, 경복고 등 유명 고교와 밀접하게 위치하며 광화문을 ‘교육의 메카’로 만들어왔던 대형 학원들은 하나둘씩 노량진으로 쫓겨갔다. 늘어나는 인구와 교통 때문에 정부는 노량진역과 건너편 학원가를 잇는 육교를 건설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어오던 육교도 결국 수명을 다하게 됐다. 동작구청이 주변 상가와 시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90%가 넘는 이들이 철거에 찬성했다. 지은지 오래돼 전동차 진동으로 인해 다리가 출렁거려 불안하고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동작구는 철거를 결정하고 육교 아래쪽에 늘어서있던 컵밥 등 먹거리 노점상들을 ‘거리가게 특화거리’로 옮겼다. 노량진역 인근은 이전에 비해 한층 말끔해진 모양새다.

2015. 철거 전 노량진역 육교에 “35년...잘 버텨줘서 고마워!”라는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가 달려있다. 사진 서울동작구 제공

2015. 철거 전 노량진역 육교에 “35년...잘 버텨줘서 고마워!”라는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가 달려있다. 사진 서울동작구 제공

노량진역 육교 위로 사람들이 오가고 그 아래서 옹기종기 컵밥을 먹는 수험생들의 풍경은 이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추억 속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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