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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일기⑥

11월 중순, 텃밭에서 6살 아이와 함께 무를 수확했다.

11월 중순, 텃밭에서 6살 아이와 함께 무를 수확했다.

‘도시농부 여러분, 한 해 동안 즐거운 도시농부의 삶을 살아오셨는지요. 4월부터 시작된 우리의 농사가 곧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11월30일까지 배추·무 등의 작물을 정리해주세요.’

절기상 김장철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양력 11월22일)에 구청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렇지, 텃밭은 내 것이 아니었지.’ 공원 내 꽃밭을 개간해 만든 모래땅, 3평짜리 텃밭은 작지만 우리 가족에게 많은 것을 내어줬다. 4~5월에 씨를 뿌리고, 6~9월 수확하는 여름 농사 기간, 텃밭은 농사를 ‘1도 모르는’ 텃밭러에게 가지, 상추, 토마토, 고추, 당근, 시금치, 감자 등을 안겨 주었다. 8월 중순 시작된 가을 농사도 어느덧 마무리할 때가 왔다. 심어만 놓으면 쑥쑥 자라는 여름 텃밭 농사와 달리, 가을 농사는 난도가 한 단계 높다. 벌레와 날씨를 더욱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텃밭에서 벌레 잡는 중 | 최유진 PD

텃밭에서 벌레 잡는 중 | 최유진 PD

■벌레만 횡재한 첫 농사

가을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텃밭의 무와 배추 속에 사는 벌레를 잡았다. 9월에는 톡톡 튀어다니며 배춧잎을 갉아대는 좁쌀만 한 벼룩잎벌레와의 싸움이었다면, 10월부터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추흰나비 애벌레를 잡는 게 일이었다. 먹성 좋은 놈들 덕분에 내 배추는 앙상하게 잎맥만 남았다. 모종으로 심은 배추 20여 포기 중 겨우 5포기가 살아남았는데, 이제서야 노란 속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미 배추 속이 꽉 차 수확을 앞둔 이웃 텃밭 배추와는 크기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처음 지은 텃밭 농사를 자랑하려고 충남 홍성의 농부님과 영상 통화를 했다가 길게 잔소리만 들었다.

“벌레만 횡재했구만. 김장하기에는 어림 턱도 없고 삼겹살에나 얹어서 먹어야겠네. (배추가 커다랗게 잘 자란) 이웃 텃밭 보고 좀 배워야겠네. 자주 찾아가서 작물에게 발소리도 들려주고, 대화도 해야 애들이 잘 자라지. 심어 놓고 방치만 하면 될 리가 있나. 반성을 해야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텃밭에서 벌레 잡는 중 | 최유진 PD

텃밭에서 벌레 잡는 중 | 최유진 PD

텃밭 농사법을 알려주는 <텃밭 매뉴얼>(전국귀농운동본부 텃밭보급소 지음)에 따르면,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배추는 영하 3~4도까지 버틸 수 있지만 무는 영하로 떨어지기 전에 거둬들여야 한단다. 밭에 오래 묵히면 바람이 든다. 맛 좋은 가을무를 바람 들 게 할 수야 없지. 11월 중순, 6살 아이와 텃밭 무를 뽑았다. 배춧잎은 송송 구멍이 뚫렸는데, 무 잎은 멀쩡하다. 김장 재료가 되는 무 뿌리 쪽은 벌레들이 아예 건들지도 않았다. 잎과 잎이 겹겹이 포개져 벌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배추와 달리, 무는 벌레가 숨을 만한 공간도 없다.

