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보고 싶다, 일상의 정치

2022.06.14 03:00 입력 2022.06.14 03:03 수정

요즘 엄마의 최대 관심사는 같이 사는 강아지다. 그의 일과는 강아지에 맞춰져 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실내에서 용변을 보지 않는 강아지를 위해 짧게 산책하러 나가고, 산책 후에는 강아지를 위해 닭가슴살을 삶는다. 풀밭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강아지에게 조금이라도 더 ‘목줄로부터의 자유’를 주려고 인적이 드문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그날의 ‘메인 산책’을 나간다. 내가 어렸을 때도 날 저렇게 애지중지 키웠나 싶을 정도의 과보호가 이어지고 있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어느 날 엄마가 상기된 얼굴로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당연히 강아지 사진일 줄 알았는데, 휴대폰 화면에는 뜬금없이 흙밭 사진이 떠 있었다. 듬성듬성 난 잡초와 커다란 쓰레기봉투 몇 개. 이게 뭐냐는 눈빛에, 엄마는 “내가 치웠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강아지가 좋아하는 기찻길 옆 화단 사진이었다. 흙길 밟기를 좋아하는 강아지는 늘 인도가 아닌 화단의 흙을 밟는데, 몇 달째 방치되어 강아지가 핥을까 무섭던 그곳의 담배꽁초, 플라스틱 술병, 술 컵 등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치웠다는 거였다.

엄마의 ‘실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진은 서울 동대문구청까지 전해졌다. 도대체 쓰레기가 방치된 긴 시간 동안 구청은 무엇을 했냐는 엄마의 민원은 정당했다. 몇 주 후 나는 출근길에 엄마의 ‘정치적 성공’을 봤다. 깨끗해진 화단 옆에 동대문구청 로고가 크게 박힌 현수막이 붙은 것이다. 내용인즉슨,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살면서 나의 정치적 요구가 실현되는 순간은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시민단체의 사무실에는 수많은 전화가 걸려 온다. 대부분은 민원과 상담 전화다. 내용은 다 다르지만 전화의 목적은 하나로 귀결된다. 자신의 사연을 정치적으로 해결해달라는 것이다. 간절한 요청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전화의 결론은 늘 “제가 도와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더듬더듬 인터넷 검색으로 이곳에 전화해보시라, 저기에 글을 올려보시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사회에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창구란 별로 없다. 그나마 의사를 표현하기 가장 쉬운 투표마저도 ‘비호감 선거’로 전락해 투표장까지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한데, 그 외의 방법으로 일반 시민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되겠나. 있다고 해도 그 방법은 꽁꽁 숨겨져 있다. 나의 고민과 불안을 어떻게 정치적 요구로 바꾸는지, 우리는 배워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정치는 시민의 요구를 제대로 정치의 언어로 바꾸고 있는가. 지난 대선이 비호감 선거였다면 이번 지방선거는 무력감 제조기였다. 공보물을 열심히 뒤져도 ‘나’를 위한 주민 의제가 없었다. 가장 일상적인 요구를 정치로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지방선거 아니었던가. 왜 지방선거에서조차 나는 ‘나’라는 주민 개인을 찾을 수 없었던 걸까. 언제까지 정치가 내 삶과 상관없는 싸움이어야 하는 걸까.

시민과 정치가 소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시민은 어떤 효능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엄마의 상기된 목소리와,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현수막을 떠올린다. 집값으로 가득 찬 공보물 말고, 양당만 있는 투표지 말고, 내 삶과 가까운 진짜 일상의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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