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류입니까 소수자입니까…‘교차차별’의 사회

2020.01.14 06:00 입력 2021.03.24 17:24 수정

가해·피해자 따로 없는 ‘차별’

교차 차별 세상 사는 우리들

[가장 보통의 차별]당신은 주류입니까 소수자입니까…‘교차차별’의 사회

서울 유명 사립대에 다니는 강하루씨(25·가명)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 크론병을 앓고 있다. 강씨는 병력 때문에 소외당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10㎝만 컸어도”라는 말을 듣곤 했다. 대신 그는 특권행 스펙인 ‘학벌’을 가졌다. 과외를 구할 때 대학 이름을 말하는 순간 선망 어린 시선을 받는다.

남중·남고 시절 여성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 적은 없다. 친구들이 여성에 대한 성희롱·성차별 발언을 할 때도 별생각 없이 들었다. 당시 교실엔 성소수자 혐오발언도 많았다.

박지영씨(34·가명)는 지방국립대를 졸업한 공무원이다. 학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서울 유명 대학을 졸업한 직장 동료들이 대학 이야기를 꺼낼 때면 자격지심이 든다. 임신·육아를 거치며 경력이 단절된 선배들을 보면서 여성 차별을 실감한다. 여성·지방 출신인 박씨는 서울에서 ‘소수자’다. 비정규직을 대할 때는 정체성이 바뀐다. 박씨는 기회비용과 노력 측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경향신문은 이달 초 성별, 학력, 지역, 성적 지향, 장애·질병, 경제력, 외모, 나이 등 다양한 범주에 든 7명을 만났다. 장애를 가진 고학력 남성, 지방대를 졸업한 정규직 여성, 고학력 부유층 성소수자 남성 등이다. 이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차별·특권 원 그래프’와 ‘차별·특권 리스트’를 작성했다. 7명 모두 사회에서 정한 주류와 소수자의 경계를 오갔다.

리스트를 쓰던 강씨는 “차별 경험은 굉장히 구체적으로 생각났는데, 특권은 좀 추상적으로 떠올랐다”며 “인식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특권을 ‘주어진 사회적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해서 누리게 되는 온갖 혜택’이라고 했다. 책에 따르면 인식하지 못한 특권은 타인과의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요인이 된다.

인터뷰 대상자 중엔 완전한 주류도 완전한 소수자도 없었다. 이들 모두가 현실에서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누리고, 같은 정도의 차별을 받는 건 아니다. 어떤 소수자성은 더 큰 박해와 배제에 시달린다. 7인의 인터뷰는 누구나 타인에게 상처 하나쯤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는 걸 보여준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교차차별’의 세계에 관해 이야기할 때다.

■ 장애여성으로 차별받다…“로스쿨 졸업” 밝힐 땐 ‘역전’

서울 소재 대기업 정규직인 50대 비혼 여성 황미희씨(가명)는 사내에서 종종 여성차별을 겪는다. 전통적인 성역할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직장 동료들끼리 연수 갔을 때 한 상사에게 “여자가 밥상은 안 차리고 떠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황씨는 ‘결혼은 해야 한다’는 통념을 따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은 “그만 결혼을 포기해라”였다. 직장에서 그는 ‘비혼 여성’이라는 소수자다.

“결혼 포기해” 차별당한 여성
대기업 정규직 입장에 서면
“비정규직은 퇴근할 생각만 해”

황씨는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지위에서 특권을 느낀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인 ‘우리’와 구분한다. “비정규직은 애사심이 없어요. 어떻게든 오후 6시 땡 치면 퇴근할 생각만 해요. ‘우리’는 15~20분이라도 더 일하다가 퇴근하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이들을 볼 때는 ‘요즘 애들은 잘해주면 보답을 안 한다’는 편견에 빠진다. 회사에서도 어린 후배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다.

법전원 졸업한 중증 장애인
“고학력이라는 배경 없었다면
살기 더 힘들지 않았을까 씁쓸”

문화진씨(33)는 사회에서 규정하는 중증 장애인이다. 중학생 때부터 휠체어를 탔다. 문씨가 입학할 때마다 부모는 학교를 찾아가 “우리 아이가 몸이 불편하니 봐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대학에 가자 차별은 더 심해졌다. 듣고 싶은 수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휠체어로 이동할 수 없는 강의실에서 수업이 열렸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한 여성으로 겪는 차별은 더하다. 지하철을 탈 때 왜소하고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나이 든 남성에게 막말을 들었다. 장애인 콜택시 기사는 “결혼은 했냐. 아이는 있냐. 세상에 태어났는데 결혼 한번은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문씨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취급 안 받으려고 밖에서는 눈에 힘을 주고 다닌다. ‘차갑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문씨는 고학력자라는 특권을 누린다. 서울 상위권 대학, 지방 국립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씨의 전동 휠체어엔 출신 대학 마크가 붙어 있다. 문씨가 밖을 다닐 때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한 어머니가 ‘보험용’으로 붙였다. 문씨는 고학력이 특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이 바뀔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제게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더 힘들지 않았을까 씁쓸해요.”

