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 🎓기계의 기능은 많을수록 좋은가? : ‘바보폰’의 귀환

인스피아

🎓기계의 기능은 많을수록 좋은가? : ‘바보폰’의 귀환

21분 2023.05.03

스마트폰 도구 단순함 미래 바보폰

기계의 기능은 많을수록 좋은가? : ‘바보폰’의 귀환

The return of Dumbphones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85), 2023.5.3, 1-9 (9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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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컴퓨터, 스마트폰, 도구, 단순함, 미래

1.머리말
2.‘도구’는 존재감이 없어야 한다

3.올인원 : 만능 도구란 가능한가
4.예측을 틀린 엉터리 미래학자?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저는 최근에 조그만 전자사전을 중고로 구입했습니다.

평소에 신문 기사나 영어로 된 글을 읽다가 사전을 찾을 일이 많은데요. 그때마다 스마트폰을 켜서 ‘전자사전 앱’을 들어가려고 하니 매번 사소한 어려움들에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1)자꾸 딴짓을 합니다.
2)들어가기까지 번거롭습니다.
3)많은 기능이 있어서 혼란스럽습니다.

각 항목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첫째는 옛날 제가 다니던 헬스장(3층) 밑에 있는 1층 분식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운동이 끝나고 집에 올 때마다 떡볶이 냄새 때문에 깊은 고뇌를 겪어야만 했습니다.(아마도 정확히 그 부분을 노린 입점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마찬가지로 단지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고 싶었을 뿐인데 매번 ‘단어를 찾으려 할 때마다’ 빨간 점을 확인하고 SNS, 게임을 켜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1)

과거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포켓 전자사전. 1979년에 처음 일본에서 출시된 휴대용 전자사전은 이후 mp3, 컬러 등 다양한 기능을 포함시키며 인기를 얻다가 스마트폰 대중화를 계기로 몰락했습니다.(왼쪽) '독서실에 가려고 했을 뿐인데... ' 과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련의 탑'이라고 불리던 노량진의 한 건물입니다. 실은 스마트폰도 손에 집어 드는 순간,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게 많아 우리를 '시련'에 빠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면, 폰 바탕화면을 현실화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폰을 켜는 순간 '옆길로 새는 선택지'들이 굉장히 많으니까요. / SHARP, 주간경향

그리고 두번째론, 사전을 살펴보기 위해선 일단 핸드폰이 어딨는지 찾아야 하고 폰을 켜서 폴더에 들어가 앱에 접속하고 사전 종류를 선택하고 찾으려는 단어를 검색해야 합니다. 번거로운 과정이 몇 차례 포함되어 있는데요. 어둡다면 그냥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면 되듯, 사전이 필요하면 곧바로 사전을 들고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개인화가 부족한 것과 관련해서 입니다. 전자사전 앱의 메인 화면엔 생활 영어라든지, 단어 퀴즈, 다른 이용자가 많이 찾은 단어 같은 건 필요가 없는데 들어갈 때마다 뜹니다. 그리고 간혹 업데이트가되면서 내가 개인화해서 익숙하게 쓰던 UI가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면 왠지 침착을 잃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작고 간편한 전자사전을 구입했고, 종이사전 한 개와 함께 식탁 위의 ‘사전 자리’에 두고 잘 쓰는 중인데요. 즉 요약하자면, 스마트폰의 ‘어떤 기능’ 대신 전자사전을 사용하기로 결심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스마트폰의 중독성이랄지, 이에 대항한 디지털 디톡스,복고 취향의 차원에서 다루어집니다. 최근 미국에선 MZ세대들 사이 문자와 전화 기능 등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둔 ‘덤폰(Dumb Phone·바보폰·링크)’이 크게 유행해서 주목을 모으기도 했고요.

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곰곰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떤 행동을 간단하고 수월하게 하기 위해 도구를 씁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선물을 뜯기 위해 가위를 꺼내 씁니다. 눈이 안 보이면 안경을 코에 걸칩니다. 책을 누르기 위해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그저 적당한 크기의 둥그런 돌이 있으면 됩니다. 심플한 일입니다. 그리고 도구는 역사적으로 이런 일상적인 과업을 최대한 동작, 수고의 낭비 없이 간편하게 하기 위한 - 가장 개인적이고 효율적인 형태로 디자인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매번 찾으면 ‘제자리’에 없고, 가위를 쓸 때마다 광고 팝업이 뜨거나 자주 사소한 업데이트 알림이 떠서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고(부엌가위 update ver.2.53 핑킹가위 기능 업데이트, 칼날 색상변경 기능...), 새로운 기능이 나오면 활용법을 공부해야 하고, 도구를 집어들 때마다 매번 가위를 쓸지 막대사탕을 먹을지 만화책을 볼지 영어공부를 할지 잠옷바지를 입을지 고민하게 하는 - 그래서 결국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게 하는 식의 복잡한 도구가 과연 최첨단의 ‘좋은 도구’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즉, 첨단 도구를 거절해서 비효율을 자처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손에 있는 도구가 과연 효율적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 레터에서는 조금 엉뚱해보이지만, 스마트폰을 ‘디자인’과 ‘도구’의 차원에서 해찰해보기로 했습니다.

