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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MBC의 주요 뉴스에서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진행하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 역사상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한 것이 최초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지만, “전문성 있어 보이는 남성 아나운서를 보조하고 뉴스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여성 아나운서”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은 여성 아나운서의 복장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노동하여 생계를 영위할 권리까지 위협한다.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인간이 젊음과 외모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여성 아나운서에게는 비현실적인 외모 기준이 요구되어 왔다. 방송국들이 취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여성 아나운서에게 유통기한 라벨을 붙이는 것이다. 유통기한이라는 표현이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이보다 적절한 대안을 찾기 어렵다.

여성 아나운서가 40대에 들어서면 서서히 메인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방송 시간이 줄어든다. 방송사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오랫동안 공통적으로 벌어진 현상이고, 지역방송국처럼 규모가 작은 곳일수록 더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대전MBC 채용 실태를 보면 알 수 있다. 2019년 기준 남성 아나운서는 2명으로 정규직인데, 여성 아나운서 3명은 모두 프리랜서이다. 남성의 신규채용은 각각 2000년 초반에 1명, 2~3년 전에 한 명인데 비해 여성 프리랜서는 2~3년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정규직 자리는 채용 기회가 가끔 열리지만 모두 남성에게 돌아가고, 여성 아나운서 자리는 2~3년 간격을 두고 자주 교체되는 것이다. 방송업계에서는 ‘프리랜서가 수입도 더 많고, 임신 출산 시기에 자유로운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선호한 결과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 지역방송국 여성 아나운서 지원자에게는 정규직 자리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만약 방송국에서 ‘여성 아나운서가 임신, 출산으로 인해 데스크를 비우기 때문에 정규직으로 적절하지 않다’라고 주장한다면, 사회적 공기인 방송국이 할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정규직 공채에서 여성의 지원자격을 제한한 것은 아니니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1990년대 후반 이래로 대전MBC의 정규직 아나운서 자리에 남성만 채용된 것은 우연일까. 20년의 세월 동안 유능한 여성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남성만 채용된 것일까. 촛불혁명과 미투운동을 겪은 한국의 여성들은 방송업계의 합리적인 설명을 듣고 싶어한다.


미투운동 이후 미국에서는 #SeeHer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는데, 뉴스, 광고를 망라한 미디어에서 여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자는 운동이다. 또한 2019년 뉴욕방송국을 대상으로 40~60대인 5명의 여성 뉴스 앵커가 방송 출연시간을 줄인 것에 대해 성차별 소송을 제기한 사례도 있다.

유지은 대전MBC 아나운서가 용감하게 제기한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는 4월27일 채용 성차별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는 MBC가 유지은 아나운서와 국가인권위, 여성 노동자에게 답할 시간이다. 성별 고정관념과 차별을 관행이라고 변명하는 방어적 태도에서 벗어나 방송산업의 차별적인 고용구조와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대화와 성찰, 행동을 주도하길 바란다. 그리고 더 많은 중년 여성 아나운서를, 방송인을 미디어에서 보고 싶다.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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