2001년 탈북한 김혁씨(38)도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소수자 정체성과 고학력자라는 특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 김씨는 남한 사회에서 처음으로 일한 아이스크림 유통업체에서 임금 차별을 겪었다. 남한 출신과 똑같이 오전 4시30분 출근, 오후 6시 퇴근했다. 남한 출신은 100만원, 김씨는 60만원을 받았다. 자동차 정비 일을 할 땐 동료들이 무의식 중에 내뱉는 ‘우리’ ‘너네’라는 단어에 소외감을 느꼈다.

남한 문화를 이해하고 동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2005년 서울의 한 대학에 진학했다. 석·박사 학위를 받아 지금은 남북 교류협력 분야에서 일한다. 박사 학위가 생기자 주변 시선이 달라졌다. 김씨는 “성공한 북한이탈주민 케이스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훨씬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차별받은 사람은 그 편견을 비판 없이 내재화하기도 한다. 충남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허종득씨(31·가명)는 지방대생에 대한 편견 때문에 취업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학과 수석 졸업, 공모전 수상경력, 자격증, 인턴 경험을 갖추고도 서류전형에서 10번 중 8번꼴로 떨어졌다. “운이 좋아” 업계 50위권 안에 드는 한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한 상사는 “네 학벌로는 오기 힘든 회사에 붙었으니 열심히 버텨라”라는 말을 격려의 의미로 건넸다.

허씨는 자신을 차별하던 이들이 지방대생에게 보인 편견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꺼내보였다. 그는 “서울권 학생들과 지방대생들은 출발할 때부터 수준에 차이가 나는 건 사실”이라 했다. 회사에 들어온 대학 후배에게는 “우리 학벌로는 들어오기 힘든 회사니 열심히 하라”고 자신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건넸다.

30대 성소수자 나강남씨(가명)에게 성적지향을 숨기고 이성애자인 것처럼 연기하는 건 “디폴트(기본값)”다. 어렸을 때 친구들은 행동이 온화한 나씨에게 “남자가 왜 이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씨는 스스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직장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밝힐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선택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성소수자 정체성을 어디까지 터놓고 말해야 할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씨는 성소수자임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에서 무력감을 느끼지만 이른바 ‘명문대’ 학벌이 자신을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믿는다. 취업이 잘 안되자 “학벌주의가 강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회사에서 ‘남성을 선호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생물학적 남성인 내가 유리하겠다’며 다행이라 여겼다. 여유 있는 집안 사정도 나씨에게 특권이었다. 나씨는 대학 등록금 전액을 부모가 지원해줬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수없이 하는 친구들을 보며 부모의 경제력을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혜택’이라 여겼다.

■ 차별하고 차별받는 고정관념의 세상

[가장 보통의 차별]당신은 주류입니까 소수자입니까…‘교차차별’의 사회 이미지 크게 보기

[가장 보통의 차별]당신은 주류입니까 소수자입니까…‘교차차별’의 사회

경향신문이 만난 7명이 작성한 ‘차별·특권 원그래프’를 보면 이들 모두 어떤 면에서는 특권층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원그래프에 성별, 학력, 지역, 성적지향, 장애·질병, 경제력, 외모, 나이 등 8개 범주를 두고 각각 자신이 차별받는지, 특권을 누리는지 표시했다. 특권을 누린다면 그래프 중간 수평선을 기준으로 위쪽에, 차별을 받는다면 그래프 아래쪽에 표시했다. 작성 결과 7명 모두 어떤 범주에서는 차별받는 위치에, 어떤 범주에선 특권을 가진 위치에 교차적으로 놓였다. 이들 모두 ‘완전한 주류’ 혹은 ‘완전한 소수자’는 아니라는 얘기다.