<도널드 노먼의 인간 중심 디자인>(도널드 노먼)과 <테크놀로지의 종말>(마티아스 호르크스) 등을 지팡이 삼았습니다.

1)<욕망의 경제학> 저자 피터 우벨은 쥐의 앞에 마약 치즈를 두어서, 쥐가 '자제력을 발휘하도록 강제하는 상황'은 쥐에게 유해하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아주는 게 때론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죠(링크).

【2.‘도구’는 존재감이 없어야 한다】

“단순함은 삶을 즐겁게 하며 괴로움을 없애준다 - 존 마에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아주 이상한 지도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지도라고 하면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그림 혹은 ‘지도 앱’을 떠올리는데요. 이 ‘지도’는 대충 깎은 것 같은 손아귀 크기의, 존재감 없는(?) 나무 덩어리였습니다. 이누이트족의 지도라고 하는데요. 울퉁불퉁한 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춥고 어두운 상황에서 불빛 없이도 장갑을 끼고 주머니 속에서도 촉감을 통해 길을 알 수 있고, 충전도 필요없는 아주 튼튼하고 효율적인 지도죠.

저는 이 나무 지도를 보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때로 낯선 곳에 갈 땐 복잡한 정보가 많은 지도가 요긴하겠지만, ‘일상적인’ 물건이라면 이런 정보값이 낮고 소박한 ‘지도’ 쪽이 훨씬 효율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해안선, 섬 등을 표시한 이누이트의 나무 촉각 지도. 화려하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만을 남긴 단순하고도 효율적인 지도입니다. (왼쪽) ‘UX디자인의 아버지’이자 전 애플 부사장인 도널드 노먼 / The Decolonial Atlas, Linkedin

‘UX 디자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도널드 노먼이 쓴 <도널드 노먼의 인간 중심 디자인>의 영어 원제는 ‘보이지 않는 컴퓨터Invisible Computer’입니다. “보이지 않는 도구가 좋은 도구다!”가 핵심 메시지죠. 그의 디자인 철학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UX(User Experience)=사용자가 어떤 서비스를 직간접적으로 이용하며 느끼는 종합적인 경험

“도구(기술)는 인간의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인간의 ‘목적’을 보조해야 하며,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의 명쾌한 디자인이어야 한다.”

도널드 노먼에 따르면 우리가 만약 우리의 ‘삶’보다도 ‘도구’에 집중하게 되면 그것은 결코 ‘효율적인 도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안경이 너무 번쩍번쩍 멋지고 필수 기능 외의 잡다한 기능이 너무 많고, 작동이 어렵고, 쓰고 있는 내내 안경 생각만 하게 되고 이 때문에 정작 우리가 하려는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안경이 아닙니다.

그냥 시력을 보정한다는 본래 목적에 충실해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더 선명하게 잘 볼 수 있게, 튼튼하게 만들어진 안경이 ‘최고의 도구’인 것이죠.

오늘날의 기술은 우리에게 기술 그 자체만을 부여한다. 기계와 보내는 시간은 늘어나게 하고, 우리의 삶과 생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하고 있다. 모든 기술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파괴적인 기술은 아마도 PC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컴퓨터를 기차와 같은 최종 기술로 여길지 모르나, 실제로 컴퓨터는 기차를 달리게 해주는 철로와 같은 인프라의 일종이다. 기반 구조라는 것은 우리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도널드 노먼, <도널드 노먼의 인간 중심 디자인>(이하 동일)

노먼에 따르면 기계 등의 도구는 선풍기 속 전기모터 같은, 보이지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노먼이 보기에 1990년대는 ‘눈에 띄는 도구의 시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라는 신기한 도구를 가졌지만, 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잘 활용하기보다는 컴퓨터의 대단함을 찬탄하거나 이에 주눅들었죠.

노먼이 이 책을 쓴 건 퍼스널 컴퓨터가 사무실과 가정에도 보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이었는데요. 이때 노먼은 화가 났습니다. 언론이나 기업들은 ‘화소’ ‘CPU’ ‘첨단 기능이 얼마나 추가됐는지’ 등에만 주목했고, 정작 소비자의 사용 경험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먼은 이런 복잡한 기능과 최첨단 성능을 향해 “그런 것들이 대체 왜 필요한건데?”라고 외칩니다.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사실 새로운 기능 사용을 소비자에게 귀찮게 권유하는 것을 뜻한다[…]”내가 A라는 소프트웨어에서 스크롤바를 잡고 문서의 처음에서 끝으로 내려오는데 11초가 걸렸다. 그러나 B에서는 단 6초만 걸렸다”라고 어떤 칼럼니스트가 말했다고 하자. 이때 실제 사용자들에게 스크롤바를 이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대개 글을 쓰고, 읽고, 전송하기 위해 PC를 사용한다. 그리고 게임, 오락, 음악을 위해서도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PC가 오히려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회사 사무실에 있을 때면, 컴퓨터 옆에 딱 붙어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한다[…]부트, RAM, DRAM, ROM, 플로피디스크[…]우리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이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기술과 기술자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겪는 현상일 뿐이다.”

