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없어요

2023.02.23 03:00 입력 2023.02.23 03:05 수정

시를 쓴다고 말할 때마다 긴장된 적이 있었다. 상대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았을 때, 때때로 그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말았을 때 나는 물색없는 말을 한 사람처럼 어색해졌다. 대체 시를, 시인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놀라지? “지금도 시 쓰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어요”라는 말도 들어봤다. 학창 시절, 내가 배웠던 시들은 이미 타계한 시인들이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나도 막연히 생각했었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안 쓰는 모양이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여서일까. 이제는 시인이라고 소개한 후 상대의 반응을 기대한다. “아, 그래요?” “시를 쓰신다고요? 제가 아는 그 시?” 같은 반응은 나의 볼을 붉히지 못한다. “저도 가끔 시 써요. 흔들릴 때나 멈칫할 때” “제 친구도 요새 시 쓰기에 열심이에요. 수업도 듣는다고 해요” 같은 답변을 더 자주 듣는다. 그러면 나는 맞장구치며 “시는 확실히 돌부리 같은 데가 있지요. 아무 생각 없이 걷던 우리를 걸리게 하니까요.” “뭐든 하면 는다고 하잖아요? 많이 쓰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어요”라고 대꾸한다.

그러다 훅 들어오는 질문은 내 입을 즉각적으로 다물린다. “언제 영감을 받아요?” “어딜 가야 영감을 받을 수 있어요?” 그들의 질문은 아마도 영감(靈感)의 두 번째 뜻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 말이다. 착상(着想)은 말 그대로 ‘생각이 붙는’ 것이고 자극은 ‘받는’ 것이지만, 이는 가만있다고 해서 난데없이 들이치는 것은 아니다. “영감은 없어요. 찾으러 가야지요.” 내 말에 질문자들의 눈이 똥그래진다. ‘대체 어디로?’라고 묻는 표정이다.

은희경의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 2022)에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네 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뉴욕으로 떠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최대의 도시에서 마음껏 영감을 받고 돌아오리라는 바람으로 부풀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국이라면 별 무리 없이 해결했을 상황은 갑작스러운 난관으로 다가온다. 국경을 넘은 인물들은 자유의 주체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미 편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믿었던 친구는 자기 위주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온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도무지 영감이 깃들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소설집을 읽으면서 이 미묘한 불쾌함이야말로, 아니 이 미묘한 불쾌함 또한 영감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탁 트인 시야, 초고층 빌딩, 맨해튼의 야경, 풍성한 볼거리와 먹을거리에서 영감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이를 가리켜 ‘수동적 적극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눈앞에 근사한 답이 가득한 상황에서는 굳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어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살면서 쌓아왔던 믿음에 균열이 생길 때, 사람들은 드디어 다르게 보기를 감행한다. 다르게 생각하기를 실천한다.

영감은 찾아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먼저 영감에 찾아가는 심신을 만들어야 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커피를 한 잔 마시러 외출을 하는 것도,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다음 계절에 여행할 곳의 항공권을 알아보는 것도 어찌 보면 영감을 찾으려는 절박한 몸짓일지 모른다. 일상적 실천도 가능하다. 걸음 수를 채우기 위해 걷는 대신, 낯선 풍경을 마주하기 위해 걷는다고 마음먹으면 산책은 작은 모험이 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장면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산책을 대하는 자세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미 있었던 것’이 ‘지금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영감은 없다. 그러나 찾으러 갈 수는 있다. 받을 수는 없지만 잡아챌 수는 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