성소수자인 나씨는 성별, 성적지향(성소수자) 범주에서만 차별받는 위치에 표시했다. 학력(유명대), 거주지(강남3구), 장애(비장애인) 등 나머지 범주는 모두 특권층에 속했다. 크론병을 앓는 강하루씨(25·가명)는 장애, 외모(작은 키) 범주에서는 차별층에 속했으나 학력(유명대), 거주지(서울권), 나이(20대), 경제력(중산층)에서는 주류였다. 북한이탈주민 김씨는 성별, 성적지향, 학력, 나이, 장애 범주에서는 주류였지만 거주지(북한이탈주민), 경제력(중산층 이하), 외모에서는 소수자라고 느꼈다.

차별과 특권을 가르는 기준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다. 고정관념에 따라 사람들은 차별을 받기도,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흔한 고정관념 중 하나는 성 고정관념이다. 성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특권을 얻거나 무리 없이 살아간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차별받거나 불편을 감수한다.

“여성, 남성보다 힘 쓰는 일 못해”
“남자가 왜 상담사 하려고 해”
성별·학력·지역·성적 지향 등
사회의 편견·고정관념에 따라
특권을 누리거나 차별받아

여성은 남성보다 성 고정관념으로 차별당하기 쉽다. 남성인 강씨는 대학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게 일자리를 얻었다.

학교 측이 ‘여성은 남성에 비해 힘쓰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남성 위주로 뽑았기 때문이다. 강씨는 “건강한 여성들이 (크론병 환자인) 저보다 체력이 좋을 것이다. 제가 하기에도 큰 무리 없는 일이었지만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자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황씨는 회사 동료들에게 “여자치고 키가 크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황씨가 하이힐을 신을 때면 남자 동료들은 옆에 서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키가 작아야 한다’는 통념에 기반한 차별이었다.

남성 역시 사회적 기대·시선 때문에 차별당한다. 청소년 상담사인 나씨는 일을 구할 때마다 “남자가 왜 상담사를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남자를 뽑아서 데었다(해를 입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는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상담사 취업에서 우대받았다고 전했다. 전형적인 남성성에 대한 기대도 불편하다. 상담사 연수를 가면 ‘남성은 여성보다 힘이 세고 책임감이 있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힘쓰는 일, 발표, 조장 등을 떠맡는 경우가 많았다. 현장에 남성은 소수였지만, 대개 나씨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기혼’을 정상이라 보는 고정관념은 비혼자를 차별한다. 나씨는 30대 중반이 되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혼은 안 할 거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남자는 혼자 살면 추하다’는 차별 발언은 덤이다. 황씨도 친척들로부터 “빨리 결혼해야 한다. 조금만 더 늦으면 애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거나 아픈 사람은 우울해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도 당사자를 힘들게 한다. 강씨의 크론병은 겉보기에는 티가 잘 나지 않는다. 질환 때문에 수업에서 조퇴할 때는 주변에서 자신을 ‘멀쩡한 애가 왜 저러지’라고 쳐다보는 것 같다. 아픈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어떤 때는 아픈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 편견, 차별받는 사람도 길들인다

스펙 중시 문화도 차별과 특권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다. 이 편견은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능력주의란 누구든지 주어진 능력과 노력에 따라 높은 지위와 학력 등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대물림이 심각해진 사회에서 이 같은 믿음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다. 조금의 노력으로도 큰 성취를 얻는 사람이 있는 반면,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고려하지 않는다.

편견이 강화되면 차별받는 사람도 그 편견에 동화되고 길들여진다. 황씨 회사는 주요 부서에 유명 대학 출신을 배치하고 그렇지 않은 직원들은 비인기 부서에 배치했다.

황씨는 “명문대생이 머리가 좋은 건 사실이다. 업무능력에 아예 차이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일하게 경쟁을 통해 뽑힌 이들이 업무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출신 대학을 이유로 부서 배치에 차별을 두는 것은 편견일 수밖에 없다.

■ 누구나 차별 겪지만…내면의 ‘색안경’ 들여다보지 못해

거주·출신지에 대한 편견도 차별과 특권을 만든다. 박지영씨(34·가명)는 강원도 출신인 자신을 ‘시골 처녀’로 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그는 서울 사람들이 지방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부족하다보니 지방 사람들은 모두 사투리를 쓴다거나 순진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다고 했다. 황씨는 ‘경상도 여성은 사납다’는 편견을 가졌다. 반면 흔히 부자 동네로 인식되는 서울 중심부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 된다. 문씨는 거주지에 ‘서울 강남구’라고 기재할 때마다 남다른 시선을 받는다.

