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入春이 아니라 立春이라는 걸 안 건 나이가 제법 들어서였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이야기인가.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은 덤으로 했다. 하지만 생각은 또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쓴맛이 좋아지고 나서부터 봄에 대해 매해 다르게 보려고 한다. 봄을 골똘히 본다. 무덤의 상석 같은 미음(ㅁ)에 사다리 같은 비읍(ㅂ). 그 사이를 연약한 풀 한 포기가 연결해 주는 한 글자가 아닌가. 무술년 봄에 대한 생각이다.
낮의 길이가 밤의 그것을 추월하는 춘분인 그제 눈이 왔다. 그 지독했던 추위도 이제 끝났군! 성급하게 짐작했던 사람들의 정문에 일침을 놓은 셈이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몇 해 전에는 4월에도 눈이 왔었다. 그때 나는 전북 순창의 회문산 능선을 걷고 있었다. 꽃샘추위 속에서 얼음을 잔뜩 달고 있는 대팻집나무를 만났다. 대패의 자루인 대팻집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라고 해서 그 이름을 얻은 나무이다. 대팻집나무는 모든 나무들이 나이테를 몸 안에 품듯 해마다 자란 표시를 가지 끝에 스스로 기록해 둔다. 이 나무의 특징인 이른바 단지(短枝)라는 것이다. 나무의 조직이 단단하고 치밀한 비밀은 단지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이 단지의 꼿꼿함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닐까.
대팻집나무를 다시 가만히 본다. 대패는 많은 것들을 싸고 있는 보따리 같은 단어이기에 대팻집나무 앞에 서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게 된다. 가지마다 엄지손가락처럼 단지를 치켜세우고 있는 대팻집나무. 그 둘레마다 돌반지, 결혼반지처럼 작은 홈들이 차곡차곡 끼워져 있다. 그것은 혹은 꼬부라지고, 혹은 비뚜름하고, 혹은 엇비슥하게, 그 어디로 나아가는 듯하다. 경복궁의 날렵한 처마 끝을 걷고 있는 잡상(雜像)들 같기도 하다. 점심 때 와서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진 뜻밖의 눈을 보면서 낭창낭창 공중 난간을 밟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대팻집나무의 단지들을 떠올렸다. 대팻집나무, 감탕나무과의 낙엽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