업계는 도구가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편리함을 주는지보다도, 화려한 기능들을 최대한 많이 포함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비싼 신제품엔 이런 기능도 없어요!”라고 홍보할 순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기계는 점점 더 복잡해져가죠. ‘기능은 많을 수록 좋은 거’니 불평할 순 없고요.

기계의 복잡성을 이해해서 살아남고, 사고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기계를 배우고, 노력해야만 합니다.2)

최근 세계적인 '덤폰'의 유행을 타고 노키아, 라이트폰 등 다수의 제조사에서 기능을 최소화한 휴대폰들을 잇달아 내놓고, 젊은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런 유행을 소개한 지난 3월 BBC 기사의 제목은 “스마트 하진 않지만 영리하다? 덤폰의 귀환Not smart but clever? The return of 'dumbphones'”(링크)인데요. ‘(기계의) 스마트함’과 ‘(인간 차원의) 영리함을 별개의 개념으로 쪼개어 본 시선이 흥미롭습니다. 과연 하루종일 틱톡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하는 스마트폰은 인간에게도 '영리'한 것일까요. (왼쪽) 키오스크 옆에 '느려도 괜찮아'라는 팻말이 서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모두가 쓰기 좋도록 디자인이 잘 된 키오스크가 필요할 것입니다. Lightphone, 경향신문

도널드 노먼은 <인간 중심 디자인>에서 이런 상황을 두 가지 차원에서 통렬히 비판합니다.

1)기술이 인간을 보완해야 한다(그 반대여서는 안된다)
2)복잡함은 비효율성을 만든다

우선 “기술이 인간을 보완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입니다. 기계와 인간은 아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요. 기술이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선 인간의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불을 켜두고 ‘깜빡’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정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지는 가스레인지 등입니다. 실수 한번 했다고 5시간 내내 작성하던 문서를 훌쩍 삭제해버리거나, 잘못 입력한 값을 수정 불가능하게 만드는 ‘도구 중심의 방식’이 아니라요.

병원 엑스레이 기사가 엑스레이 기계에 적용량을 입력한다. 그 후, 그 기계가 잘못된 모드에 맞추어져있는 것을 보고 설정을 수정한다. 그러나 그 기계의 컴퓨터 프로그램은 급하게 수정한 것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게 디자인 돼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수정된 값이 입력되지 않았다[...]얼마 후 환자는 결국 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기계가 잘 작동해왔기 때문이다[...]인간은 실수를 하는 데 전문가이다. (그리고) 인간의 실수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주로 그 실수가 크게 문제가 되는 ‘기술 중심의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인간 중심의 접근법은 기술이 순응하도록, 융통성 있게 만드는 것이다. 기술이 사람에 맞추어져야 한다. 사람이 기술에 맞추어서는 안된다.

저는 이 대목에서 사회학자 찰스 페로의 ‘정상 사고’(링크) 개념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현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언제 대형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진다!’는 건데요. 이 때문에 사고는 비정상 사건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 된다는 거죠. 하지만 도널드 노먼은 이런 사고를 ‘불가피한 원인불명’ 사고라고 보기보다는 기술자들이 인간 중심의 디자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 일종의 ‘디자인 사고’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거창해보일 수도 있는 얘깁니다만, 우리가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무심코 통화버튼이 눌려서 당혹스럽거나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한 가지 입력이 부족해서 맨앞으로 돌아가게 되는 화나는 일들을 자주 겪습니다. 키오스크의 사용방법을 잘 몰라서 아예 멍하니 서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고요.

사람들은 이럴 때 “아, 내가 또 실수했어” “내가 바보야”라며 자책하곤 합니다만, 노먼에 따르면 이처럼 사람이 스스로를 실수쟁이, 바보처럼 느끼게 하는 디자인은 ‘애초에 잘못된 디자인’입니다.

"한참동안 중요한 문서 작업을 하다가 에러 나서 저장 안 해둔 문서가 날아갔을 때" 저도 종종 저런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왼쪽) 스위스 웽거Wenger사가 선보인 자이언트 나이프. 툴이 87가지나 들어있으며 기능은 141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두번째로 “복잡함이 비효율성을 만든다”는 점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이 책에는 ‘스위스 군용칼’이라는 굉장히 인상적인 비유가 나옵니다. 노먼은 여러가지 칼날이 붙어있는 ‘스위스 군용칼’을 쓰기, 읽기, 듣기 등을 모두 합한 복잡한 다기능 도구(컴퓨터)에 비유합니다. 그는 이런 스위스 군용칼은 분명히 특정 국면에는 쓸모가 있지만, 결코 각각의 단기능 도구들을 대체할 순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편의성이나 성능 등의 면에서요.

