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은 디자인은 ‘말’이 없다

2017.11.08 21:16 입력 2017.11.09 10:13 수정
최범 | 디자인 평론가

디자인은 어쩌다 말이 됐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장이 되기 전 ‘소셜디자이너(Social Designer)’란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사용했다. 그러자 몇몇 디자이너들은 자신들과 같은 디자이너라고 좋아하곤 했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씁쓸했다. 박원순이 자신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문제는 소셜디자이너를 자신과 같은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진짜(?) 디자이너들에게 있다. 소셜디자이너라는 말은 그냥 ‘사회계획가’란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운동가 박원순에게 어울리는 호칭이다.

디자인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계획 또는 설계이니 소셜디자인, 라이프디자인, 그랜드디자인 모두 가능한 표현이다. 하지만 통상 우리가 사용하는 조형디자인, 즉 산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은 그것들과 다르다. 소셜디자이너는 조형디자이너가 아닌 것이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라 구분만 하면 되는 일이다.

사회와 삶을 계획하는 것과 대량생산되는 제품의 형태·색채를 계획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활동이라는 이야기다. 전자가 비가시적 디자인이라면 후자는 가시적 디자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하면 후자를 가리킨다.

■ 디자인, 말의 범람

오늘날을 디자인의 시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전문적 디자인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디자인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가 유행어가 될 정도이다.

산업디자인·시각디자인·공공디자인·사회디자인·라이프디자인·그랜드디자인·뷰티디자인·랜드디자인…. 이 많은 디자인 영역들이 무엇인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구별하기 힘들다. 아니,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처럼 전문가라는 사람도 잘 알지 못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디자인의 시대’라 부르기 전에 ‘디자인이라는 말의 시대’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사실 세상에 디자인되지 않는 것은 없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듯 디자인의 본래 뜻에 비춰볼 때 디자인되지 않은 채 생산되는 물건이나 이미지는 없다. 다만 전문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대중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전자를 전문적인 디자인, 후자를 아마추어 디자인 또는 버내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이라 한다.

디자인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굳이 무엇이 ‘디자인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 그럼에도 디자인을 강조하는 것은 뭔가 다른 의도가 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디자인이라는 말은 왜 범람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디자인 인식의 변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디자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패션디자인을 떠올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는 앙드레 김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이라는 말이 증폭하게 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는 1983년 KBS에서 방영된 <세계는 디자인 혁명의 시대>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한국 디자인사 연구자인 김종균은 “제품의 품질과 기술을 강조하던 당시의 정부 산업정책과 시기를 같이하며, 학계와 산업계에만 한정된 기존의 디자인 담론이 일반대중에까지 범위를 넓혀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한다(김종균, <한국의 디자인>, 2013, 안그라픽스). 이러한 디자인 기획물은 이후에도 물론 심심찮게 이어져오고 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신경영을 선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005년에는 “한눈에 알 수 있는 삼성 디자인을 만들라”며 디자인 신경영론을 주문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문화산업, 지식산업, 콘텐츠산업이 강조되면서 디자인도 덩달아 주가가 올라갔다.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디자인의 전성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학 디자인과의 입학률도 기록을 경신하고, 2000년대 들어서면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이 새 화두가 되면서 디자인 범람 현상에 박차를 가한다.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산업디자인, 시각디자인 정도는 안다. 그뿐이랴. 보험설계사를 라이프디자이너로, 미용사를 헤어디자이너로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심지어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자신들을 랜드디자이너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디든지 디자인이라는 말이 붙는 것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디자인교회가 있는가 하면 디자인부동산도 있다.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호텔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히 호텔에 디자인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기존 호텔과의 차별화, 개성을 강조하는 부티크호텔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디자인(이라는 말)의 전성시대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디자인이 전문적인 디자이너들 집단의 독점물일 수는 없다. 누구든지 어디에나 디자인이라는 말을, 디자인을 강조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디자인 언어의 범람, 증폭 현상 속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면을 읽어내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이러한 말의 풍요가 어떤 빈곤한 현실의 알리바이 또는 대체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구심이 강하게 일어난다. 더욱이 디자인이 말이 되었다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말이 많아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자인 자체도 수다스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해서 수다스러워진 것과 디자인이 수다스러워진 것 역시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 디자인의 다양한 의미들

현대 디자인의 대상은 다양하고, 영역은 광범위하다. 그렇지만 디자인의 의미는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추상적인 의미, 조형적인 의미, 사회문화적인 의미이다.

