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

2021.03.05 03:00
이랑 뮤지션·작가

나고야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는 사건이 벌어진 2019년 가을. 나는 작은 지역 페스티벌에 공연으로 참가하기 위해 나고야에 체류 중이었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관계자들과 함께 간 식사자리에 근처 아이치트리엔날레 행사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몇몇 작가들이 합석했다. 그중 댄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작가가 “젊은 세대인 우리는 전쟁을 직접 겪지 않았고, 이미 다 지난 일이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을 찾자”며 말을 건네 왔다. 아마 소녀상 전시가 중단된 일을 염두에 두고 한국인인 나에게 호의를 보이려고 한 말인 것 같았으나 ‘지난 일’과 ‘즐거운 일’이란 표현이 거슬렸다.

이랑 뮤지션·작가

이랑 뮤지션·작가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시위가 열리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다 지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고 그에게 물었다. 본인은 즐겁게 참여하고 있는 예술제에서 갑작스럽게 중단 통보를 받은 전시가 있다는 것에 대해 그 어떤 부당함도 느끼지 못한다는 걸까. “너만 즐거우면 다냐?”고 말이 나올 뻔했지만, 그건 참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겪어온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10년째 오가며 활동 중인 일본에서도 ‘좋게 좋게 넘어갑시다~’ 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린다. 내가 유전적으로 화가 쉽게 나는 체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상황을 좋게 넘어간 적이 없다.

택시 운전사와, 역 승무원과, 안 친한 아티스트는 물론 친한 아티스트와도 언쟁을 높이는 일이 생겼다. 그때마다 외국어로 내 생각을 똑바로 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은 코로나로 못 가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발언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노래를 하러 온 마당에 나는 어떤 태도로 이런 일들을 마주하는 게 좋은 건지 매번 고민이 된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2017년, ‘임진가와’ 전시를 준비하던 남화연 작가의 의뢰를 받아 ‘임진강’이라는 노래를 처음 부르게 되었다. ‘임진강’은 1957년 만들어진 월북시인 박세영 작사, 고종환 작곡의 노래로, 1960년대 일본의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The Folk Crusaders)라는 밴드가 가사를 번안해 ‘이무진가와(イムジン川)’라는 곡으로 발표했다. 일본어 가사를 작사한 마쓰야마 다케시는 교토의 조선학교에서 우연히 ‘림진강’ 곡을 듣고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이 곡은 앨범으로 발매되기 전부터 무척 인기를 끌었으나, 조총련과 남북, 일본 국제 정세와 압력에 의해 오랫동안 일본에서 금지곡이 되었다가 2002년이 되어서야 싱글로 재발매됐다. ‘임진강’은 국내에서도 한때 금지곡 처분을 받았지만 2000년부터 김연자, 양희은 등 여러 가수들이 부르고 음반으로도 많이 발매됐다.

나는 2018년부터 일본 공연에서 ‘임진강’을 부르기 시작했고, 이 노래를 들으러 공연에 찾아오는 관객이 점점 늘어났다. 만날 일이 많아지니 재일교포, 재일동포,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코리안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일본 거주 한반도 출신’ 사람들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됐다. 분단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이주한 뒤 현재도 조선 국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 대한민국(남한) 국적으로 바꾼 사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람 등 ‘재일’이라는 말 안에도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다. 또한 재일 3세, 4세대에 이르며 더욱 다양한 국적과 집단과 문화가 발생하고 있으니 이를 간단히 하나의 호칭으로 정리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문제였다(이 호칭에 관한 사회학 논문도 있다). 나는 재일 2세이며 조선인 국적인 사회학자에게 어떤 호칭을 쓰는 것이 좋을지 조언을 구한 뒤, 지금은 가장 넓은 의미로 쓰인다는 ‘재일코리안’ 호칭을 쓰고 있다.

‘임진강’ 노래를 좋아하고 자주 부르긴 하나 여전히 많은 고민이 남아 있다. 공연 전 스스로를 소개할 때 ‘조선에서 왔습니다’ ‘남한에서 왔습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중 무엇으로 말해야 좋을까. 나를 설명하는 데 이 선택지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외국에서 다른 무엇보다 내 국적을 정확히 말하는 게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나를 소개해야 하는 걸까. 국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지 오늘도 고민 중일 텐데. 과연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전쟁도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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