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는 타이포그래피 실험이다

이상의 시 ‘오감도’

이상의 시 ‘오감도’

타이포그래피는 글의 의미와 형태를 동시에 다루는 디자인 분야다. 문자는 소리를 그림으로 만든 소통 매체이기 때문에 문자에는 소리에서 오는 의미와 그림에서 오는 형태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퍼는 의미와 형태, 이 둘의 경계를 잘 알아야 한다.

타이포그래퍼 헤라르트 윙어르는 <당신이 읽는 동안>에서 사람은 글꼴의 형태와 글의 의미를 동시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시인이 의미를 본다면, 디자이너는 형태를 본다. 실제로 나는 디자이너지만 책을 쓸 때 글꼴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반면 책을 디자인할 때는 내용보다 글꼴과 조판에 더 관심을 둔다.

이상의 시 ‘오감도’는 전형적인 타이포그래피 시다. ‘의미로서의 오감도’는 난해하지만, ‘형태로서의 오감도’는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독자는 반복되는 한글과 한문 자소 혹은 숫자의 형태 차이와 리듬감을 그냥 즐기면 된다. 제목도 흥미롭다. ‘오(烏)’는 ‘조(鳥)’에서 점 하나를 뺀 것이다. 한자는 본래 그림문자이기에 이 또한 일종의 형태 유희다. 까마귀는 보통 검은색만을 갖고 있다. ‘까마귀 관점으로 보자’는 이 제목은 의미보단 형태로서 문자를 즐겨보자는 의도가 아닐까.

그래픽디자인 분야의 큰 스승인 안상수는 이상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이다. 제목에서 직감할 수 있듯 안상수는 타이포그래피 관점에서 ‘오감도’를 재해석했다. 또한 그는 ‘시각시’를 다룬 전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글자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도, 디자인된 글자를 가지고 다시 재구성하는 것도 모두 타이포그래피의 범주에 속한다. 두 가지 활동을 하는 사람들 모두를 타이포그래퍼라고 한다. 이상은 후자에 속한다. 그는 이미 디자인된 글자 요소들을 가지고 디자인 작업을 하는 타이포그래퍼였다. 물론 그가 직접 글자를 디자인한 적도 있지만 글자를 가지고 자신의 시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더 많다.” 이상이 뛰어난 시인인 동시에 뛰어난 타이포그래퍼였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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