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폐경기,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2022.02.10 03:00 입력 2022.02.10 03:01 수정

[이희경의 한뼘 양생] 천 개의 폐경기,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몇 년 전 복고열풍을 불러왔던 화제의 드라마 한 장면. 갱년기를 겪고 있던 주인공의 엄마는 매사에 짜증이 나고 우울하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하는 말, “나, 사형선고 받았다. 하느님이 내보고 여자로 그만 살란다. 당신, 이제 내캉 의리로 살아야 하는디 괘않겠나?”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도 폐경기는 여성성 상실, 여자로서 끝이라는 식의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그런 낙후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얼굴이 붉어지길래 부끄러우냐고” 묻는 일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폐경기는 여성호르몬이라 불리는 에스트로겐이 감소하면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신체적 변화과정일 따름이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폐경기 이슈는 수십 년 사이에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앎과 의료라는 과학적 영역으로 전환되었다. 안면홍조, 수면장애, 다한증, 과다월경, 우울증 등은 늦기 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예방 혹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그런데 과연 좋아진 일일까? 우리는 또다시 전문가가 제공하는 의학 정보와 온갖 갱년기 건강식품에 포위되어 버린 건 아닐까?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에서 의사의 치료 대상으로 위치만 바뀌었을 뿐 자기 몸과 주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폐경기를 공부하기 위해 4회짜리 짧은 세미나를 만들었다. “삶의 진정한 지혜는 폐경기에 찾아온다”라고 말하는, 이 분야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티안 노스럽의 <폐경기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텍스트로 정했다. 그러자 3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비혼과 기혼을 망라한 스물다섯 명이 전국 각지에서 줌으로 접속하였다.

그런데 막상 세미나가 시작되자 나는 좀 당황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노스럽의 책은 자신의 이혼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사적인 발화와 공적인 정보가 교차하고 전문가의 견해와 개인적 감정이 혼재된 글쓰기! 그런데 그런 식의 스토리텔링이 오히려 묘한 매력을 풍겼다. 솔직히 자기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는 갱년기 정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의 상관관계를 안다고 해서, 조골세포와 파골세포의 역할을 파악했다고 해서 자기 경험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르몬과 신체적 변화, 그리고 감정의 기복까지 연결해 분산된 경험을 맥락적으로 엮어내야 한다. 폐경기를 주체적으로 겪는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 삶을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쓰는 일일 게다. 우리는 노스럽을 따라 자기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요실금이 생겨서 고통이 심하다고 했다. 유방암 치료를 위한 호르몬 처방 때문에 일종의 강제 폐경을 경험하게 되면서 아무 때나 열과 땀이 나는 등 자기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빠져버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오버사이즈 생리대로도 감당할 수 없는 과다출혈이 40일씩 계속된다는 고백도 나왔다. 우리 모두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 일이었다.

신체적 증세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분노 조절이 잘 안 되어 어디서나 쌈닭이 되어 간다는 고백, 사춘기 아들과 거의 매일 세계대전급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토로, 툭하면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실토가 이어졌다. 그런데 말을 나누다 보니 감정 역시 호르몬의 변화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호르몬 수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다양한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뭐하나 변변히 이룬 것이 없는 삶의 이력, 이혼이나 자녀의 독립 같은 가족관계의 재편, 끝없는 노동에도 불안한 경제적 상황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야기는 누에가 실을 잣듯이 이어져갔는데 이야기의 둥근 원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때론 교정되고 때론 풍성해졌다. 감정의 기복을 의지로 극복하겠다는 사람은 호르몬의 물질적 영향력을 받아들였고, 우울증 약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해석을 바꾸고 익숙해진 삶의 패턴을 바꿔야만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론 공감하고 때론 안쓰러워하면서 서로에게 애틋한 존재가 되어갔다. 이야기만으로 생면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연대의 감정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도 감탄했다. 폐경기 세미나는 끝났다. 그러나 군대 이야기, 정치 이야기, 입시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여성들의 폐경기 이야기는 여전히 너무 적은 게 아닐까? 우리에겐 더 다양한 폐경기 이야기, 그 천 개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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