내 농사가 잘되면 남들 농사도 잘되는 모양이다. 이웃에 배추 농사 포기한 텃밭은 많아도 무 농사 망친 텃밭은 없다. 시장에선 김장용 무 한 개가 1100~1200원 정도에 팔린다. 이상 고온과 잦은 비 탓에 일부 지역에서 무름병이 번진 김장용 배추와 달리, 김장용 무는 올해 작황이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벌레들이 갉아먹은 텃밭 배춧잎만으로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이상기후로 가을 농사를 완전히 망친 농가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난생 처음 담근 김치

가을 텃밭 농사는 ‘김장’을 위해 달린다. 텃밭에서 거둔 집으로 가져와 무청을 잘라내고, 밑동은 흙만 털어낸 상태로 신문지로 돌돌 말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무청은 잘 씻어낸 뒤, 말려서 시래기로 먹기로 했다. 시래기를 만들려면 무청을 바람이 잘 드는 응달에 널어두어야 하는데, 동·서로 창이 나 있는 아파트에서 시래기 말리는 데 적합한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람 잘 드는 아파트 복도에는 이미 옆집 할머니가 양파와 무청을 널어뒀다. 우리집 무청들은 낮에는 깜깜한 보일러실에서, 밤에는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서 시래기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다만 벌써 무청 절반이 누렇게 떴다. 누런 잎들을 뜯어낼 때마다 시래깃국 몇 그릇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한 끼 정도는 건질 수 있을까. 무청은 한번 데쳤다가 말리면, 누래지는 걸 조금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집 무청들은 낮에는 깜깜한 보일러실에서, 밤에는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서 시래기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우리집 무청들은 낮에는 깜깜한 보일러실에서, 밤에는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서 시래기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9월만 해도 텃밭 배추로 김장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배추 농사를 망친 탓에 내년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대신 무 몇 알을 꺼내 사십 평생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갔다. 생으로 먹어도 맵지 않고 달착한 게 계속 입으로 들어갔다. 양념을 버무리던 아이가 “깍두기가 엄청 매울 것 같다”면서도 물에 씻어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텃밭의 채소들이 키는 것을 지켜봐 온 덕분일까.

텃밭에서 수확한 무 세 알을 잘라 깍두기를 만들었다.

텃밭에서 수확한 무 세 알을 잘라 깍두기를 만들었다.

한때 서울에도 배추밭이 있었다고 한다. 충신동 ‘방아다리 배추밭’, 동대문 인근 ‘훈련원 배추밭’과 ‘구리안뜰 배추밭’, 종로통 오정목 ‘섬말배추밭’ 등이 이름난 곳이었단다. 이제는 과거의 일이 돼 농사는 농촌 사는 농부들만의 일인 양 여겨진다. 아이에게는 직접 먹거리를 키워 요리하는 일상을 만들어주려고 텃밭 농사를 시작했지만, 생각지 못한 각오도 필요했다. 수확한 무를 다듬은 날,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현관과 주방에서 벽을 타고 있었고, 새끼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민달팽이가 주방 그릇 말리는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이가 민달팽이와 애벌레를 키우겠다며 빈 통을 들고 왔다. 얘야, 엄마 아빠는 벌레들 키울 자신이 없단다.

■토종 종자가 전수되는 텃밭

노란색 동그라미 부분이 구억배추로 담근 김치. 갓김치처럼 알싸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낫다. | 최유진 PD

노란색 동그라미 부분이 구억배추로 담근 김치. 갓김치처럼 알싸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낫다. | 최유진 PD

며칠 전 전북 익산의 한 농부님에서 토종 ‘구억배추’로 만든 김치를 먹어봤다. 갓김치처럼 알싸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이 낫다. 구억배추는 제주도 대정읍 구억리의 할머니 한 분이 소중히 지킨 종자라고 한다. 지난 2008년 ‘토종씨드림’이란 단체가 할머니께 종자를 받아 전국 텃밭에 보급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윤을 위해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곳에서는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구억배추 같은 토종 종자를 키우지 않는다. 텃밭은 다양한 토종 종자가 후대로 이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울, 공주, 광명, 수원, 안양, 예산, 춘천, 포항 등 도시에는 ‘텃밭러’들에게 토종 종자를 빌려주는 ‘씨앗 도서관’들이 있는데 이곳에서 구억배추 씨앗도 구할 수 있다. 내년에 텃밭에 새로 씨를 뿌릴 때는 구억배추를 구해 심어 봐야지. 보물 같은 씨앗들이 텃밭러들을 기다리고 있다.


글 이재덕 기자, 영상 최유진 PD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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