우리는 여행할 때 휴대용 PC의 편리함을 느낄 수 있다. 내 랩톱 컴퓨터 안에는 이메일, 팩스 시스템, 캘린더, 주소록, 워드프로세서, 여러 해 동안 기록해 놓은 문서들이 있다. 괜찮은 음식점이나 비행기 스케줄도 이 하나의 장치 안에 있다[…]나는 여행을 갈 때 스위스 군용칼을 들고 간다. 여기에는 면도칼, 가위, 스크루 드라이버, 집게 등이 모두 들어있다. 비록 이것들이 모두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여행할 때만큼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면도칼, 가위, 스크루 드라이버, 집게 등을 따로 사용한다. 이 각각의 도구들은 스위스 군용 칼에 비하면 훨씬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스위스 군용 칼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군용 칼은 특별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기기로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필연적으로 복잡성은 증가한다. 하나의 기기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도구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복잡함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다목적 용도의 컴퓨터는 커다란 타협의 산물이(다)[…]컴퓨터가 더 잘 작동하게 하기 위해 기울이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사실 스위스 군용칼을 사용할 때 나는 종종 잘못된 칼날을 보았다.

사실 위의 대목은 도널드 노먼의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론 가장 인상깊은 대목이었습니다.

그간 저 역시 막연하게 기능이 많이 있는 제품일수록 좋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스위스 군용칼을 떠올려봤을 때 만약 거기에 붙은 도구가 많을수록 각각의 도구는 품질, 효율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번 어떤 칼을 꺼내기 위해선 수많은 칼날들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고요. 만약 50개의 칼날 가운데 제가 자주 쓰는 것은 2개 뿐이라고 해도요. 그렇다면 제가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일상적으로 거의 쓸 일이 없을 ‘48개의 거추장스러운 ‘가능성’, 그리고 어설픈 2개의 ‘실질 기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그냥 내 손에 최대한 맞는 2개의 단품을 가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3)

이어서 어쩌면 어떤 기능이 ‘없는 것’ 자체에도 장점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오늘날처럼 모든 분야에 있어 정보값과 선택지가 넘쳐나는 시대에는요.

가위는 ‘다른 기능이 없어서’ 자르는 행동에만 특화되어있습니다. 벽면에 붙은 스위치에는 ‘별도 복잡한 기능이 없어서’ 어둠 속에서도 간편하게 똑딱 불을 켜고 끌 수 있습니다. 종이책은 ‘메신저, 유튜브 기능이 없어서’ 글에 흠뻑 빠져들 수 있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스마트폰이 유용하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일체형 캠핑 냄비라든지 만능 필통 장난감을 집에서도 쓰진 않듯, ‘올인원 기계’를 언제·어디서든·누구나·항상·모든 일에 쓰는 건, 역시 조금은 낯선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2)물론 도널드 노먼은 모든 종류의 '복잡함'을 모두 다 몰아내야 한다고 하진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그는 아이폰의 '극도로 심플한' 디자인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런 심플함은 사용자들에게 직관적으로 필요한 정보마저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복잡함'과 '단순함'에 대한 독창적인 사상은 <심플은 정답이 아니다>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3)저는 이 대목에서 한창 '홈짐' 열풍이 불었을 때 많이 판매되었다가 당근에 나오곤하는 '올인원 헬스기구'를 떠올리기도 했는데요. 벤치프레스와 스쿼트, 풀업 등의 다양한 운동을 한번에 하게 해준다는 것은 곧 그중 어떤 기능도 어딘가 조금 어설프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3.‘올인원’ : 만능 도구란 가능한가?】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구는 ‘나’의 활동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도구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꾸만 화려해지는 도구를 황홀하게 쳐다보느라, 정작 나의 욕구는 잊고 조금 불편해도 도구에 맞추는 식으로요.

이런 상황에선 사람들이 제대로 도구를 나의 목적에 맞게 활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혼란해집니다. 머리가 빙빙 돌만큼 복잡하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신기능’들이 자꾸 추가되니까요.

저자가 <인간 중심 디자인>에서 ‘올인원 도구’의 대안으로 내세웠던 것은 ‘단순한 도구(정보가전)’이었습니다.

노먼에 따르면 우리가 수월하게 잘 쓸 수 있는 이런 ‘단순한 도구’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합니다 (#단기능)

2)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있습니다 (#장소성)

3) 도구 자체의 존재감이 없습니다 (#투명성)

이런 ‘소박하고 실용적인 도구’들을 맘껏 써서 더 생산적이고 더 재미난 일들을 하는 미래를 꿈꾸며, 도널드 노먼은 아래와 같이 말했죠.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컴퓨터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내게 의미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알고 싶은 것 이상을 해줄 수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는 그 기괴하고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다. 나는 내 활동에 잘 맞는 기계를 원한다. 기술이 내 눈에서 사라져서 감추어져 있기를 바란다. 전동 모터처럼, 내 자동차를 제어하는 컴퓨터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도널드 노먼의 꿈은 이루어졌어!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스마트폰이 우리를 잘 보조해주니까.’

