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뭐라도 하루에 하나

2021.07.15 03:00 입력 2021.07.15 03:06 수정 오은 시인

SNS에 매일 책 읽는 계정을 만든 지 반년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읽은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골라 올리는 계정이다.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하루에 한 권, 책 읽는 계정입니다. 함께 나누고픈 구절을 올립니다.” 사진을 함께 올려야 되는 채널이라 매일같이 책 표지 사진도 찍는다. 물론 대부분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예전만큼 사적인 외출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책을 읽기 위해 카페나 공원을 찾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오은 시인

간혹 이동할 때면 책을 두세 권씩 들고 나간다. 다 읽지 못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욕심을 덜지 못하겠다. 예전엔 버스나 지하철의 백색소음과 크고 작은 흔들림이 집중에 도움이 됐다면, 마스크 때문인지 이제는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마스크를 낀 채 책을 읽을 때면 내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린 것은 입인데 이상하게 활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물리적인 방어막이 심리적인 장벽으로 작용하는 듯도 하다. 지난 반년간 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읽어왔던 셈이다.

원래의 계획은 반년이었는데 어느덧 7월의 한복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1년 동안 하루에 한 권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두렵지만 기꺼운 마음이다. 피가 되거나 살이 되거나 뼈가 되지는 않더라도, 무언가를 지속한다는 것은 삶을 지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것이 매일 하늘 사진을 찍거나 동네를 한 바퀴 뛰는 심상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사사로운 일이라도, 그것을 매일 한다면 차원이 달라진다. 매일 어떤 일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그 일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삶을 어떤 식으로든 물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직업은 나를 드러내주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다.

내 계정을 본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진짜 매일 읽어요?”와 “어떻게 매일 읽어요?”다. “진짜 매일 읽어요”와 “어떻게든 매일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요”라고 나는 답한다. 어떤 날에는 책을 끝까지 다 못 읽는 경우도 있고 필요에 따라 특정 부분만 찾아 읽기도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도 있다. 수불석권(手不釋卷)의 경지는 요원하지만, 개권유익(開卷有益), 즉 책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이익이 있음을 아는 수준에는 도달하게 되었다.

지난 6개월이 책을 가까이할 수 있을 만큼 한가로웠던 것만도 아니다. 여가를 활용하기 위해 독서를 한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도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북토크나 작가와의 만남 같은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이는 매일 책을 펼치고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조차 밥은 걸러도 화장실에는 가야 하지 않는가. 내게는 화장실에 꼭 들고 가는 것이 책이었던 셈이다. (화장실에서 책을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늘 “시간 없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책과 함께 반년을 살면서 적어도 책 읽을 시간마저 없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간절히 원하면 어떻게든 짬을 내게 되고 그 짬을 활용해 계획한 일을 하게 된다. 책을 읽다 함께 나누면 좋을 구절을 발견하면 뛸 듯이 기뻤다. ‘추천’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누군가 내가 올린 구절을 보고 책을 구입하는 상상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누가 시켜서 읽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했기에 더욱 값진 시간이었다.

일하고 밥 먹고 잠자는 일 등 생활과 생존을 위해 하는 일 말고 매일 하는 일을 하나 늘리는 것은 웬만해서는 하기 힘들다. 우리의 심신은 그간 구성된 패턴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라도 하루에 하나 하겠다는 마음이 행동으로 연결될 때, 일상은 새로운 무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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