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의 플랫한 생활

언니들의 플랫한 생활. 4화



“미친X아!” 선배들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이야기하자 돌아오는 건 축하가 아니었다. “경력 잘 쌓아가고 있었는데 임신을 하면 어떻게 해!”

극단의 9번째 커플이던 배우 유정민씨(43)는 극단 생활을 시작한 지 4년이 넘었을 무렵 첫아이를 가졌다. 축하 대신 걱정하는 말만 쏟아내는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아이 낳고도 계속 활동할 거예요!” 당당하게 말하는 그에게 선배들은 그동안의 ‘데이터’를 들이밀었다. 복직한 사람은 0명. 그때까지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여자 선배들은 모두 일을 그만뒀다.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정민씨는 19년차 배우이다. 그리고 열한 살, 일곱 살, 다섯 살, 세 아이의 엄마다. 첫째를 가졌을 때 ‘미쳤다’ ‘독하다’는 말을 들었고, 셋째가 생겼을 때는 주변에서 ‘활동 포기했구나’라고 여겼다.

세 번의 출산을 겪으며 연기를 쉬었던 기간은 총 15개월 정도. 그나마 연극계에선 매우 운이 좋은 경우다. 스스로도 “흔치 않은 사례”라고 했다. 연봉 270만원을 받으면서도 연기는 계속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경력은 단절됐다. 소속이 없는 배우는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라 아이들을 키우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난 4일 만난 정민씨는 20년의 프리랜서 지위가 자신을 비롯한 여성 예술인들의 경력과 의지까지 꺾는 타이틀이라고 했다.

2010년 첫아이를 낳고 육아에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이 기획부터 참여했던 뮤지컬이 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데모도 녹음했지만 출산이 가까워지면서 정작 쇼케이스 무대부터 빠진 작품이었다. 동료들에게 “축하한다”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울컥했다. 그들은 무대에, 정민씨는 집에 있었다.

우울감이 몰려왔고, 연기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 커져갈 때 한 선배가 전화를 했다.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하고는 싶은데….” 망설이던 그에게 선배는 단호히 말했다. “애 업고 해. 리딩할 때 업고 와.” 만 6개월 된 아이를 업고 첫 대본 리딩에 참여했다. 평일에는 연극인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고, 휴일에는 아이를 데리고 연습실에 나왔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출산한 지 7개월 반이 지났을 때 그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둘째와 셋째를 낳고서는 두 달 반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동료들이 도와줘서 빨리 복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출산하고 몸조리를 해야 하는 저를 배려해서 공연을 몇 달이나 미뤄줬어요. 제가 운이 좋았어요.”

“연기는 제 자신이에요.” 배우 유정민씨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 가장 ‘나 다운 일’이라고 했다. 2010년 첫아이를 낳은 후에도,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연극 <시련>(2015년·왼쪽부터)과  <노래하는 샤일록>(2014년), <오늘 하루>(2017년·가운데 위), 뮤지컬 <스페셜 딜리버리>(2018년·가운데 아래)와 <한밤의 세레나데>(2015년·오른쪽)에서 연기하는 유정민씨의 모습 . 유정민씨 제공

“연기는 제 자신이에요.” 배우 유정민씨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 가장 ‘나 다운 일’이라고 했다. 2010년 첫아이를 낳은 후에도,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연극 <시련>(2015년·왼쪽부터)과 <노래하는 샤일록>(2014년), <오늘 하루>(2017년·가운데 위), 뮤지컬 <스페셜 딜리버리>(2018년·가운데 아래)와 <한밤의 세레나데>(2015년·오른쪽)에서 연기하는 유정민씨의 모습 . 유정민씨 제공

연기자와 같이 공연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출산 후 3~10년간 경력단절을 겪는다. 무대에 다시 오르기까지 10년이 걸린 선배도 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배우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단절된 경력을 이어 가는 것은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민씨는 첫아이를 낳고 1년이 지났을 즈음 오디션에 지원해 최종 2인까지 올라갔다. 마지막 심사에서 한 남성 위원은 이력서를 보며 물었다. “경력이 1년간 비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어깨를 펴고 말했다. “애 낳았습니다!” 출산의 경험이 배우에게는 풍성한 연기를 위한 밑거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라는 외마디뿐이었다. 이 질문을 끝으로 심사는 끝나고, 결과는 탈락이었다.

출산 후 잡혀 있던 공연에서 통보도 없이 계약이 해지된 적도 있다. 둘째를 낳고 한 극단의 시즌 단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시즌 단원은 해마다 오디션을 보고 활동했는데 다음해 공연할 작품 캐스팅이 확정됐다. 그러고 나서 해가 바뀔 즈음, 셋째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출산 예정일을 따져보니 공연까지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두 번의 출산 후 복귀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극단은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의사를 물어보는 절차도 없이 캐스팅은 취소됐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엄마 배우’는 혼자만의 욕심인가 생각하게 돼요. 무슨 이유 때문에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의구심도 커지고요.”