그런데 저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으며 고개를 젓게 되었는데요. 그가 말하는 단순한 도구의 핵심 특징은 사실 ‘무엇을 할 수 있다’보다도, ‘적합한 장소에’ ‘필요한 것 빼곤 없다’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은 단순해보이긴 하지만 실은 아주 많은 기능들이 한데 뒤섞여 있죠)

<인간 중심 디자인>의 마지막엔 간편한 도구들의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잔디밭에 있는, 잔디 깎는 방법을 알려주는 패널’입니다. 이걸 예로 들어서 한번 위의 특징들을 적용해봅니다.

1)예능 방송 말고 잔디 깎는 방법만 보여줍니다 (#단기능)

2)그것은 잔디밭에 있습니다 (#장소성)

3)방수도 잘 되고 충전도 까다롭지 않습니다 (#투명성)

즉, 고장이 날까, 패널이 어디갔을까, 채널은 어떻게 맞춰야 할까(리모콘은 또 어디갔지?), 뭘 봐야 할까, 그런데 물이 안닿게 조심해야지! 등... 이 기계에 나는 조금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기계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은 오직 잔디를 깎을 때만입니다.

'비주얼 베이직의 아버지' 앨런 쿠퍼는 화려하게 눈만 사로잡으면서 정작 사람에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최첨단 기술을 ‘춤추는 곰’에 비유합니다. 곰이 춤을 잘 추든 말든, 일단 곰이 춤을 춘다는 것 자체에 깜짝 놀란다는 것이죠. (왼쪽) 롤러블 폰. 일단 '접을 수 있다'는 것에 열광하지만, 그런 폰을 쓰면 구체적으로 나의 어떤 활동에 도움이 될까?라는 물음은 사라집니다. / Boston Ballet twitter, TCL

저는 최근 세 가지 항목 가운데서도, 쉽게 간과되곤 하는 ‘도구의 장소성’에 대해 떠올려본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 책(링크)에서 어떤 작가가 메모 용도의 같은 모양의 공책을 20권정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처음엔 막연히 ‘여태껏 쓴 메모 노트가 20권 분량이나 되는구나. 대단하다’라고 생각하고 넘겼습니다만, 나중에 그 책을 다시 펼쳐보니 실은 똑같은 노트 20권을 곳곳에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책상, 식탁, 부엌, 침대 머리맡, 소파, 가방 속...이런 식으로요.

저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왜냐면 메모의 핵심은 일상 속 떠오른 순간에 적는 것인데, 생각이 떠올랐을 때 ‘메모장이 어딨는지 찾는 단계’부터 시작하려면 대체로 절반정도는 도중에 구멍난 양말이나 쌓여있는 설거지가 눈에 띄거나 마음이 식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한 권의 금박 입히고 번쩍번쩍 다양한 기능(?)들이 덧붙은 값비싼 노트는 과연 20권의 값싼 아무데나 둘 수 있는 - 적재적소에 활용 가능한 노트보다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꼭 노트 뿐 아니라 ‘도구 일반’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도구 자체가 얼마나 기능이 많고, 화려하고 비싸고 신상이고 카메라 렌즈가 잔뜩 달려있고 굉장하냐 보다도 - 적재적소에서 내가 필요할 때 가장 빠르게 꺼내서 쓰고, 평소엔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있고(충전이나 업데이트 등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던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도구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할 때 오늘날의 스마트폰 등 첨단 기기들은 ‘보이지않게 우리를 돕는 도구’라기보다는 ‘스스로 화려한 도구’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

“내 생각에 컴퓨터는 기술 자체보다는 우리의 활동을 효율적으로, 쉽게, 즐기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 개발의 관점에서 생각되어야 옳다. 최고의 컴퓨터는 눈에 잘 띄지 않아야 한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만 사용하는 도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너무나 많은 소비자들이 그들의 기쁨을 컴퓨터 자체에서 누리고 있다.” - 도널드 노먼

【4.예측을 틀린 엉터리 미래학자?】

“한 기계로 친구와 수다떨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등 모든 걸 하는 걸 사람들이 좋아할리가 없다!”

만약 어떤 미래학자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이런 예측을 했다면 어떨까요? 엉터리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테크놀로지의 종말>(2008)에서 바로 그런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

이 책의 부제는 ‘인간은 똑똑한 기계를 원하지 않는다’인데요. 이 책이 2008년에 현지 출간되었고 1세대 아이폰이 최초 출시된 것이 2007년 중순이니, <테크놀로지의 종말>은 아이폰이 열어 젖힌 ‘스마트폰 시대’의 시작점에서 그 이후를 예측했던 책이라는 의의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 틀리긴 했지만요.