타고난 정체성만으로 차별·특권 여부가 갈리기도 한다. 김씨는 북한이탈주민 여성에 대한 남한의 편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북한 여성을 흔히 ‘생활력이 강하다’고 표현한다. 이 말은 칭찬처럼 보일 수 있지만, 북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담긴 말이다. 그럼 남한 여성은 생활력이 약한가?”라며 “북한 여성을 소개할 때도, 결혼 상대로 여기는 것보다 돈을 내고 만날 수 있는 상대 정도로 인식하는 모습이 있어 씁쓸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공무원이 예쁘면 비서실로 발탁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높은 사람들의) 측근이 되니 승진도 빠르다”고 했다. 이어 “주변에서 심하진 않지만, 농담처럼 외모 평가를 하기도 한다”며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칭찬이나 평가가 기분 나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장애를 가진 경우 ‘간접차별’에 맞닥뜨린다. 간접차별이란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했을 때 누군가에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뜻한다. 문씨가 대학 시절 강의실 문제로 원하는 강의를 듣지 못한 게 간접차별에 속한다. 그가 변호사 시험을 칠 때마다 매번 집에서 가까운 시험장을 찾기 위해 직접 법무부와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도 그렇다. 장애인은 이동이 어렵고 불편하다는 점을 법무부가 감안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고사장을 지정해 벌어진 문제였다.

‘여성’에다 ‘장애인’이라면 차별이 가중된다. 문씨는 “여성 장애인이 신체적으로 남성 장애인에 비해 근력이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남성 장애인이 취업에서 유리한 것 같다”고 봤다. 남성 장애인보다는 여성 장애인, 더 나아가 어린 여성 장애인이 길거리를 다닐 때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차별은 어떻게 ‘왜곡된’ 결과를 만드나

‘능력주의’로 포장된 ‘스펙’ 문화
사회문화적 기반은 고려 안 해
주요 부서 인사에 유명 대학 출신
출신지 따라 “순진” “사나워”
편견에 길들여지면 ‘차별 악순환’

차별과 특권을 결정하는 근거는 빈약하다. 이를 조장하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대개 허구다. ‘경상도 사람은 사납다’는 말은 모든 경상도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북한 여성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따른 구별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는 많은 연구가 입증해왔다.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자 존 달리와 패짓 그로스의 1983년 연구에서 연구진은 대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한나’라는 아동에 대해 설명했다. 한 집단에는 한나가 고소득층이라고 했고 다른 집단에는 저소득층이라고 설명했다. 한나가 저소득층이라고 들은 집단은 한나의 능력을 더 낮게 평가했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불합리한 판단과 행동을 이끌고 차별로까지 이어진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쳐 현실화되고 차별의 악순환을 만든다. 유명대생은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 고정관념을 얻는다. 인턴, 공모전, 과외 등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고정관념은 현실이 되고 재강화된다. 부정적인 편견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그 관념을 내면화해 행동에도 제약을 받는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연구진은 2006년 여학생 225명에게 수학시험을 두 번 치르게 했다. 두번째 시험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을 잘한다’는 글을 읽게 한 집단은 첫 시험에 비해 틀린 문제가 5~10개 정도 늘어났다. ‘수학과 성별은 관련 없다’는 글을 읽은 집단은 틀린 문제가 5~10개 줄었다.

차별과 혐오는 한국 사회에서도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9년 혐오차별 국민인식 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6명 이상(64.2%)이 혐오·차별표현을 경험했다. 특정 지역 출신(74.6%)에 대한 표현이 가장 많았다. 페미니스트(69.4%), 여성(68.7%), 성소수자(67.7%), 노인(67.8%), 이주민(66.0%)에 대한 표현이 뒤를 이었다. 혐오·차별표현은 이를 듣거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응답자들은 위축감(50.5%)과 공포심(53.1%)을 느낀다고 했다. 이들은 혐오·차별표현을 당하거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이나 장소를 피하게 되고(73.4%), 자유로운 표현이 위축(52.5%)된다고 답했다.