악착같이 복귀해도 주변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애 엄마인데 가능하겠어?’ ‘배안에 아이가 있는데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겠어?’ 그렇게 평가하는 시선에도 열심히 연습에 참여했다. 지방 공연 때는 아이를 업고 리허설을 했고, 임신을 했을 때는 대본을 썼다. 아이들의 엄마인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독하다’는 인상 비평일 뿐이었다.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한 연기 선생님은 우스갯소리로 저처럼 살려면 ‘돈이 있거나 독이 있거나’ 해야 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돈이 많으면 돈 주고 아이를 맡기고 나오는데 저는 독해서 아이를 업고 연습하고 공연한다고요.”

엄마와 아이에 대한 돌봄 안전망의 황무지인 예술계에서 정민씨는 ‘특이한 사람’이다. ‘역시 독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열 살 때부터 꿈꿔왔던 배우. 막연히 ‘연기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자는 척하며 장롱에 비친 TV 화면으로 ‘주말의 명화’를 봤다. 소질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국어 시간. 희곡 <석수장> 중 한 장면을 발표했다. 졸고 있는 주인공을 돌로 쳐서 깨우는 장면이었다. 연기를 하는 교실에 돌이 없어 주먹을 돌처럼 썼다. 순발력을 본 선생님은 ‘배우를 해보라’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에서는 장기자랑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 대상을 받았다. 그는 그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배우’라는 정체성을 ‘포기당하고’ 싶지가 않았다.

극단에 있지만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라는 지금의 상태는 배우가 되기로 하면서 그가 받아들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결혼과 임신을 겪으며 그의 주변의 수많은 여성 연기자들이 일을 포기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보고서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규모 추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면 임금근로자 가운데 프리랜서를 포함한 특수고용 종사자는 여성이 57.1%로 남성(42.9%)보다 많다. 연극계 여성 중 20%가 출산·육아를 이유로 일자리를 잃은 경험이 있다(2019년 기준 통계청). 고용 불안은 만성적이다.

“계속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꺾이는 게 현실이에요. 저에게 ‘미친X’이라고 했던 선배가 오히려 현실적이었던 거예요.” 정민씨는 점처럼 흩어져 있는 여성 프리랜서들이 “목소리를 모아 사회에 권리를 요구하기에도 너무 적은 ‘소수자’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연기는 제 자신이에요.” 배우 유정민씨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 가장 ‘나 다운 일’이라고 했다. 2010년 첫아이를 낳은 후에도,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국악 창작극 <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2019년)에서 혜경궁 홍씨를 연기하고 있는 정민씨의 모습이다. 유정민씨 제공

“연기는 제 자신이에요.” 배우 유정민씨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계속 하는 것이 가장 ‘나 다운 일’이라고 했다. 2010년 첫아이를 낳은 후에도,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국악 창작극 <복사꽃, 생각하니 슬프다>(2019년)에서 혜경궁 홍씨를 연기하고 있는 정민씨의 모습이다. 유정민씨 제공

정민씨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국립극단’에도 육아정책은 없다”고 했다. 극단 오디션에 합격하면 2년간 ‘시즌 단원’으로 활동하는 구조 탓이다. “2년마다 구성원이 바뀌니 양육을 고민하거나 여성들의 경력단절을 제도를 통해 막아보려고 하지 않아요. 아무도 책임을 갖지 않는 거죠.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됐어도 ‘임신했다’는 한마디에 없던 일이 되는 거예요.”

대다수가 ‘프리’인 여성 예술인들은 출산 후에도 일하려면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개인적인 해결책밖에 없다. 정민씨도 양가 어머니들과 친척, 동료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계속 연기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정부가 ‘경력단절 여성 등의 경제활동 촉진 기본계획’을 세웠지만 여성 예술인에 대한 정책은 없는 상태다.

그나마 공연 예술인들의 자녀돌봄센터가 서울 대학로와 마포에 두 군데 있긴 하지만 필요한 인원에 비해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그래도 최근 제작비에 돌봄 비용을 포함하는 제작자들이 생기고 있다. 작품을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자녀를 맡길 곳이 없을 때 아이돌보미를 공동으로 구해 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정민씨는 이런 지원이 제도화될 수 있도록 정부 지원 정책을 제안했다. “지금은 정부가 제작사에 작품 제작을 위해 지원하는 돈을 돌봄 비용으로 쓸 수 없어요. 육아는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이런 지원이 가능해지면 예술인들도 ‘사회가 육아를 지지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육아 비용이 ‘공적 비용’이 됐으면 좋겠어요.”

선배가 된 정민씨는 이제 다른 여자 후배들의 육아를 고민한다. 지난해 공연을 연습하는 기간, ‘주말에 아이를 맡길 곳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출가인 남편의 제작사 연습실에 놀이방을 만들었다. 그는 제도가 도와주지 못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여성 예술가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저에게 연기는 제 자신이에요. 배우라는 일을 계속하는 건 가장 ‘나다운’ 일이지, 남다른 일도 아니고요. 잔다르크처럼 싸워야 하는 일도 아니에요. 이 정체성을 사회적인 장애물 때문에 스스로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해요.”


탁지영 기자 g0g0@khan.kr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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