저널리스트 출신의 독일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 그는 30~5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미래를 예측하는 '메타 예측'을 주장합니다(왼쪽) '아이폰'이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전 '휴대용 PC'라는 컨셉 하에 등장했던 다양한 PDA들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 대중적인 PDA의 시대를 열었던 Palm pilot / wikipedia

실은 그냥 ‘유명한 미래학자의 예측이 틀렸으니 웃기다! 놀리자’ 정도의 목적이었다면 제가 굳이 오늘 레터에서 이 책을 가져올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제가 누군가를 놀릴 처지도 아닙니다. 저 역시 2008년 무렵 한 친구가 ‘전화 기능 붙은 MP3’를 자랑했을 때 비웃은 경험이 있습니다. “야 mp3로 뭐하러 전화를 해?” 이 말을 마치 전기밥통 달린 병따개를 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던 기억입니다.

예측이 틀렸음에도 이 책을 함께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어쩌면 그 예측의 어긋남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테크놀로지의 종말>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허황된 공상과학 그림 속 기술에 푹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제대로 된 예측을 할 수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그간 우리의 눈을 화려하게 사로잡았지만 ‘현실’이 되지 못했던 수많은 허황된 기술 실패사례들이 등장합니다.(체펠린, 로봇개, 하늘을 나는 자동차...) 그 당시엔 극소수의 기술 덕후나 괴짜 부자들을 아주 흥분시켰지만 결국 실용성이 없어서 사장된 비운의 발명품들이죠. 호르크스는 사람들의 욕망을 거스르고, 현실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불편함을 주는 기술들은 결국 미래엔 잊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연장선상에서 그는 ‘올인원 기계(스마트폰)’ 역시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는<테크놀로지의 종말>에서 ‘올인원 기계’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을 꽤 많은 분량을 들여 논증하고 있는데요.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그 성격에 따라 4분면으로 나누어 각각의 특성을 분석한 시도는 사뭇 진지합니다. 요는, 이처럼 다양한 활동들에 대한, 조금씩 모자란 경험을 사람들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만족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관련 내용을 조금 인용해보기로 합니다.

기기 하나로 뭐든 다 하는 이른바 '올인원' 기기는 정말 성공이 보장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패를 선언한다. 이 기기들은 혁신의 기형아요 괴물이다. 쥐, 돼지, 너구리, 사슴, 오리가 하나로 합체한 상상의 동물 볼퍼팅어를 연상케 한다[...]첫번째 장애는 복합성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복합성은 어쩔 수 없이 개별 기능의 성능을 떨어뜨린다[...]복합화는 성능을 낮춘다. 그리고 전문화는 성능을 높인다[...]다기능 기기는 이 모든 상황(경영, 네트워크, 연애수작, 수다, 오락, 정보수집과 관찰, 심사숙고, 학습) 과 감정에 맞춰 높은 수준의 실용성을 보장해야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각각의 커뮤니케이션은 그에 따른 특정 상황을 요구한다[...]휴대폰에 만족하는 이용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통화 시간과 이용 시간도 줄어들었다[...]휴대폰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진화론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면 확실한 전문적인 특징을 추구할 것이 분명하며 한 종이 독립된 여러 종으로 분화하여 진화할 것이다.

-마티아스 호르크스, <테크놀로지의 종말>

이쯤 되면 이 사려깊고 구체적으로 틀린(?) 예측에 조금 머리가 멍해지기도 하는데요.

이어서 그는 아이폰에서부터 시작되는 전화의 도표를 그립니다. 아이폰에서 뻗어나온 화살표가 갈라진 곳에는 각각 복고 핸드폰, 조립형(모듈) 핸드폰, 만능 변신 핸드폰 폰으로 나뉩니다. 잠깐동안은 아이폰이 장악한 시장이 유지되겠지만, 이후엔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형태의 다양한 핸드폰들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체펠린' 비행선이 추락한 1937년 힌덴부르크 참사를 모티브로 한 영국 락밴드 레드제플린의 1969년 앨범 커버. 체펠린이란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체펠린 백작이 20세기 초 개발한 비행선으로 <테크놀로지의 종말>에선 허황되고 사치스러운 기술의 예로 소개됩니다.(왼쪽) 이 책에서 미래의 휴대폰 중 하나로 언급된 지멘스의 '젤리브리'. 2019년 게시물에는 이 핸드폰 시리즈를 '다시 없을 지멘스의 역대급 '어글리 폰''(링크)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왠지 개성있고 예뻐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아이폰이 만들어낸 ‘올인원 전화기’의 시대는 ‘당분간’이 아니었고 근 15년 간 우리의 삶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예측의 어긋남을 현재를 낯설게 보는 도구로 활용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래와 같이 거꾸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애초에 한 기계로 모든 것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던 게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각자의 요구와 개성에 맞추어 제대로 보조하지 못하고,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단일화하고, 때론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드는 기계를 하루종일 가지고 있는 행동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한 자연스러운 ‘진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쉽게도 호르크스가 결정적으로 간과한 부분이 있다면, 사람은 항상 최선의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욕망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4)

4)재밌게도 도널드 노먼은 그의 책에서 '시장/소비자의 요구에 맞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소비자들은 이미 현란한 광고나 전문가들의 말 때문에 무조건 복잡한 기능을 지닌 화려한 기계에 눈이 뺏겨있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그는 디자이너들이 소비자가 스스로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인간 중심의 디자인'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5.맺음말】

저는 전자사전을 갖게 되었지만, 현재로선 스마트폰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바깥에 다닐 때, 일을 할 때 - 조금은 기능이 부족할 순 있어도, 유용하게 그때그때 무언가를 찾거나 녹음하거나 할 수 있게 해주는 ‘맥가이버칼’ 같은 도구입니다.

