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사회 반성문

2022.11.11 03:00 입력 2022.11.11 03:03 수정

[권헌영의 사람과 디지털] 디지털사회 반성문

정부가 정한 국가애도기간은 끝났지만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민적 슬픔과 위로는 여전하고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을 것 같다. 참사 수습과 더불어 안타까운 사연들이 연일 보도되는 가운데 속속 드러나는 책임 있는 이들의 그날 행적은 우리가 지금 21세기에, 그것도 세계 10대 선진국에 살고 있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자괴감을 갖게 한다.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그간 한국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세계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참사 당일부터 이태원 상황을 전 세계에 속보로 내보낸 CNN은 한국이 실시간 군중 통제를 하지 못한 데 대해 당국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한국에서 발생한 이번 참사에서 행정부의 신뢰 회복이 새 정부의 주요 화두가 되고 있다는 가디언의 지적은 치안 우수 국가였던 한국으로서는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BBC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실천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대규모 군중이 집결하는 상황에서 정책 한계를 보여줬다고 지적하고 매뉴얼이나 방재 정책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우리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고, 시부야의 군중 통제 성공사례를 부각하면서 우월감을 드러낸다.

디지털을 통한 국가 혁신을 부르짖어 온 마당에 이태원 참사는 디지털 반성문을 쓰게 만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참사 당일에 대한 수사가 거듭되고 언론에서 발품으로 확인한 내용들이 보도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간다. 당일 군중이 평년보다 매우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임을 모두가 예측하였다고 하고, 지하철역 이용객 수가 이를 데이터로 보여주고 있으며 심지어 관계기관 간 연락이 이루어진 사실도 드러났다. 통신사의 이용자 밀집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모든 이들이 휴대전화를 비롯한 단말기를 갖고 있어서 상황 전파가 가능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관제센터에서 현장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문제를 제때 발견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확인한 이후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일에 대비하겠다고 조 단위의 예산을 투입해서 마련한 재난안전통신망이 정작 필요할 땐 무용지물이었다니 디지털 반성문이 아니고서 어찌 국민 앞에 석고대죄를 할 수 있을까.

재난안전통신망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추진한 역사상 가장 큰 디지털재난대응사업이다. 빠른 대응을 위해 4세대 통신망인 LTE 기반으로 전국의 재난 관련 기관을 단일 통신망으로 일원화했다. 총 사업비 1조5000억원이 투입된 재난안전통신망은 올해가 완공 1주년이다.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 무용지물이었다니 디지털 반성문을 쓰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국민 앞에 송구한 마음뿐이다. 사고 현장에서 기관 간의 통화가 이 통신망의 주요 목적인데 실제로 참사 당일 소방과 경찰, 의료진 등 기관 간 통화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 내부, 소방 내부, 의료진 내부 등 기관 내부 소통은 이 통신망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을 듣고 더욱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상황 전파나 정보전달 또는 소통의 문제가 참사의 핵심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니 디지털 기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디지털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기술만능주의를 반성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다루는 내부를 살펴보자. 재난안전 업무를 수행하는 소방이나 재난 담당 공무원은 대부분 하급직이다. 이태원 참사의 현장에서도 이태원파출소장이나 소방서장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국민 앞에 드러났다. 이들도 정부 전체로 보면 하급직이다.

디지털 기술이 현장에 적용되는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재난통신망을 비롯한 우리 정부의 디지털 사업은 기관 내부의 전문조직인 정보화담당관이 담당한다. 이들은 정보기술 전문직이다. 현장과 기관의 전략을 연결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부분 정부 조직에서 기획관리실의 하부조직으로 둔다. 공직 내부에서 기술직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기관의 전략적 논의에 그야말로 직을 걸고 참여하지 않으면 혁신이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사업은 민간사업자가 수행한다. 정부 내부에서 전략적 판단에 따라 기능을 구현하고 실제 활용하도록 하려면 장관이 직접 지휘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장관도 대부분 손님이라서 상황 파악이 되면 다른 손님으로 바뀌는 마당에 기술직 담당관이 외부사업자를 통해 디지털 혁신을 하니 현장에 착근하려면 하세월이 되는 것이다. 이런 난맥상은 결국 참사로 이어진다. 디지털 기술이 모아오는 데이터가 지휘권의 출발이고 핵심임에도 보고체계를 따진다. 이순신 장군이 현장에서 선조의 지휘대로 움직였다면 조선은 그때 망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112·119에 접수된 현장 정보를 바탕으로 지령이 내려지면 그것이 현장에서 종국적인 명령이 되어야 하는데 지휘체계까지 올라가고 거기서 현장을 이탈한 지휘관이 세월을 보내는 일은 디지털 기술이 아니라 디지털 문화의 실패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장 소방관에게 ‘컨트롤타워는 당신이다. 당신 뒤에서 대통령이 정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제공해 주겠다. 판단은 현장에서 하라’고 일갈한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시스템을 갖추고도 디지털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국 디지털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직도 사농공상을 신봉하고 스스로 결정권자라는 신화에 빠져 있는 공직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다면 기술만 첨단으로 가고 사회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의 세계적 반면교사가 불 보듯 뻔하다.

한국이 디지털 혁신을 추진한 것도 20년이 넘었다. 통신정책이나 행정 정보화를 시점으로 하면 50년이 넘었다. 전자정부 1등, 데이터 개방 1등, 통신망 1등 등 디지털 기술은 1등이다. 그런데 국가경쟁력, 정부신뢰도, 불평등지수, 자살률 등은 모두 국가 실력에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를 반쪽으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돕는 사람일 뿐 결정은 모두 다 함께 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넘어서 디지털 문화와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민주주의를 제대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다. 다 함께 반성문을 쓰고 새로 시작하자. 그래야 세계에 내놓을 새로운 정부 표준 모델로 디지털플랫폼정부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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