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작고 시끄러운 방

2021.04.30 03:00 입력 2021.04.30 03:03 수정
이랑 뮤지션·작가

나는 눈앞의 경계선을 넘어서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지
들어는 봤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활기로 가득 찬 세상과 도시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내가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나와 닮은 사람들을 어디선가 만나고
닮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기를
우리의 방은 너무 작고 시끄럽고
우리에게 돈은 항상 멀리 있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나 외의 모든 사람이 읽은 듯해서 언젠가 부채감으로 구입한 뒤, 책등만 바라보면서 몇 년 동안 꺼내보지 않았다.

이랑 뮤지션·작가

이랑 뮤지션·작가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중 한 책방에서 <자기만의 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일단 승낙한 다음 책장에서 부리나케 책을 찾아보았다. ‘여성이 글을 쓸 수 있으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문장이 너무나 유명해, 이미 읽은 것처럼 착각이 드는 이 책은 1928년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케임브리지대학교 내 여자대학인 거턴과 뉴넘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발전시켜 완성한 것이다.

강연문에 기초한 특유의 본문 말투가 낯설었지만 익숙해지니 점점 작가 본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자기만의 방=작업공간을 갖지 못한 여성 작가들이 가사노동과 육아 등으로 집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픽션을 완성했는지, 그렇게 완성한 픽션에서 ‘집중이 깨진’ 흔적을 얼마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지 짚어낸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창조에 알맞은 심적 상태를 갖지 못한, 재능이 많은 여성이 느꼈을 분노에 공감할 수 있었다.

돈과 자기만의 방을 주제로 내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을 되짚어 나가다 스물여덟 즈음에 쓴 일기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도 될까’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망원동에 방 세 개짜리 다세대주택을 월세 45만원에 구해, 룸메이트 두 명과 함께 막 이사를 끝내고 쓴 글이었다. 열여덟에 집을 나와 열 번째로 구한 집이었고 그동안 옮겨다닌 열 군데의 집 가운데 가장 ‘집다운 집’이었다. 안타깝게도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 집주인이 매매로 내놓는 바람에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집이 주는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했다. 각 15만원씩 월세를 부담하던 두 친구 중 한 명이 직장에 가고 한 명이 학교에 가면 오롯이 집의 고요함을 즐길 수 있었다. 내 방에는 책상과 매트리스, 옷걸이를 놓을 공간이 충분했고, 다리가 접히는 플라스틱 책상 앞에 앉아 <신의 놀이> 앨범에 실을 많은 노래를 만들고 녹음도 했다. 가끔 밤중에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면 이웃집에서 “작작 좀 해라!” 소리를 질렀다. 에어컨 없는 방에서 한여름에 창문을 꽁꽁 닫고 땀을 내며 노래를 불렀지만, 사람 셋과 고양이 셋이 함께 살던 그 집의 기억들은 유난히 좋다. 그때 즈음부터 일본 활동도 잦아지기 시작했는데 노래하기 위해 외국에 다닌 경험은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정말 신선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제인 에어> 작가인 샬럿 브론테에 대해 쓰며 ‘그녀에게 활기로 가득 찬 분주한 세상과 도시와 지역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이 있었다면, 그녀에게 경험과 교류와 여행이 허락되었다면 얼마나 막대한 이익이 되었을지’ 안타까워한 부분을 마침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몇 번의 공연을 위해 지역을 이동하는 틈틈이 식당이나 호텔에서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 후렴구를 쓰며 ‘돈’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등장시켜보고 싶었다. 불러보니 생각보다 위화감이 없어 다행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시들의 크고 작은 공간에서 노래하고, 밤이 되면 유난히 비좁은 호텔방 침대에 걸터앉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1년 365일 이 호텔방처럼 작은 공간에 내내 머무는 사람과, 다양한 크기의 공간을 경험한 사람은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며 살까. 요가매트를 펼치기도 어려운 작은 내 방과 친구들의 방을 떠올렸고, 공연장으로 쓰이는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 느낀 감정들을 떠올렸다. 더 많은 경험을 꿈꾸던 나의 바람과, 친애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떠올리고 비행기에서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강연문을 뒤적이며 ‘우리의 방’이라는 노래를 완성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