다만 이번 레터를 쓰는 과정에서 든 생각들을 정리해봅니다.

1)도구는 나의 삶을 보조하는가? (혹시 주객이 전도되지 않았는가?)
2)내가 어떤 순간에 ‘진정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3)나는 개성을 가진 사람이다.

논픽션의 대가인 저널리스트 존 맥피의 <네 번째 원고>에서 제가 인상깊게 보았던 대목은 ‘맞춤형 글 편집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링크)

당연히 그에게 있어 자료 조사와 정리, 글 쓰기 효율성은 최고로 중요한 가치였는데요. 1980년대의 최신 워드 프로세서는 화려한 기능으로 가득했지만, ‘손에 착 붙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그는 이를 ‘5천달러짜리 가위’라고 부르며 그냥 타자기, 메모를 활용했다고 하죠.

그러던 중 1984년 프린스턴 대학의 하워드 스트라우스는 맥피의 작업 방식을 상세히 관찰한 끝에 ‘전문 논픽션 작가’에게 꼭 맞는 Kedit라는 독특하고 심플한 글 편집기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그렇게 존 맥피는 이후 평생 수십년간 이것으로만 글을 썼다고 합니다.

“하워드는 컴퓨터가 개개인에게 적응해야지 그 반대로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사이즈는 한 사람한테만 맞는다는 신념으로 범용보다 맞춤을 추구했다.”

-존 맥피, <네 번째 원고>

Kedit의 이전 버전인 Xedit의 화면. 아주 단순한 명령어로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글 편집기입니다.(왼쪽) 특이한 기능 때문에 도구의 본질을 잃고만 엉뚱하고 비효율적인 발명품을 '진도구'라고 부릅니다. 라면을 식혀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선풍기 부착형 젓가락 진도구. 젓가락질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것, 화려함, 더 많은 기능에 주목합니다.

‘할 수 있다’의 생태계에선 ‘할 필요 없다’는 말이 존재할 자리가 없습니다.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도구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줍니다. 일본의 ‘진도구(珍道具·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 결과적으로 비효율적인 도구)’들이 웃음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이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작은 효율성을 위해 큰 희생을 감수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현란하고 복잡한 도구들은 우리가 무엇을 일상적으로 희생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기계는 일이 부딪치게 되는 세계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물건이다. 기계는 그 일을 하기에 ‘좋다’. 구석기 시대의 화살은 순록을 죽이기에 좋고, 신석기 시대의 쟁기는 토지를 다루기에 좋고, 고전적인 풍차는 곡식을 밀가루로 빻기에 좋다[…]기계는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다른 문제를 일으키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 빌렘 플루서, <몸짓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도널드 노먼, 범어디자인연구소 옮김, 『도널드 노먼의 인간 중심 디자인』, 유엑스리뷰, 2019.

-이 책의 영어 원제는 레터 본문에 썼듯 <보이지 않는 컴퓨터Invisible computer>(1998)이며 같은 이름으로 앞선 2006년 울력 출판사에서 출간된 바 있습니다(링크). 어쩌면 제목만 보면 대체로 제가 우연히 집어들 것 같지 않을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아래 책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2019년판 책에 군데군데 오타가 꽤 많긴 하지만 여전히 오늘날에도 시의적인 책을 볼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두어 봅니다.

도널드 노먼, 박창호 옮김, 『디자인과 인간 심리』, 학지사, 2016.

<디자인과 인간 심리The Design of Everyday Things>은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책으로, 1980년대에 출간된 이후 꾸준히 개정증보판이 나오면서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은, UX디자인의 교과서로 불리는 책입니다. 그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어보면 좋습니다. 그간 많은 내용들이 추가되면서 그의 저작에 들어있는 핵심 메시지들이 다수 포함되었고, 위의 책에서 주로 다루어진 개념, 논지들도 이 책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디자인'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인간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앨런 쿠퍼, 이구형 옮김, 『정신병원에 갇힌 디자인』, 안그라픽스, 2004.

-비주얼 베이직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쿠퍼의 책입니다. 이 책은 거의 출간 즉시 국내에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 중심 디자인>(1998)의 2004년 버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 책 속에 나온 상황은 '복잡한 컴퓨터가 단순한 정보가전이 된 세상(도널드 노먼)'이 아니라, 우리 일상이 복잡한 컴퓨터로 둘러싸이게 되고 만 상황입니다. 기술 그 자체에 집중하는 추세를 비판하는 '춤추는 곰'이라는 비유가 꽤 흥미롭습니다.