추상적인 의미는 계획이나 설계를 가리키는 원론적인 것으로 정신적이고 비가시적인 차원에 속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1세기 미국을 디자인하자’고 주장한 것이나, 최근 제기되는 ‘한국 시민사회 그랜드 디자인’ 같은 것이다. 이때 디자인의 의미는 철저히 (사회)계획이라는 뜻을 지닌다.

조형적인 의미는 가시적이고 전문적인 것이다. 조형적인 디자인은 현대 산업사회의 한 부문으로 산업사회의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형적인 디자인은 대량생산(Mass Production), 대중소통(Mass Communication), 건조환경(Built Environment)이라는 산업사회의 3대 시스템과 각기 관련된 산업디자인(Industrial Design), 시각디자인(Visual Design), 공간디자인(Space Design)을 가리킨다. 이른바 현대디자인을 대표하는 세 영역이다. 여기에 더 덧붙이자면 최근 각광받는 디지털디자인이 있다. 오늘날 세부적인 디자인 영역은 무수히 많지만 크게 보면 이 세 가지 영역에 모두 포함될 수 있다.

사회문화적 의미란 일종의 ‘신화(神話)’라고 봐야 한다. 이는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와 같은 것으로, 어떤 대상에 부가된 비합리적이고 과잉된 의미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는 디자인이라는 말은 많은 경우, 그저 ‘프리미엄’ 또는 속된 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디자인교회나 디자인부동산 같은 용법이 그런 것이다. 이는 ‘키친 아트’처럼 예술이라는 말의 과잉된 용법을 디자인이 대체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이라는 말은 갈수록 추상적인 의미나 조형적인 의미보다 사회문화적 의미, 즉 신화적 의미를 강하게 띠고 있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이 같은 현상은 실체로서의 디자인의 빈곤을 감추기 위한 수사이자 알리바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생활문화로 뿌리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무슨 광고나 정치 선전에 가까운 역할을 하도록 부추긴다는 점에서 문제다.

■ 디자인은 삶의 배경이어야

디자인이라는 말이 많은 사회는 결코 좋은 디자인 사회가 아니다. 흔히 디자인을 침묵하는 세일즈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국인 집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디자인은 판매 촉진의 수단일 테니 세일즈맨에 가까울 것이고, 일반대중의 관점에서 보면 평소에 눈에 띄지 않다가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영국인 집사처럼 디자인이란 그렇게 자기 자리에 있으면 되는 물건이다. 침묵하는 세일즈맨이나 영국인 집사의 공통점은 말이 없다는 것이다.

잘(?) 디자인된 사회는 디자인에 대한 말이 많지 않다. 반대로 디자인이라는 말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디자인의 실체가 공허한 법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청 정면에는 ‘세계 디자인 수도 서울’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정말 묻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 디자인 좋아졌습니까라고.

삶의 주인공은 디자인이 아니라 사람이다. 비유하자면 디자인은 연극 무대 같은 것이다. 어떤 연극에서는 미니멀하게, 어떤 연극에는 사실적인 배경이 되면 그만이다. 사람이 형상(Figure)이면 디자인은 배경(Ground)이어야 한다. 삶의 배경이 되어야 할 디자인이 전경(前景)이 되어 소리치고 떠들어대는 사회는 ‘나쁜 디자인’의 사회다. 디자인에도 정명(正名)이 있다면 무엇일까. 디자인이라는 말이 넘치는 이 시대 한국 사회에서 한번 꼭 생각해볼 일이다.

*‘김남균(종균)의 한국 디자인 가로지르기’에 이어 디자인 평론가 최범씨의 새로운 기획 시리즈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가 격주로 목요일자에 연재됩니다.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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