누구나 피해자이자 가해자 돼
차별과 특권 ‘동시 자각’ 필요

차별은 누구나 겪지만 공기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차별하고 특권을 누리는지 의식하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장애인들은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어 차별을 느끼지만 비장애인들은 계단을 오를 때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경향신문이 만난 7명 중 대다수가 이번 인터뷰로 자신이 가진 차별과 특권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나씨는 차별·특권 리스트를 작성한 뒤 “나의 소수자성을 생각했지 그 반대인 면들은 잘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차별을 지양하려면 누구나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교차성’을 인지하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차별·특권 감수성’을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할퀴고 스스로도 다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내전’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하면 안된다는 것에 100% 동의하지만 장애인이 내 주변에 있다면 태도가 바뀐다. 생각과 행동의 괴리에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자신이 선 자리를 정확히 인지해 차별과 특권을 동시에 자각하고, 이 자각을 삶에서 어떻게 반영할지 끝없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인권’과 ‘차별’ 구분 못했던 20년 전…
지금은 ‘유아용품 성별 고정관념’ 문제제기까지 나아가


‘차별행위 관련’ 인권위 진정 사건 흐름 분석

‘무엇이 차별인가’에 대한 인식은 시대마다 달라졌다. ‘비혼·용모단정 우대’ 같은 노골적인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시절도 있다. 장애인들의 투쟁을 거쳐 장애인차별금지법 같은 관련 법령이 생기면서 장애인 차별에 관한 인식이 확산됐다. 최근엔 성별 차별을 문제화하는 흐름이 이어진다. 전문가들은 차별이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차별행위 관련 진정 사건 흐름을 분석했다. 인권위 진정은 크게 ‘인권침해’와 ‘차별행위’ 두 분야로 나뉜다. 2001년 전체 진정 중 인권침해 관련이 619건(77.1%), 2002년 2214건(79.4%)이었던 데 비해 차별 관련 진정은 2001년 53건(6.6%), 2002년 136건(4.9%)에 불과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설립 초기엔 사람들이 무엇이 ‘차별’인지도 잘 몰랐다. 차별에 대한 인식이 없다보니 관련 진정이나 상담도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2003년 ‘국민 차별인식 조사’를 실시했다. 가장 심각한 차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자 20.9%가 장애인 차별을 꼽았다. 이어 학력·학벌에 의한 차별(18.5%), 전과경력에 의한 차별(8.7%) 순이었다. 채용공고 등의 ‘용모단정한 자’가 차별이냐는 질문에는 ‘차별이라고 보지 않는다’(77.4%)는 응답이 높게 나왔다. 성별이나 외모, 나이 등을 이유로 가족이나 회사 등에서 이뤄지는 차별은 ‘농담’ 혹은 어쩔 수 없는 ‘구분’ 정도로 여겼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다.

2005년에는 노동현장에서의 차별이 주목받았다. ‘비정규직보호법’이 원인이었다. 당시 입법 절차를 거치던 이 법은 고용계약을 체결한 지 2년이 넘은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오히려 비정규직을 쉽게 해고하는 법이 될 것이라며 비판받았다. 이에 2003년, 2004년 각각 358건, 398건이었던 차별행위 관련 진정이 2015년에는 1081건(19.7%)을 기록했다. 1081건 중 503건이 ‘고용에서의 차별’을 이유로 채워졌다.

비정규직보호법에 노동 주목받고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관련 진정 1년 새 ‘2배 이상’ 늘어


2008년에는 차별행위 관련 진정이 처음으로 전체 진정의 20%(1380건, 21.9%)를 넘겼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이 이유였다.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이 법은 2008년 4월11일부터 정식 시행됐다. 2007년 256건이던 ‘장애 차별 관련’ 진정이 이해에 640건으로 늘었다. 관련 법령이 생기면서 ‘장애인 차별은 법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졌다.

“차별을 인지 못하는 경우 많아
논의 확대 위해 금지법 제정 필요”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여성 및 성소수자 등 타고난 성별과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를 문제로 보는 시선이 많아졌다. 올해 첫 인권위 진정은 ‘색깔 고정관념 등에 의한 성차별적 유아용품의 유통 행태를 시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전문가들은 사회 양극화로 앞으로 더욱 다양한 차별이 등장할 것이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성차별 문제는 남녀 간의 대립이 큰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애 문제도 실질적 평등을 위한 길은 멀었다”며 “이주자, 난민에 대한 차별 문제 역시 중요 이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사람들은 차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무언가 억울하고 부당한데 남들은 괜찮다고 하니 차별이라 생각하지 못하기도 한다”며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이 같은 차별 경험에 이름을 붙여주고 사회적 의제로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기사 중 ‘미혼(모)’ 표현을 ‘비혼(모)’로 2021년 3월24일 바로잡습니다. 경향신문은 가족 형태를 다룰 때 잘못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용어를 쓰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사에 잘못 사용된 표현에 대해 독자들께 사과드립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