마티아스 호르크스, 배명자 옮김, 『테크놀로지의 종말』, 21세기북스, 2009.

-사실 이 책을 본 건 조금 예전인데요. 그 당시 독서 경험이 너무 충격적이라(?) 오래 기억에 남았던 책입니다. 사실 책 자체가 그렇게 치밀한 논증,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책은 아니고, 그의 이후 저작을 보아도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통찰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는 느낌인데요(본문에선 소개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마존이 대실패할게 뻔하다고 이 책을 비롯한 여러곳에서 일침을 놓았다가 학계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개인사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서문과 중간중간 눈에 띄는 예시들이 반짝임을 품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의 공식 홈페이지(링크)에 들어가면 온가족의 커리어가 소개되어있습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말’이 없다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3400자

🖍글 속 한 문장

“잘(?) 디자인된 사회는 디자인에 대한 말이 많지 않다. 반대로 디자인이라는 말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디자인의 실체가 공허한 법이다[...]삶의 주인공은 디자인이 아니라 사람이다. 비유하자면 디자인은 연극 무대 같은 것이다. 어떤 연극에서는 미니멀하게, 어떤 연극에는 사실적인 배경이 되면 그만이다. 사람이 형상이면 디자인은 배경이어야 한다. 삶의 배경이 되어야 할 디자인이 전경(前景)이 되어 소리치고 떠들어대는 사회는 ‘나쁜 디자인’의 사회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디자인 평론가 최범이 쓴 '최범의 한국 디자인 뒤집어보기' 시리즈 칼럼입니다. 도널드 노먼 역시 '좋은 디자인은 직관적으로 작동한다'고 강조해왔는데요.

꼭 우리가 디자인하면 떠올리곤 하는 시각적인 디자인 말고도, 기계, 도시 등 인간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고 하는데요(소셜디자이너라는 말도 있듯이요). 디자인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글입니다.

오늘 레터의 연장선상에서 디자인을 '기계'에 대한 것으로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나는 더 좋은 기술으로 더 산만해진다

The Verge(영문)

🖍글 속 한 문장

“나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앱이 없어서 뉴스나 FOMO를 유발하는 휴가 사진으로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지 않는 전화(=덤폰)가 필요하다[...]누군가는 말한다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해놓는 게 어때?" 내 의지력이 높은 좋은 날엔 때로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난 인간일 뿐이고 스마트폰, 앱은 중독성이 있도록 설계됐다. 우울하고 지친 날에는 쉽게 도파민 러시를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고 싶은 유혹이 강해진다[...]우리는 세상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순 없지만, 덤폰을 사용하면 강제로 로그오프할 수 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지난 8일 The Verge의 저널리스트 쉬나 바사니가 쓴 덤폰에 대한 글입니다.

이번 레터를 쓴 경험은 제게 여러모로 흥미로운 경험이었는데요. 평소에 이처럼 스마트폰 중독 등에 대해 관심은 많았지만, 이 문제를 '디자인' '도구'의 관점에서 볼 기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 레터를 쓰지 않았다면 이 기사를 별 감동없이 읽었을 것 같은데, 레터를 쓰고 나니 '인간 중심의 도구'의 측면에서 어떤 폰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1분 영상’에서 또 1/4로 줄어든 집중력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200자

🖍글 속 한 문장

“슬러지 콘텐츠로 불리는 화면 분할 영상이 최근 틱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동시 재생되는 영상들 간에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는 게 특징이다. 이를테면 화면을 세 개로 나눠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 △드라마 장면 일부 △정치 뉴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식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최근 세계적으로 10대 청소년들의 '틱톡 몰입'으로 인한 집중력 부족 등의 문제가 떠오르고 있는데요. 팬데믹 기간 스마트폰 이용시간이 늘어나면서 짧은 영상 소비 시간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엔 '짧은 영상' 플랫폼인 틱톡에서 이를 또 4분할로 나눈 슬러지 콘텐츠가 유행 중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런 콘텐츠에 대한 가치판단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변화의 방향성이 과연 오늘날 '도구'의 성격과 떼어놓을 수 있을지 하는 생각입니다. 관련해서 추가로 읽을만한 기사입니다(링크)

공상과학 속 기술 환상은 버려라

독서시간: 약 9분 / 글자수: 약 7000자

🖍글 속 한 문장

“첨단 기술을 자랑하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박물관 유물’이 되어버리고, 구식 자전거는 점점 더 사랑받는 ‘테크놀로지 생태계’의 비밀은 무엇일까? 공상 과학 영화의 출연자처럼 생겼으면서도, 독일의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씨는 정작 공상 과학 영화 같은 미래론을 과감히 거부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테크놀로지의 종말>의 내용 및 그의 주장을 잘 전달하고 있는 월간 조선의 마티아스 호르크스 인터뷰 기사입니다.

그는 기계 중심의 정보화 시대가 끝났다며,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 '메가 트렌드 예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죠. 이 인터뷰를 통해서도 제가 <테크놀로지의 종말>을 읽었을 당시의 미묘한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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