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봄에 충격과 놀람, 부러움과 좌절을 함께 맛보는 경험을 했다. 뉴욕 센트럴파크 옆에 있는 미국자연사박물관. 지하 1개 층, 지상 4개 층에 45개의 상설전시실을 갖춘 박물관의 총건축면적은 19만㎡에 달한다. 크기야 땅 넓은 미국이니 그렇다 쳐도, 입구에서부터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물 공룡 뼈대를 보는데 고개를 뒤로 잔뜩 꺾어야만 가능했다. 압도된다는 게 무엇인지 나의 벌어진 입과 동공이 가르쳐주었다. 전직 과학교사 출신 은발의 자원봉사자가 안내하는 전시 내용은 끝이 안 보였고, 자료의 수준이 기가 막혔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하염없이 미끄럼이나 타던 우리 아이와, 넓디넓은 보물창고에서 탐구 중인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왈칵 우울했다.
<박물관은 살아있다>는 영화로 잘 알려진 미국자연사박물관은 무려 1869년 4월6일 설립되었다. 미국 제26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친인 루스벨트 시니어와 금융가 J P 모건 등 20인이 함께 자연과학의 연구·지식 보급과 진보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통상 자연사박물관엔 공룡뼈 화석과 동물 박제, 곤충 표본들만 있을 것 같지만, 식물, 지질, 인류, 천문, 어류, 무척추동물, 포유류, 곤충, 파충류, 조류, 고생물 표본 및 민속품 그리고 관련 서적들과 영상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학문과 관련된 기초자료와 기록이 꾸준히 업데이트되기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는 것만으로 해당 국가가 기초과학과 탐험, 기록 분야에 돈과 시간, 인적자원을 얼마나 투자해왔는지 알 수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를 중요한 주제로 삼는 박물관이 늘고 있다.
2008년에 뉴욕을 방문한 이유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12개 국가와 동시에 기후변화 특별전을 기획하는데, 환경재단이 우리나라 주최사로 선정되어 현장 방문 겸 계약서를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립자연사박물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9년 6월 국립과학관에서 미국과 똑같은 전시물로 1322㎡ 전시장을 꾸몄고 환경재단이 우리 현실을 반영한 콘텐츠로 2600㎡ 공간을 구성하여 12개 국가에서 동시에 기후변화 체험전을 열었다. 석 달 만에 30여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그해 최고의 전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쁘기도 했지만, 미국자연사박물관의 배꼽만 한 전시물에 보여준 환호가 우리의 지적인 갈증을 방증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많은 지자체들이 다양한 전시관을 짓거나 운영하고 있고, 건물에는 선뜻 큰 투자를 하고 있다. 자연사박물관 없다고 나라에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뿌리 없이 솟아나는 열매는 없는 법. 저 어마어마한 자연과 문명의 총합을 보고 배운 아이들과 낡은 교과서로 자란 아이들이 같을 리 없다. 그래서 급한 김에 세계 3대 자연사박물관 중 하나인 ‘런던자연사박물관’의 기후변화 전시를 2023년에 국내 유치할 계획이다. 신년엔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협력하여 ‘국립자연사박물관 추진위원회’라도 발족하면 좋겠다. 언제고 어지러운 세파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기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