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일깨움

2018.07.29 20:55 입력 2018.07.29 22:30 수정

내 안에 10년째 답변을 기다리는 물음이 있다. 울산의 한 고등학생이 던진 것인데 그 학생의 떨리는 음색까지 그대로 마음에 남아있다. 2008년 겨울밤이었다. 강연주제는 ‘현장과 인문학’이었고 청중은 대부분 교사들이었다. 그날 원고의 제목은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였다. 당시 교도소에서의 인문학 강연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던 글이다. 강연장에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내게 질문을 던진 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병권의 묵묵]‘생각 많은 둘째 언니’의 일깨움

그때 나는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실제로 인문학 공부의 현장에서 나는 여러 긍정적인 신호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울산 강연 전날 서울에서 현장인문학 워크숍이 열렸는데 흡사 인문학의 효험에 대한 간증대회 같았다. 워크숍에 참여한 여러 활동가들의 입에서 빵보다 장미, 돈보다 인문학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울산 강연에서도 나는 전도사처럼 현장인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마저 마무리되던 시간에 한 학생이 머뭇머뭇하더니 손을 들었다. 말을 얼른 꺼내지는 못했다. 입에 고인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자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감정을 겨우 가라앉힌 후 그가 내게 물었다. “오빠가 지적장애인이에요. 선생님, 오빠에게도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데 답변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뻔하다.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것이다. 철학 공부에 대한 생각을 횡설수설했던 것 같다. 철학 공부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일깨움이자 그 일깨움이 가져온 변화이고 오빠에게도 어떤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라고. 정말 엉터리 답변이었다. 철학이 어떻게 오빠에게 일깨움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일깨움이 바로 철학이라니. 거기에 또 무슨 이야기를 덧붙였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더 이상의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던 내 부끄러운 마음과 진지하게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은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그 물음과 헤어진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그동안 공부하면서 답변을 듣지 못한 질문이 그냥 떠나는 걸 본 적이 없다. 잠시 뒷줄로 물러서기는 해도 답변을 듣지 못한 질문은 묻기 위해 올린 손을 결코 내리는 법이 없다.

그 학생과는 그렇게 헤어졌지만 그의 오빠는 언제부턴가 내 앞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노들야학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지적장애인이다. 신체장애나 뇌병변장애를 가진 학생들과는 비록 중증이라 해도 수업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지적장애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철학 과목을 듣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지적장애가 덜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벽을 느꼈다. 내가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경우 간혹 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잠을 잔다. 간혹 휴대폰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몸을 배배 꼬다가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지난 학기에는 아우슈비츠에서의 비극적 체험을 다룬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다. 신체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과거 시설에서의 체험을 떠올리며 글에 흥분하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지적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제 아무리 레비의 말이라 해도 그것이 책에 쓰인 문장들인 한에서는, 그리고 그것을 내가 그대로 읽어주는 한에서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았다. 10년 전 손을 들었던 학생이 여전히 묻는 것만 같았다. “오빠에게도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지적장애인들은 철학을 할 수 없는가. 이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대한 사랑’도, 칸트의 ‘미성년에서 벗어나기’도 불가능한 것인가.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거나 끔찍한 말만 내뱉었다. 플라톤은 결함있는 아이들은 내다버리라 했고, 칸트는 이성이 없는 존재들에게는 인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지적장애인들은 철학 바깥의 유령이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책 한 권을 만났다. 제목이 <어른이 되면>이다. 자신을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고 소개하는 저자 장혜영씨와 18년간 장애인수용시설에서 살아야 했던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씨가 함께 꾸리는 전쟁 같은 일상의 이야기다. 혜정씨와 어떻게든 세상에서 함께 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분투하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혜영씨가 깨우치고 일구어온 통찰들. “나는 특별히 배운 적이 없다.”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과 함께 지내는 법에 대해서 혜영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살면서 자연스레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생각 많은 둘째 언니’는 앎을 통해 삶을 얻지 않았고, 함께하는 삶을 통해 앎을 얻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철학의 뒤집힌 성숙과 구원의 길을 본다. ‘철학을 통한 성숙’이 아니라 ‘철학의 성숙’ 가능성 말이다. 플라톤과 칸트가 성숙할 수 있는 길을 이 책의 ‘생각 많은 둘째 언니’가 보여주고 있다. 삶의 선생 노릇을 했던 앎의 대가들은 지적장애인들 앞에서 얼마나 무능했고 유치했고 무례했던가. 스스로 어른 행세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정신지체로 몰아세웠던가. 이제야 나도 혜정씨에게 손을 들고 묻고 싶다. “철학자에게도 삶이 앎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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